[408호 이한주의 책갈피]

방학식 끝나고 17번, 28번은 집에 가지 말고 교무실로 와서 우유 받아가세요. 17번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남자아이 A였고 28번은 나였다. 우리 둘은 친구들이 다 떠날 때까지 교실에서 시간을 죽이다가 교무실에 갔다. (11쪽)

열한 살 초등학생은 빈곤 가정 자녀에게 나눠주는 멸균우유로 가난을 깨닫는다. 그런데 멸균우유를 받는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니다. 같은 주공 아파트에 사는 A도 우유를 받는다. 두 사람은 교실에 남아있다가 우유를 받아 함께 집에 간다. 짜증 난다고 투덜거리고, 그러면 그 우유 달라고 하고, 우유가 있으면 할머니가 빈속에 약을 드시지 않아 좋다는 사정도 얘기하며 아파트 언덕을 오른다. 이 광경을 본 친구들이 둘이 사귀냐고 키득대지만 상관없다. 성인이 된 안온 작가는 함께 멸균우유를 받았던 17번 A를 ‘멸균우유 동지’로 기억한다. 작가가 1인칭으로 가난을 기록하면서도 그 가난을 1인분이라고 하지 않는 것은, 함께 가난을 통과했던 멸균우유 동지가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멸균우유 동지가 어른이 되어 만나면 어떤 일이 생길까? 김기태 소설가의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문학동네)에 실린 표제작이 바로 그런 이야기다.

중학교 같은 반에 다니는 김니콜라이와 권진주는 ‘흰 봉투 동지’다. 김니콜라이는 러시아 국적 고려인 자녀이고, 권진주는 한부모 가족인데 이 두 사람은 1년에 한두 번 담임선생님께 불려 가 함께 흰 봉투를 받는다. 학교 행정실에서 보낸 봉투에는 내야 할 어떤 돈을 내지 않았다는 안내문이 들어있다. 담임은 두 사람에게 흰 봉투를 주며 “둘이 친하게 지내” 놀리듯 말하지만 둘은 전혀 친해지지 않고 중학교를 졸업한다. 두 사람이 친해진 건 5년 뒤 공장노동자와 마트 아르바이트생으로 다시 만났을 때다. 낯선 도시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함께 밥을 먹으며 친해진다. 친해지면서 진주는 고려인 자녀 니콜라이에게는 주민등록증이 아니라 외국인 거소증이 발급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니콜라이는 진주의 어깨에서 어린 시절 부모가 던진 물건으로 생긴 흉터를 본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가며 소박하게 사랑하지만 가끔 불안하다.

자아실현 같은 건 모르겠지만 견딜 만한 일을 하고, 지글지글 보글보글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삶. 가끔은 나란히 누워서 햇볕을 쬘 사람이 있는 삶. 이 정도면 괜찮다고 여기면서도 어두운 골목을 걸어 다시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면 불안해졌다. 어느 날 흰 봉투가 날아와 계약 종료 통지서나 처음 들어보는 병명의 진단서를 덜컥 내놓는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걸까. (133쪽)

안온 작가는 20여 년간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았다. 그가 쓴 에세이집 《일인칭 가난》(마티)은 이렇게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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