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호 공간을 찾아서: 전세사기 피해자 인터뷰] 박혜빈(1992) 님, 대전
전세사기 피해자 인터뷰를 시작하며1)
2021년부터 터진 전세사기 문제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전세사기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에 관한 특별법’상 피해자로 인정된 사례만 2만여 건, 그중 70% 이상이 20-30대 청년이다. ‘너무 비싼 집값, 낮은 사회주택 보급율’이라는 삭막한 현실에서 청년들은 비교적 낮은 가격대로 주거할 집을 찾고, 주로 빌라나 원룸(다세대·연립주택)으로 독립 가구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정부가 보증금 대출이자를 지원하는 방법으로 그간 청년 주거를 지원해온 사실은 전세사기의 주 타깃이 청년인 현실과 무관할 수 없다. 잦은 거래로 시세 파악이 쉽고, 부동산 투기 방지를 위한 관리와 규제가 집중되는 아파트 외 주택이 사실상 정부의 관리 밖이었던 것도 마찬가지다. 전국의 ‘빌라왕’은 ‘갭투자’로만 수백 채씩 주택을 소유하는 ‘투자’가 가능했던 제도의 구멍 위에서 탄생했다. 그 책임을 통감하고 제도를 정비해야 할 정부 인사들은 이 사태를 ‘사사로이’ 다루며 전세사기 피해를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는 망언을 일삼았다. 피해자의 정당한 발언이나 요구는 폄훼됐고,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집을 찾는 사람들 사이에서 ‘막연한 공포’가 된 전세사기는 정말로 피해자 개인의 문제일까?
이 질문에 대한 탐구로서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집 이야기’를 들었다. 각양각색의 삶 위에서 사회 성원으로 살며, 주거 경험을 쌓던 피해자들의 집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집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집에서 자라고, 집을 떠나고, 집을 찾고, 집을 운영하며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강도 만난 이들의 경험은 우리 사회 주택 임차 제도의 허술함을 그대로 증언한다. 누군가는 운이 좋아 피한 전세사기에 다음엔 누가 걸릴지 알 수 없다. 이대로 집을 찾고 삶을 그리는 여정을 우리가 두려움 없이 계속할 수 있을까? 미래를 뺏기고 위축되는 임차인이 속출하는 사회가 잃는 게 단지 ‘돈’뿐일까? 이 물음을 통해 전세사기 피해가 다시 파악되면 좋겠다.
집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혜빈 씨는 ‘가지의 탄생’에 관해 말했다. 먹을 수 있는 식물의 열매가 생겨나 자라는 자연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 집. 거기서 보낸 유년의 시간은 그녀에게 따뜻한 기억으로 뿌리내렸다. 맞벌이 부모와 떨어져 자랐어도 주변엔 돌봐주는 어른들이 있었다. 대구 한적한 지역의 조부모 단독주택, 현관만 나서면 바로 땅을 밟고 안전히 놀 수 있는 집은 내향적인 혜빈 씨에게 쉼 그 자체였다. 외출을 즐기지 않는 그녀는 비교적 안정적인 주거 환경에서 자라는 동안 스스로 무엇에 관심 있는지, 어떤 환경을 선호하는지 분명히 알았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들 하지만 서울엔 혜빈 씨가 원하는 생활이 없었다. 대전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직장을 잡았다. 떠밀리지 않고 주도적으로 쌓아가던 대입 이후의 독립적인 생활은 10년에 걸쳐 점차 안정권에 진입하는 듯했다. 몇 번의 월셋집을 거쳐 두 번째 전셋집으로, 원룸에서 1.5룸을 거쳐 좀 더 쾌적한 1.5룸으로. 대전은 고즈넉한 맛이 있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조용한 동네에서 간혹 들리는 아이들 소리, 주민들이 산책하는 풍경은 일상의 기쁨이었다.
어느 날 받은 전화 한 통화에 거짓말처럼 일상이 산산조각 났다. 임차인을 살뜰히 챙기던 중개인, 부동산 대표, 업계에서 오래된 큰손이라던 임대인, 모든 게 ‘거짓’이었다. 부동산 법인 대표인 임대인은 사기 전과자였고, 중개인은 중개 수수료에 웃돈을 얹어 주는 임대인과 전세사기를 공모했으며, 부동산 대표는 이름만 판 바지사장이었다. 이 모든 짓은 허술한 전세제도 위에서 쉬이 벌어졌다. 임대인은 대전에서만 3천 억,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서만 159억 원을 사기로 편취했다.2)
사기 피해액이 된 전세보증금은 고스란히 혜빈 씨 빚이다. 집이 좋아서, 놀이처럼 살림하고 음식을 만들고 쓸고 닦으며 집을 돌보던 생활은 끊어졌다. 경매 중이라 언제 이사 나가야 할지도 모르는 집. 전기 배선 수리비에 몇십만 원을 날릴 수 없어서 불 나간 화장실을 그대로 쓴다. 대출이자가 계속 나간다. 해가 잘 들어 참 좋았던 집의 그 햇살 때문에 더 우울해질 줄은 몰랐다. 모든 것이 전복됐다.
혜빈 씨는 말했다. 제도는 불완전한 거니까 시대에 뒤처질 수 있고, 누군가 피해 볼 수도 있다고. 법학을 공부하고 관련 직무를 하는 그녀가 제도의 불완전성을 이해 못 할 바 아니다. 부족한 특별법이라도 제정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후 정부 태도에 울분이 찼다. 약속대로 법을 고쳐나가는 데는 소극적이고, 제도와 정책적 과오를 피해자 탓으로 돌렸다. 피해자가 비난받는 사회에서 피해자는 피해에 관해 ‘말할 수 없다’. 그래서 혜빈 씨는 이제부터 ‘말하기로 했다’. 더 이상 성격대로 살 수 없는 현실이라 피해자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집회 참여를 위해 좋아하지 않는 서울로 향하고, 목청껏 외치고, 실명으로 인터뷰한다.
집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삶
가지가 길쭉한 모습이 되기 전에 약간 계란 비슷하게 생긴 거 혹시 아세요? 동그랗게 계란처럼 자라다가 ‘뿅’ 하고 길쭉하게 크거든요. 어릴 때 많이 봤어요. 주로 단독주택에서 컸거든요. 마당에 텃밭 있고 강아지도 있고. 태어난 건 서울 종로구인데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 대구 외할아버지 댁에서 10살까지 살았어요. 부모님 두 분 다 일하느라 바쁘셔서 저랑 여동생을 대구로 보내셨거든요. 외할아버지가 작은 교회 목사님이셔서 교회 건물도 따로 있었어요. 예배드린 기억은 없어도 교회 안팎을 뛰어다니면서 놀았죠. 외삼촌이 같이 살면서 많이 놀아주고 돌봐줬고, 할아버지 할머니랑 버스 타고 매일 서문시장 다녀오던 기억도 있고요.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서 자란 기억이 많아서 애정이 커요. 다 돌아가셨지만.
울진에서부터 엄마 아빠랑 같이 살았어요. 아버지 고향이에요. 집 가까이 바다가 있고 잠잠한 동네에서 조용히. 마당이랑 옥상도 있었어요. 인라인스케이트 타다 무릎이 자주 깨진 기억도 나네요. 이 집에서 남동생 태어나고 엄마가 가정주부를 하셨어요. 스튜어디스가 꿈이었대요. 할아버지 반대가 심해서 탈출하듯 집을 떠나 서울로 가셨다가 농협을 다니셨고요.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고도 계속 일하셨는데 울진에서부터 전업주부를 하신 거예요. 아버지도 회사원이었는데 울진에서는 주유소를 운영하면서 다른 사업도 이것저것 계속하셨어요.
저는 튀는 성격이 전혀 아니에요. MBTI로 말하면 I가 97%, 집이 정말 중요한 존재죠. 어릴 때부터 집에 있는 게 쉼이어서 인생에 큰일이 별로 없었어요. 엄마가 주로 서점을 데리고 갔어요. 꽃집 그릇 가게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냈고요. 딱히 유흥을 즐기지 않아 인간관계가 좁고 깊어요. 손에 꼽는 친한 친구 몇 명. 자주 만나진 않죠. 누군가를 꼭 만나야 존재 가치를 인식하거나 정체성을 발휘하는 편이 아니라 조용히 무던하게 살았어요. 대구에서 10년, 울진에서도 10년.
부모님 덕분에 점진적인 홀로서기를 하고
혼자 산 건 대학 때부터예요. 울진엔 대학교가 없어서 대전으로 갔거든요. 정치 과목을 좋아했어요. 권력이 어떻게 만들어져 작동하는지, 사회는 어떻게 구성되는지 같은 데 관심이 많아서. 전공으로는 법학을 선택해서 2학년 때 물권법을 배우면서 부동산 계약 실습을 했거든요…? 그래서 스스로를 용납 못 했던 거 같아요. 전세사기 당한 직후에. 실습까지 해놓고 사기당했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많이 탓했어요. 경찰도 당하고 변호사도 다 당한다고들 하지만.
월세로 시작했어요. 개인 공간이 보장되지 않는 공동생활을 못 하거든요. 500에 40 풀옵션 빌라로 엄마 아빠가 구해주셨어요. 생활비까지 지원해주셔서 저는 알바를 안 해봤고요. 대신 대학을 하향 지원으로 가서 학비는 거의 장학금으로 다녔어요. 딱 한 번 수석했고, 차석도 했어요. 서울에 있는 대학이요? 관심 없었어요. 사람에 치여 사는 생활을 힘들어해서 서울을 안 좋아했거든요.
열심히 살아서 내 집을 빨리 구해야겠다 일찍 맘먹었어요. ‘개인 공간이 있다는 게 이렇게 좋구나.’ 혼자 살면서 알았거든요. 울진 살 때도 방은 있었지만 동생이 둘이라 개인 영역이 별로 없었고. 특히 여동생은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라 같이 있으면 기가 많이 빨렸어요.(웃음) 동생은 대학도 서울로 가고 저는 첫 자취방도 일부러 상권 없는 조용한 주택가에 잡고. 학교까지 걸어 다니긴 했지만 꽤 거리가 있었죠. 친구들이 놀러 올 때마다 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사냐고 그랬고.
살림이 놀이였어요. 집에 있길 좋아해서 밥도 다 해 먹고, 청소도 즐겨서 주기적으로 쓸고 닦고. 고구마라떼가 아직도 기억나요. 엄마 아빠가 어느 날 할머니가 농사지은 고구마 한 박스를 보내주셔서 만들어 먹었거든요. 처음 했는데 너무 맛있는 거예요. ‘나는 요리에도 소질이 좀 있구나!’ 착각했죠. 그런 생활을 즐겼어요. 제대로 돈 벌고 싶단 생각에 학교 때 알바 생각을 못 했고, 생활비 외에 거의 돈을 안 썼어요. 졸업 잘해서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나만의 집을 빨리 갖고 싶었거든요.
철이 없었죠. 집이 부유한 줄 알고. 코로나 전에는 집 상황이 괜찮기도 했고, 부모님이 필요한 돈을 늘 보내 주셨거든요. 동생들한테도 돈이 들어갔을 텐데, 지금 생각하면 부모님이 능히 감당할 만하지 않았을 거 같아요.
3학년 땐 기숙사 살았어요. 일본으로 교류유학(교환학생) 갔거든요. 독학으로 JLPT 2급 따놓고 시험 치고 면접 보고. 나고야에 있는 난잔대학교였는데 학비는 잘 모르겠어요. 장학금으로 다녀서. 기숙사가 정말 예뻤어요. 나고야는 오사카랑 도쿄 중간에 있는 지역인데 대전이랑 무척 비슷해서 조용하고 아무것도 없고, 주변에 공원 있고 한적했고요. 저는 살기 좋았죠. 계절학기까지 1년 반 정도를 하고 대전으로 돌아가서 마지막 학기를 마쳤어요. 다시 학교랑 떨어진 동네에 1.5룸 월세를 구했는데 짧게 살아서 비용은 기억 안 나요. 졸업하고 얼마 안 있다 취업하면서 직장과 가까운 곳으로 이사했거든요.
회사 셔틀버스 루트에 맞춰 집을 새로 구했어요. 차 없이는 출퇴근이 어려웠거든요. 국책연구기관 법무팀에 직장을 잡았는데, 기관 정문에 도착해도 사무실까지 도보 30분이었어요. 그때 집은 원룸 오피스텔 반전세로 2천에 15만 원 정도? 재정 독립을 하면서 월세 지출을 확 줄였죠. 돈 번 이후로는 모아서 큰돈이 될 때마다 부모님께 드렸고요. 보증금 정도는 돌려드려야겠다 싶어서. 그래야 정말 독립했다고 할 수 있잖아요. 부모님 덕에 홀로서기를 점진적으로 했으니까. 이 집에서도 오래 살진 않은 게, 본격적으로 전세를 고려했거든요. 계속 월세 내는 게 너무 바보 같단 생각이 들어서. 대학생 때부터 쭉 월세가 아까웠고, 국가에서 청년들한테 전세 대출 지원도 많이 해주니까. 일본도 그렇고 외국에선 대부분 월세 살지만, 한국은 전세 제도란 게 있잖아요. 주변에 집 구한 친구도 전세가 많고. 어차피 돈을 계속 벌 거니까 대출해서 전세 갈 결심을 했죠. 살아보니 오피스텔이 저한텐 좀 시끄럽기도 했고.
다섯 번째 집에서 느낀 ‘뿌듯함’은 물거품이 되었다
첫 전셋집 보증금은 5천이었어요. 빌라 3층에 있는 1.5룸. 3천만 원 대출인데 저는 중소기업청년 대출 대상이 아니라 하나은행 일반 신용대출을 받았어요. 회사랑 더 가깝고 교회랑도 멀지 않은 위치, 주변 조용하고 비교적 내부 컨디션이 깔끔한 집을 찾았고요. 무슨 대단한 인테리어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우리 또래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깔끔함 있잖아요. 갑자기 몰딩이 체리색이거나 노란색 장판, 이상한 아트월 같은 거 없는 집. 대전에 저렴한 방은 그런 인테리어가 많아서 다 피했고, 풀옵션을 포기하더라도 벽지나 가구나 흰색이기만 하면 됐어요. 집 찾는 게 까다롭진 않았어요. 차로 출퇴근하고 있었는데 대전 빌라들은 거의 필로티 건물이라 주차장 찾기 어렵지도 않았고요. 보증금반환보험 가입하고 무난히 첫 전세 계약을 했죠. 나올 땐 쫓겨나듯 나왔지만.
전세금을 갑자기 8천으로 올려달라고 했거든요. 너무했죠. 2021년이라 전세 대란으로 대전도 보증금이 오르고 있었지만, 그렇게 내고 살 집이 아니었어요. 협의하려고 했는데 집주인이 보증금 8천으로 맞추지 않으면 월세 받겠다고. 더 미련이 없어졌죠. 방 뺄 때도 집주인이 어찌나 이상하게 굴던지…. 청소비랑 수리비를 요구했거든요. 키우지도 않은 고양이가 집에 흠집을 냈다고, 원래 있던 벽지 얼룩이 저 때문이라고. 어이없었죠. 새 집도 아니었거든요. 제가 결벽이란 소리 들을 정도로 자주 청소하고 물건도 깨끗하게 쓰는 편이고요. 안 좋은 경험이었어요.
지금 사는 집이 그다음 전셋집이에요. 같은 1.5룸이어도 신축에 방 사이즈가 조금 커졌고, 조용하고. 해가 참 잘 들어요. 그게 너무 좋았는데, 해가 잘 들어오는 게 지금은 더 우울하게 느껴지네요. 아무튼…. 이사 올 땐 아직 전 집 보증금을 못 돌려받은 상태였어요. 계약 만료 전에 이사해 버렸거든요. 일을 미리 해놔야 마음이 놓이는 성격이라. 대출이자 한 번 더 내더라도 얼른 결정해놓고 싶었어요. 회사 다니면서 집 보느라 3개월까지 여유 두고 집 봤고, 보증금 1억 1천만 원 중에 9천만 원을 아예 새로 대출했고요 카카오뱅크에서. 청년 전월세 대출 상품 광고를 많이 봤거든요.
집 보고 계약하는 과정에서 꽤 우여곡절이 있었어요. 처음 이 집을 본 건 10월이었는데 이미 1억 미만으로 원하는 집을 구할 수 없어서, 그나마 맞출 수 있는 가격의 매물부터 봤어요. 눈에 띄는 집이 있더라고요. 인테리어가 기대 이상이고 주차 널널하고. 좀 특이한 게 특정 부동산에서만 취급한 거였어요. ‘집주인이 잘 아는 중개사랑만 거래하는 사람인가?’ 했죠. 보통은 집 내놓을 때 여러 부동산에 내놓잖아요? 그 부동산에 연락해서 집 실물을 보고 포기했어요. 공사판이었거든요. 온라인 매물 사진은 같은 동네 다른 빌라 매물이었고요. 건물 외부 내부, 구조와 인테리어까지 동일한. 공사 중인 매물을 계약할 순 없고, 집 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니까 다른 집을 열심히 찾았어요. 2개월째 집을 보는데 공사 중인 집을 보여준 공인중개사가 한 달 만에 다시 연락이 온 거예요. 제가 12월에 이사 계획 있다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어요. ‘아직 집을 못 구하셨냐’ 묻더라고요. 빨리 구해야 하지 않냐고 걱정하면서 보여준 집이 거의 완공됐다고 이것저것 설명해줬어요. 등기는 언제 완료되고 은행 근저당은 얼마까지 잡혔고 등등. 너무 고맙더라고요. 계약하는 것도 아닌데 상세 정보를 알려주면서 다시 집 보여주겠다고 하는 게. 벌써 한 달 전에 본 손님이잖아요. 별거 아니라고 넘길 수도 있지만 남 이사하는 날까지 신경 써서 챙기니까 믿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챙길 내용까지 미리 챙겨주고. 그런 부동산 중개인은 본 적 없는데…. 거기서 감동해 버렸어요. 후보에 있는 다른 집을 두고 중개사 말대로 다시 집을 보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결정하겠다고.
보니까 더 맘에 들더라고요. 주변에 공터 많고 골목도 넓어서 주차 조건 쾌적하고, 주택가라 조용하고, 인테리어까지 최상이고. 대리석 느낌 타일 바닥에, 이상한 무늬 없는 그냥 벽지, 신축이라 옵션도 깨끗하고 해도 잘 들고. 안 좋은 경험 뒤라 하자 없는지도 꼼꼼히 확인했고요. 그런데도 계약은 바로 못 했어요. 근저당 비율 때문에 보증 보험 가입이 안 되는 조건인 게 걸렸거든요. 그런데 대전에서 당시 1인 주택 상당수가 보증보험 가입이 안 됐어요. 대부분 다가구 건물인데 지을 때 집주인이 대출을 최대치로 당겨 받아서. 중개사도 그 점을 알고 계속 건물주 재력을 어필하면서 보증금 문제는 없다고 저를 안심시켰어요. 대출을 바로 갚을 거라 근저당권 없어지고 경매 넘어갈 일은 없다고요. 집주인이 업계에서 오래된 큰손으로 유명하다고, 굉장히 잘 아는 사람인 것처럼 말했어요. 저는 대전 토박이도 아니고, 전세 경험도 많지 않잖아요. 중개사 말을 신뢰했어요. 국가 자격증 받고 거짓말할 거란 생각도 못 했고요. 고민고민하다가 계약하기로 했어요.
‘믿음직한 중개인’이 권한 대리 계약
부동산에서 계약 서명을 대신해 주겠다고 했어요. 바쁘실 텐데 멀리서까지 굳이 부동산으로 안 와도 된다면서. 인터넷상으로 찾은 매물이라 부동산 사무실까지 거리가 꽤 있었거든요. 퇴근하고 가면 고속도로 타고도 한 30분. 그 부동산에서 계약한 집까지는 차로 90분 거리고요. 그래도 직접 계약하러 갔죠, 당연히. 중개사가 아무리 믿음직해도 계약을 그렇게 할 순 없잖아요. 정작 임대인이 계약 날 안 왔어요. 약속인데 황당했죠. 사업 때문에 갑자기 타 지역으로 갔다고 중개인이 해명했고요. 대신 위임장으로 계약할 수 있다면서 임대인이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중개사가 막 설명하는데…, 정말 엄청난 사람인 줄 알았어요. 대전에만 집이 3백 채에, 주택 개발 사업에 탁월해서 계속 건물 지을 계획이라고. 보증금 못 받을 걱정 안 해도 된다고 중개인이 어찌나 자신 있게 말하던지.
사기 수법이란 생각은 전혀 못 했고요. ‘나 같은 1억 1천짜리 잔잔바리는 돈도 아닌가 보다’ ‘작은 계약은 일일이 신경 안 쓰나 보다’ 했어요. 집을 몇백 채 가지려면 얼마나 대단한 부자인지 짐작도 안 가니까. 지금 생각하면 거의 임대인 찬양이었는데 그땐 그런 생각을 못 했어요. 뭔가 찜찜해도 중개인한테 갑자기 “당신 사기꾼이지!” 하겠어요? 위임장 받아서 계약하는 게 불법도 아닌데. 에르메스 파우치 안에서 집주인 도장을 꺼내더니 임대인 이름란에 중개인이 집주인 이름 적고 도장도 찍더라고요. 계약서 쓰면서 저도 확인할 거 확인했죠. 선순위 임차인이 따로 있는지. 혹시라도 문제 생기면 그게 중요한데, 등기부등본에 있는 정보도 아니고 세입자는 알 수 없잖아요. 아직 계약한 사람이 없어서 제가 완전 선순위라고 하더라고요. 일단 안심했죠. 나중에 보니까 그것도 100% 사실이 아니었지만.
계약 과정에 다른 이상한 점들은 꽤 있었지만 다 법적인 문제는 아니에요. 제 부동산 바로 옆집에 나란히, 이름만 다르지 간판 모양도 거의 비슷한 부동산이 있었어요. 같은 동네에 부동산이 몇 개 있어도 보통은 좀 떨어져 있잖아요? ‘여기는 상도덕이 없나’ 싶더라고요. 그 빌라 앞에 완전 최고급 외제 차가 줄줄이 있어서 희한하다 싶었던 기억도 있어요. 그것도 롤스로이스, 포르쉐 막 이런 브랜드였거든요. ‘카푸어들이 사나?’ 했어요. 그냥 흔한 빌라 건물 앞이니까.
‘사기 방조하는 사회’에서 되려 피해자가 비난받는 아이러니
계약하고 거의 바로 이사했어요. 좋았죠. 혼자 살기로 벌써 다섯 번째인데 점점 환경이 나아졌으니까. 여전히 1.5룸이지만 공간이 쾌적해졌거든요. 뿌듯했죠. 부모님 도움도 있지만 스스로 발전하는 게 느껴져서. 9천만 원이란 큰 빚이 있지만 ‘돈을 모은다고 생각하자’ 했어요. 갚아야 할 학자금 대출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전세 보증금을 목돈 모으는 방법으로 많이들 여기잖아요. 저도 똑같죠. 제 보증금 대출은 중도상환해약금도 없는 상품이었거든요. ‘중간중간 계속 대출금을 갚으면서 대출을 상환하자, 그럼 이 집을 나갈 때쯤 1억 1천만 원이 생길 테고, 결혼 자금으로 쓰면 되겠다.’ 머릿속으로 미래를 계획하면서 ‘역시 나는 파워 J’ ‘계획도 잘 세우고 똑똑하다 똑똑해’ 생각했죠. 그러고 나니까 이 집부터는 제대로 꾸미고 살고 싶더라고요. 여러 집을 거치면서 원하는 걸 더 알게 된 것도 있고, 그전까진 ‘내 집이 아니다’ 생각하고 산 게 컸다면 쓴 돈이 많아서 더 애정이 생긴 것도 있어요. 집 가격도 비싸졌고, 내부에도 투자를 많이 했거든요. 간이 행거만 쓰다가 제대로 옷장 사 넣고, 조명 나오는 새 침대에 매트리스도 직접 골라 넣고. 넓은 집은 아니지만 깔끔하고 예쁘게 살고 싶었어요. 밥도 성실하게 해 먹으려고 그릇 세트 사고. 커피 핸드드립 세트, 토스터처럼 자잘한 살림 물건 사는 데 시간 쓰고 돈 쓰고. 뭔가 새출발 같았어요. 다 물거품이 될 줄도 모르고….
어느 날 전화 한 통을 받았어요. 날짜도 생각나요. 2023년 10월 5일. 한창 운동으로 몸 만들던 때거든요. 그땐 남자친구도 있고, 결혼 생각도 있고 해서. 그날도 운동하다 전화를 받았는데 “안녕하세요 저 ◯◯빌라 ◯◯호인데요”라면서 다짜고짜 “우리 전세사기를 당한 거 같아요”라고 말하는 거예요. 보이스 피싱인가 했는데, 아닌 것 같았어요. 집주인이 연락이 안 닿는다고, 이미 다른 세입자들이랑 모여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바로 달려갔죠. 씻지도 않고.
보증금을 못 받으셨대요. 다른 지역으로 이사해야 하는데 집주인이 잠수 타서. 벌써 수소문해서 대전 전세사기 오픈채팅방을 알고, 다른 주민들한테도 연락하신 거였어요. 다가구 건물이라 주인이 같거든요. 저도 목돈을 더 만들 겸 투룸으로 집을 업그레이드하려고 집주인한테 갱신 안 한다는 문자를 미리 보내고 답장 못 받은 상태였어요. 별 의심 안 했죠. 늘 돈을 돌려받고 이사를 했으니 어련히 잘 처리되겠거니 했는데, 그날 처음 전세사기를 의심했어요. 우리 빌라 사람들도 그 채팅방에 들어갔더니 피해자가 이미 70명, 다 우리 집주인 세입자였거든요.
제 중개사 포함해서 중개인 8명이 전세사기 패거리였어요. 집주인이 웃돈 주면서 자기 건물을 중개시키니까 어떻게 해서든 그 집들로 계약 성사하려고 그 패거리들이 그렇게 열심히 했던 거예요. 그런 줄도 모르고 저는 이사 마치고 중개사한테 커피 기프티콘까지 보냈고요. 사기 치고 받는 돈 생각하면, 중개사란 놈은 내 커피 선물이 얼마나 하찮았을까….
부동산, 중개사, 집주인 할 것 없이 모든 게 완전히 거짓말이었어요. 얼굴도 못 본 내 집주인은 실제로는 바지사장에, 70대 노인 공인중개사였고요. 이름만 빌려주고 돈 받았더라고요. 판 짠 사람은 ‘김용’(가명)인데 이미 전과자에, 제가 계약한 부동산 건물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어요. 그 건물 앞에 있던 최고급 외제 차도 다 그놈 거였고요. 이런 정보는 피해자들이 발로 뛰어서 알아낸 거예요. 조직도까지 그려가면서. 이미 전과까지 있는 사람이 활개 치고 돌아다니면서 개발 사업이랍시고 계속해서 맘껏 사기 칠 수 있는 곳이 지금 대한민국 법과 제도인 거예요.
처음엔 믿기질 않더라고요 현실이 너무 비현실적이니까. 첫 두 달은 인생이라는 게 없었던 거 같아요. 계속 침몰하는 것 같고 우울하고. 밥을 못 먹었어요.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조차 사치로 느껴져서. 출근해서도 굶고, 잠도 안 자고, 울기만 하다가 두 달 만에 7킬로그램이 빠졌어요. 갑상선기능저하증도 오고. 또래에서 나름 안정감 있게 직장 잡고 돈도 모으고 있었거든요. 그 노력이 한순간 날아가고 빚까지 됐을 땐…, 뭐라 해야 하나. ‘내가 없어진 거’ 같았어요. 전부요. 뭐 결혼 계획부터 해서 모은 돈, 갚은 빚이라는 게 아무 의미 없어졌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하면 내가 괜찮을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내 잘못도 아닌데 이 시스템에서는 뭐든 없어져 버릴 수 있다는 현실에서. 우울하고 괴롭고. 죽음을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목숨 끊으신 피해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랬을지 떠올려봤어요.
너무 억울하더라고요. 사기꾼 놈은 내 돈 은닉시키고 감방에서 몇 년 살고 나와서 호의호식하면서 앞으로도 잘 먹고 잘살 거잖아요. 이렇게 무너지면 나는 사기꾼한테 1억 1천도 모자라서 모든 걸 다 잃는 거고. 도저히 혼자서는 기운을 차릴 수가 없어서, 그래서 전세사기 피해자 심리상담센터로 연락했어요. 회사랑 가까운 정신과 추천받아서 점심시간에도 가고, 오후 반차 쓰고 가고. 약도 먹고 상담도 받고. 일주일에 최소 한 번씩은 꾸준히 다닌 지 세 달째에요. 처음 갈 땐 아예 잠을 못 자는 상태였어요. 그래서 종일 피곤하고 긴장도 높은 상태인데도, 모르고 지냈더라고요. 많이 나아진 건데 우울증 검사를 하면 경계 수준이래요.
가족 누구한테도 말 안 했어요. 제 문제고 사회적이기도 한 문제를 다른 누구 도움으로 해결하고 싶지 않아요. 결국 제 빚이라고 해도 부모님 도움 받기 싫고요. 학생 때 철없이 살아서인지 스스로 더 엄격해지나 봐요. 지인도 가까운 몇 분만 알아요. 전세사기 당한 문제를 터놓는 게 너무 피곤하거든요. 어떤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면서 “으휴 좀 더 알아보지”라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해요. 이 일을 무슨 젊은 날 겪을 법한 고생 정도로 잘못 생각하는 분들도 있고요. 저한테 직장 튼튼하니까 ‘너는 괜찮다’고 하는 분도 있었어요. 그런데 고생이랑 범죄는 엄연히 다른 문제잖아요? 전세사기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맥락을 납득시키는 건 힘이 너무 많이 들어요.
사기꾼은 수백억 남기고, 피해자는 신용불량자로 남는 사회
특별법3) 생겼을 때 ‘피해자등’으로 분류됐다가 집이 경매 넘어가고 재신청해서 ‘피해자’로 인정됐어요. 그렇다고 제가 받을 수 있는 지원은 없지만, 정부가 특별법을 만든 일 자체는 잘했다고 생각해요. 부족한 게 많은 한시법이긴 해도 의미는 있으니까. 구멍이 너무 많은 건 약속대로 보완하면 되는데 약속을 안 지키는 게 유감이죠.
경매 넘어가고 집 정리를 안 하고 살고 있어요. 낙찰자 나오면 빼줘야 하니까. 경매라도 안 넘어갔으면 좀 돌볼 텐데, 정이 떨어지더라고요 집에. 원래는 안 그랬어요…. 거의 2년 살면서 집에 있는 모든 시간이 다 좋았거든요.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살면서 그동안 경험한 다른 어떤 동네보다도 정말 조용하고 한적하고. 큰 도로랑 떨어져있는 위치의 집을 고르니까 자동차 소음도 없고. 가끔 멀리서 어린이집 애들이 밖에서 활동하는 소리 들리는 건 참 좋고, 강아지 산책시키는 동네 주민들 모습 보는 것도 좋았어요. 주말마다 새로운 요리 해 먹고, 베이킹도 하고 그랬죠.
이삿짐은 어느 정도 싸놨다가, 지금은 풀고 대충 지내요. 한 푼도 못 받은 상태로 당장 이사하면 이중 삼중으로 돈 들까 봐. 화장실 불도 나간 상태 그대로예요. LED 등 문제가 아니라 전기 시스템 문제라 수리비 50만 원 든대요. 그 돈 못 내요. 어둠 속에서 그냥 쓰고 말죠. 배당 신청4)할 땐 일부라도 보증금을 건질 수 있을까 희망을 좀 걸었는데 거의 포기했어요. 전세사기 사태로 경매 물건이 많아져서 경매꾼들이 출동했거든요. 경매가 떨어뜨릴 수 있을 때까지 떨어뜨리려고 서로 눈치 싸움 한대요. 결국 은행도 채권 회수 다 못 할 수 있어요.
지금은 가능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요. 살아갈 순 있으니까. 건물 유지 보수 문제로 진짜 위험한 상황인 피해자분들에 비하면 제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대전에 다른 피해자분은 보일러 켰다가 바닥 타일이 드드득 올라와서 깨진 채로 살고, 누수까진 아니어도 벽에 습기가 차서 벽지랑 바닥이 들떠 버린 집도 있어요. 겉만 멀쩡하고 속은 날림 공사를 했는지. 그런 집이라면 애초에 계획적이었을 거예요. 피해자 대부분 20-30대인데, 그 사람들 눈에 드는 스타일로 예쁘게 지어놓고, 속은 불량으로 채우고. 한바탕 크게 챙겨서 도주해 버리려고 했겠죠.
김용은 재판 중이에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 관한법률위반과 사기로 3차 공판까지 갔고, 병합된 사건도 있고요. 다음 공판일도 정해졌어요. 고소 측이 LH라 재판이 그 정도나 진행됐지, 개별 피해자들 사건은 아직이에요. LH에서만 159억 편취했거든요. 우리 빌라에도 LH청년전세임대로 살다가 나간 청년이 있으니까 우리 빌라에서도 LH가 사기당한 거예요. 그 청년 빼고는 저를 시작으로 다들 임차권 등기를 한 상태고요. 그놈이 대전에서 사기 친 금액만 3천 억대고 다른 지역에도 피해자가 있어요.
누군가는 계속 이익을 보고 있겠죠? 공기업도 사기 치기 쉬운 전세제도인데 누군가는 분명 이익을 보니까 그렇게 허술한 상태로 계속 운영 중이었을 거예요. 제도는 불완전한 거니까 시대에 뒤처질 수 있고 누군가 피해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도 제대로 고치려고 안 하는 태도에는 화가 많이 나요. 얼마 전에도 경희대 인근에서만 피해자가 50명 넘게 나오고5) 지금도 사건은 계속 터지는데. 이 낡아 빠진 제도를 고치는 데 정부 여당은 왜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 않을까요? 이익을 보는 쪽과 이해관계가 있거나 관심이 없거나, 둘 중 하나라는 의심이 들어요.
사기꾼 잘못으로 생긴 빚을 나보고, 피해자보고 갚으래요. 아니면 개인 회생 하라고 하고. 그런데 남의 돈으로 돌려 막듯이 집을 수백 채 사서 사기 치고 튄 놈은 몇 년 살고 나오면 끝이더라고요. 사기로 몇십억 몇백억 벌 수 있는 나라에서 우리는 왜 이렇게 하루하루 열심히 사느냐고 피해자끼리 우스갯소리를 해요. 실은 전혀 웃기지 않죠. 사법제도도 이상하고, 이 정부가 이 전세사기 사태를 처리하는 방식도 납득 안 가요. 피해자들을 가르고 순위 따지면서 줄 세우기 시키는 분위기는 너무 스트레스고, 피해자들이 무슨 무리한 요구를 하는 식으로 몰아세우는 걸 보면 열받아요. 제도가 미비해서 벌어진 일에 왜 피해자가 욕먹어야 하나요? 국가 책임도 있는데.
대전에서 피해자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편이에요.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사안에 대해서 앞에 나서는 게 처음이고요. 정치와 사회에 관심 있다고 했지만 직접 활동하는 데 소극적이라 늘 뒤에서 지켜보기만 했거든요. 나서지 않고 조용조용 사는 성격이라 당적도 없었고. 피해자가 되고 생각이 달라졌어요. 계속 구경만 하면 이대로 또 조용해질 거 같아서. 처음엔 정말 힘들었죠. 몸에서 막 땀이 나고 식은땀이 흐르더라고요. 집회 장소에 서있는 것조차 어색해서. 서울 자주 올라가고 여기저기 집회 쫓아다니느라 이동비도 많이 들고. 그런데 이왕 당사자가 됐으니까 현장성을 갖고 사회에서 목소리를 내볼 기회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마다할 이유가 없죠. 그래서 참여할 수 있는 집회는 다 가고, 구호도 목청껏 외쳐요. 많이 뻔뻔해졌어요.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 인터뷰도 하고. 이 인터뷰도 실명으로 하고 있고. 전세사기 당하고 여러 경험과 감정을 동시에 통과하는 중이에요. 피해자끼리 서로 힘이 많이 됐고 시민단체도 고마웠어요. 우리를 향한 시선이 곱기만 한 건 아니지만 지지해주고 보듬어주는 분들도 있거든요. 혹시 지금도 혼자 힘들어하는 피해자분이 있다면 꼭 말해주고 싶어요. 돈보다 그분 자신이 더 소중한 사람이라고.
1) 인터뷰는 2024년 4월 28일에 진행했다.
2) 강수환, ‘LH도 속은 3천억원 규모 전세사기… 피해자들 집단행동 나서’, 〈연합뉴스〉(2023.12.5.)
3) 전세사기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에 관한 특별법
4) 전세사기를 당한 집이 경매로 넘어간 경우, 법원에서는 집주인과 관련된 채권자들에게 정해진 기한에 ‘배당요구신청’을 하라는 통지서를 보낸다. 배당요구신청은 낙찰대금에서 돈을 받을 것을 요구하는 신청서로 정해진 양식이 있다. 은행의 선순위 근저당권 비율이 높고, 경매 낙찰 금액이 낮을수록, 후순위 채권자가 배당 요구한 금액을 일부라도 받을 확률이 떨어진다. 최우선변제제도는 은행의 선순위 근저당권에 앞서 소액 임차인에게 일부 금액을 돌려주는 제도다.
5) 한국외국어대학교, 경희대학교 등이 있는 서울 동대문구 대학가 일대에서 총 114억 원 규모의 전세사기를 벌인 혐의가 있는 50대 남성이 구속된 후 검찰에 넘겨졌다.
진행 오지은 객원기자
본지 객원기자. 삼프레스 발행인. 사람과 사회를 관찰하고, 둘 사이를 연결하는 콘텐츠 노동자. 언제나 재미있는 일거리를 기대하고, 빵은 만들어 먹는 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