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호 공간 & 공감]
작년 10월이었다. 그가 보내는 어느 날도 평범할 순 없지만, 이 지역에서 비교적 무난한 축에 속하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10여 년 전 발생한 22일간의 폭격 속에서 가족과 살아남은 기적을 생각하면 말이다. 어디서든 갑자기 통제당하는 그 지역의 오래된 현실에 좌절감을 느낄 나이에서도 한참 멀어진 그였다. 1973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자발리야 난민촌에서 태어났고, 그때는 이미 팔레스타인 영토 상당수를 이스라엘이 강제 점령한 시기였으니까. 통제받는 식민지의 삶은 아마도 그의 성장 과정 자체이자 매일의 악몽이었겠지만, 그것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작가이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문화부장관으로, 그날 가자지구에서 ‘국제 문화유산의 날’ 행사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2019년 서안지구로 이주했기 때문에 고향의 여동생 집에서 하루를 머물렀고, 아들과 함께할 아침 바다 수영을 기대했다. 광활한 바다를 헤엄칠 때만큼은 자유롭고, 그날이 그해 바다 수영을 할 마지막 기회일 수 있으니까. 10월이 가면 팔레스타인은 춥고 습한 날씨로 접어든다. 바다는 동생 집에서 차로 몇 분이면 닿으니, 행사는 수영 후에 소화하기에도 충분할 것 같았다.
“우린 오늘을 위해 산단다.”
어머니가 늘 하셨던 말씀을 거의 잊을 뻔한 날이었다. 남동생과 아들과 매부와 바다 수영을 즐기던 중 로켓 소리와 폭발음을 들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가자지구에서는 흔한 일이니까. 그러나 폭발음이 더 심해지자 어머니의 말씀을 다시 떠올렸던 거 같다. 장담할 수 없는 미래를 계획하지 않는 삶. ‘국제 문화유산의 날’ 행사는 열리지 못했다.
아무런 경고 없이 시작된 그 소리는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신호탄이었다. 그날 이후 84일, 라파의 국경 검문소를 통과해 이집트로 빠져나가기까지 아테프는 일기를 썼다. 호텔 건물이 부서지고 시체가 나뒹구는 전쟁터에서 함께 있던 친구에게 그 기록들을 출판하면 헌정하겠다고 했다. 살아남은 아테프는 책1)을 출판했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데 의문을 품고 살아간다. 책을 헌정받아야 할 친구는 살해당한 뒤였다. 가자지구엔 고향을 떠나지 않은 가족과 친구들과 주민들이 있고, 이스라엘은 여전히 가자지구에 공격을 퍼붓고 있다.
“내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 처제 후다의 집에 폭격이 가해져 그녀와 남편, 두 아들이 죽고 딸이 장애를 입었을 때, 내가 그곳에 있을 수도 있었다. 계획대로 빌랄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그 옆에서 살해당할 수도 있었다. 공격을 당한 열 몇 곳에 있었을 수도 있다. (내가 또 연대기로 기록했던) 2014년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선포되었을 때, 한 기자가 농담하며 던졌던 질문이 기억난다. ‘누가 이겼나요?’ 당시 나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이겼죠. 살아남았으니까요.’ 이 전쟁이 끝났을 때도 내 대답이 같을지는 모르겠다. 잃은 것이 너무도 크다.”
10월 5일 서울 종로 한복판에서도 로켓 소리와 폭발음이 울렸다. 가자지구 전쟁이 1년째란 사실을 알리고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집회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 거기 맞춰 검은 옷을 입은 이상헌 무용가가 단상 위에서 몸을 움직였다. 전쟁을 직접 목격한 적은 없지만 그 소리가 실제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몇천 분의 일로 ‘축척’된 크기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마침, 일주일 전 서울 도심 상공에서 있었던 에어쇼 굉음이 그 이상이었고, 에어쇼 시간만 되면 요 며칠 집 안으로 들어오는 귀청 떨어지는 소리에 치를 떨었다. 둘 중 어떤 소리도 매일 듣는 전쟁의 소리에 비할 순 없겠지만, 집회에 온 사람들은 숙연해졌다. 상공을 가르는 헬기를 보고, 총알과 포탄이 쏟아지는 소리를 들으며. 이제 검은 옷 위에 흰 두루마기를 걸친 이상헌 무용가는 구슬픈 상여가 사이에서 꽃을 안고 단상 아래 사람들 속에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날 연단 위에는 가자지구 출신 살레 씨와 서안지구 출신 키리야 씨가 올라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제 할아버지는 1948년 이브나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00년에는 땅을 빼앗겼고, 이번 집단학살 기간에 우리 가족은 다시 한번 삶터를 떠나야 했습니다. 점령, 난민, 집단학살, 인종 청소라는 핵심 문제를 다시 집중 조명해야 합니다. 우리의 대의는 인류의 대의, 즉 정당한 대의, 토지 해방이라는 대의입니다. 팔레스타인이 점령 상태에 있는 한, 자유를 쟁취하고 땅을 되찾을 때까지 권리를 지키기 위한 싸움을 끈질기게 이어나가야 합니다.”
살레 씨는 한국에서 농부로 일한다. 유학 중 난민 신청을 했고 1년이 넘도록 난민 심사 인터뷰 한 번을 못 했다. 언제 인정받을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가족 모두가 유엔 난민기구에서 난민 인정을 받고, 난민증을 갖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의 가족은 10월 7일 이후 벌써 세 번째로 고향을 잃었고, 가자지구 사람들은 먹을거리나 씻을 물조차 구하기 어렵다. 난민 신청자 지위로는 전공을 살린 일자리를 구할 수 없고 지금 급여로는 생활하기에 부족하지만, 본국 친구들을 생각하면 전혀 힘들지 않다.
키리야 씨는 아테프가 해변에서 로켓 소리와 폭발음을 듣던 작년 그날 고향 서안지구에 있었다. 한국에서 결혼하고 1년 만에 친정 가족을 만나는 날. 고향의 시간은 고대해온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가자지구를 추모하고 걱정하는 눈물로 가득 차 있었다. 분리 장벽이 있는 지역에서 대학을 다니고, 점령군의 갑작스러운 습격을 받고, 새벽에 잠옷 바람으로 기숙사를 쫓겨나 몇 시간이 걸려 검문소를 통과하던 때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가자지구뿐 아니라 서안지구에 대한 공격도 갈수록 심해지면서 매일 밤 총소리와 비명이 들렸다. 누구도 밤에 잠잘 수 없었고, 집 밖을 나서는 일조차 너무 불안했다. 이후로 지금까지 매일 아침에 눈뜰 때마다 친지의 죽음이나 추방 소식을 확인한다. 그녀가 말했다.
“작년 10월 7일 이후로 지난 1년은 악몽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세계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 그 민족을 지워버리려 한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팔레스타인 저항군은 여전히 싸우고 있습니다. 일제 식민 통치 때 한국에도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요. 안중근 지사가 목숨 바쳐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던 사실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항은 다양한 모습으로도 나타납니다. 무력으로 맞서 싸우는 것도, 군사점령 속에서 일상을 유지하는 것도, 거리 집회에 나서는 것도, 서로에게 진실을 가르쳐주는 것도 모두 저항입니다. 우리의 투쟁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두의 힘을 뭉치면 압제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에겐 희망도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결국 해방된다는 희망입니다. 마침내 정의는 승리하고 진실은 알려질 테니까요. 우리 모두 생존을 위해 저항합시다.”
아테프와 살레와 키리야의 고통과 저항에 관한 이야기가 누군가에겐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고통은 결코 우리와 무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1년 만에 대략 4만 명(3분의 1이 아동)이 살해당한 가자지구 땅 위에는 한국산 탄약과 포탄 껍질들이 나뒹굴고 있을 것이다. 한국은 이스라엘과 무기를 거래하는 국가이기 때문이다.2) 최근 프랑스, 영국, 캐나다 등이 이스라엘에 무기 제공을 중단하기로 한 결정과 대조적으로 우리 외교부장관은 최근의 국정감사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수출 여부를 묻는 말에 “없는 걸로 알고 있다”는 무지하거나 무책임한 거짓말을 했다. 전쟁이 시작된 작년 10월 유엔 본부에서 열린 긴급 총회에서 요르단이 주도한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인도주의적 휴전을 요구하는 결의안에는 기권표를 던지기도 했다. 가자지구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계속적으로 방해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포함한 결의안이었다.3)
우리가 먹는 행위에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이 연결되어있다. 한국에서 싸게 소비하는 자몽은 대부분 이스라엘산이고, 자몽뿐 아니라 딸기, 복숭아 등 이스라엘산 과일과 농축액으로 만든 국내 가공 음료도 생각보다 많다.4) 그 과일들은 이스라엘이 원래 팔레스타인 땅에 원주민들을 몰아낸 자리에 재배한 것들이다. 팔레스타인 내 불법 유대인 정착촌에서 수확한 열매인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주 수입원인 올리브 나무 중 80만 그루 이상이 이스라엘 점령군과 불법 정착민들에 의해 뽑히거나 불탔다. 아테프와 살레와 키리야의 가족과 친구들이 더 효율적으로 살해당하도록 우리 정부는 무기 거래를 하고 있으며, 그들 당의 소출을 즐기고 있는 셈이다. 우리도 제국주의 국가들이 허용한 불법 점령을 당하고 식민 통치의 폭력과 부당함을 누구보다 또렷이 기억하는 민족의 후예이자, 그 여파로 분단과 내전을 겪고 아직도 휴전 중인 국가의 주민이란 사실이 아프게 다가온다.
성탄절이 또 돌아온다. 작년 크리스마스에도 가자지구엔 포격이 멈추지 않아서, 예수의 고향 베들레헴시는 모든 성탄 행사를 취소했었다. 지난 1년간 팔레스타인 교회들은 가자지구 건물 잔해 속에서 태어날 예수 탄생의 의미를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을 것이다. 예수는 중동에서 태어나 억압받는 자들의 구원자로 살아 내셨으니까. 하지만 가자지구 휴전 합의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뉴스들이 계속 보도된다. 그럼에도 세계의 크리스마스는 늘 그래왔듯 작년이나 올해나 그 어느 기념일 때보다 화려하고 풍성할 것이다. 교회들은 여전히 2천 년 전 성탄만을 기념할 것이다.
1) 아테프 아부 사이프 지음, 백소하 옮김, 팔레스타인평화연대 감수, 《집단학살 일기》(두번째테제, 2024)
2) 앞선 가자 침공이 있었던 2014년부터 2022년까지 수출액은 약 570억 원(탄약, 포탄), 수입액은 약 1,690억 원이다. (peoplepower21.org/peace/1954777)
3) 하마스 규탄 내용이 담기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공식적인 이유를 밝혔다. 하마스는 민족주의 정당으로, 이스라엘에 저항하는 팔레스타인 무장투쟁을 주도한다. 그 산하 군사 조직을 테러 집단으로 규정하는 것은 이스라엘과 서방 국가들 관점이다. 알아야 할 사실은 국가가 되지 못한 팔레스타인에 단일 군사 조직은 없다는 점이다. 대신 각 정당이 개별적으로 독립군을 가지고 있다. 대한제국이 나라를 잃고 1930년대 이후 항일 무장투쟁 조직들이 복수로 존재했고, 그중에 다양한 계열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소위 ‘평화협정’이라 불리는 오슬로협정(1993)에 따라 점령지 팔레스타인에서 선거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구성했고, 하마스는 점령지 팔레스타인 정당 중 하나로 2006년 국제기구의 감시 속에 치러진 총선에서 승리해 집권당이 됐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결과를 부정하고 기존 집권 세력이었던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내 가장 큰 세력 정당 ‘파타’를 지원해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했다. 그로 인해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통치하고, 서안지구는 파타가 장악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통치하는 형태가 지금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2007년부터 가자지구를 전면 봉쇄하고 가자 주민을 공격하고 있다. 하마스가 이스라엘인들을 납치한 사실에 견주어, 이스라엘 점령군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미성년자 포함)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억류한 사실은 잘 보도되지 않는 현실이다.
4) 팔레스타인 시민사회는 2005년 국제사회 구성원들에게 BDS 운동에 동참해주길 요청했다. BDS(Boycott·Divestment·Sanctions) 운동은 군사점령과 아파르트헤이트를 종식시키기 위한 비폭력저항운동의 일환으로 이스라엘에서 생산하는 제품을 사지 않고, 이스라엘과 학술적·문화적 교류를 중단하며, 이스라엘에 투자하지 않고 국제적인 제재를 가하여 이스라엘의 불법행위에 책임을 묻는 행동이다. 이미 전 세계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 bdskorea.org에서 가이드북을 다운받을 수 있다.
‘공간 & 공감’(박진영·오지은) 연재를 마칩니다. 애써주신 필자와 성원해주신 독자께 감사드립니다.
오지은
사람과 사회를 관찰하고, 둘 사이를 연결하는 콘텐츠 노동자. 언제나 재미있는 일거리를 기대하고, 빵은 만들어 먹는 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