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7호 공간 & 공감]
40대를 바라보는 나이에 두 살배기 딸을 키우는 친구가 있다. 여느 때처럼 그녀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아이 걸음에 맞추면 30분 정도 걸리는 S 아파트 단지 쪽으로 딸을 데리고 외출했다. 그녀가 사는 여덟 세대 연립주택에서 가장 가까운 공공 놀이터가 바로 그 아파트 단지 앞에 있기 때문에. 마침내 당도한 놀이터에서 아이를 놀리는 중에 다른 엄마가 딸에게 다가와 말을 붙였다고 한다. “얘~ 너는 몇 동 사니?”
이 질문을 받고 내내 기분이 언짢았는지, 친구는 여기까지 말한 다음 내게 물었다. “그 엄마 정말 웃기지 않아?” 갑자기 무엇이 ‘웃기는’ 건지 다소 의아해하는 내게 그녀가 설명했다.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놀이터도 아닌데 이용자가 당연 아파트 주민이라 여기는 ‘태도’가 정말 웃긴다고. 친구의 부연에도 나는 완전히 설득되질 못했다. 친구 기분이 상한 건 사실이지만, 그 엄마의 잘못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단지 안팎을 떠나서 놀이터와 붙어있는 아파트의 주민이라면, 놀이터에서 만난 아이와 그 양육자가 본인과 같은 아파트에 살 거라 예상해 충분히 그런 말을 꺼낼 수도 있지 않나? 그래서 물었다. “그 놀이터가 아파트 앞에 있으면 그렇게 물어볼 수도 있을 거 같아. 그 아파트에 안 산다고 알려주면 될 것 같은데?”
“◯◯이는 S 아파트에 안 살아요~”라고 내 친구가 ‘쿨하게’ 알려줬다면 이어진 대화에서 그 놀이터를 이용하려고 멀리서 오는 양육자도 있다는 주지의 사실로 둘 사이에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생겼을 수도 있겠으나, 그녀는 어떤 이유인지 자기가 사는 곳을 알려주진 못하고 다만 ‘짜게 식은’ 기분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친구와 조금 다른 의견을 주고받는 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져서 좀 피곤하다 느꼈다. 후에 ‘놀이터’ ‘아파트 단지’ 같은 키워드로 검색을 하면서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되자 복잡했을 친구의 심정이 이해됐다. 이 세상은 놀이터가 부족한 걸로도 모자라 이미 온갖 흉흉한 분위기가 감도는 공간이 되어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흉흉함이었다. 주민 아닌 어린이는 아파트 단지 놀이터 출입을 제한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인천의 어떤 아파트 단지에서는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이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서 놀던 어린이를 주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도둑”으로 몰아 붙잡아놓고 경찰을 출동시키는 사건이 있었다. 방배동의 어느 초고가 아파트에서는 공공 어린이집 아이들의 놀이터 이용을 제한했다가 문제가 불거지자 제한을 푸는 일도 있었다. 전국 놀이터 과반이 아파트 단지에 쏠려있고, 도시공원처럼 사용되는 공공 놀이터는 14%(친구 사례를 감안하면 아파트 단지와 근접한 곳도 포함한 비율일 것이다)에 그치는 이 세상에 단지 안팎을 떠나서 놀이터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거였다니. 사실상 모든 어린이가 조건 없이 이용할 놀이터가 너무 부족하고, 특별히 아파트 단지 주민이 아닌 어린이들에게 더 부족한 현실에서 아이를 기르는 부모 심정은 어떨지 처해보지 않고는 모를 일이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번 딸을 데리고 길에서 가고 서는 것을 반복하며 아파트 단지 근처의 놀이터로 향하던 친구에게 위로는 못할망정 쓸데없이 시비만 따지던 게 맘에 걸려 참회하는 마음으로 전화했다.
이전 대화에서 몰라준 것들이 많아 미안하다는 내게, 성격대로 그녀는 쾌활하게 말했다. “아 그거~?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나 이제 그 아파트 병 좀 나았어!”
전화를 끊고 문득 그녀의 가까운 과거가 떠올랐다. 서울 끄트머리 동네 작은 빌라에 산다고 전전긍긍한 적 없는 사람이었다. 한국의 ‘아파트 단지 선호 사상’은 그 역사가 반백 년을 넘어가지만, 살고 있는 작은 빌라를 팔아서라도 아파트 전세를 가고 싶단 말을 그녀가 제법 꺼내기 시작한 건 양육자가 되고부터다. 잠만 재우면 됐던 애가 어느새 앉고, 서고, 기고, 점차 의사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며 걷기까지 해버릴 가까운 미래를 생각하면 차 없는 인도, 편안한 주차, 집 앞의 놀이터, 심지어 놀이터 벤치에서 만날 수 있는 이웃 양육자까지 삽시간에 필요해질 것이 뻔히 눈앞에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주거 환경엔 내가 보기에도 그 필요한 것들이 없었다. 창문을 열면 바깥 공기를 느낄 새 없이 앞 빌라 벽이나 창문을 마주하고, 마주한 빌라는 하필 (이름만) ‘◯◯ 샤인빌’이라는 데 실소가 터지는 상황. 그만큼 빽빽한 주택가에 동네 애들이 안심하고 놀 작은 놀이터 하나 마련한 적 없는 것이 바로 엄혹한 한국적 공간인 현실에서, 아파트 단지만은 예외였던 것이다.
‘문제의 놀이터’ 외에도 어린이집, 주차장, 노인정 등의 주민 시설이 아파트에 몰린 이유는 명확하다. 주택법 시행령이 주민 시설에 관한 설치 의무를 공동주택 세대 수 기준으로 부과하기 때문이다. 기준에 따라 시설을 지은 것이다. 일정 규모 이하 주택에 사는 주민들을 위한 시설에 관해서는 국가가 아무런 법령이나 규정도 정해놓지 않은 탓에 그 주택들이 마치 단지처럼 몰려있다 해도 주민 시설이 드물 수밖에.
친구가 ‘아파트 병’을 스스로 인지하고 다스리는 법을 익히는 것과는 별개로, 상상해본다. 애초 무슨 집에 살건 이 세상을 동네마다 특색에 맞는 이런저런 주민 시설을 누릴 수 있는 환경으로 바꿔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파트 단지에는 아파트 단지 놀이터가 있겠지만, 지역마다 인구 구성에 따라 A 동네엔 ‘A 놀이터’를 B 동네엔 ‘B 놀이터’를 C 동네엔 ‘C 놀이터’를 만들면 된다. 주민이 주체가 될 수밖에 없으니 동네 친구가 생기는 건 어린이뿐만이 아닐 것이다. 아파트 단지 주민들도 A, B, C 놀이터로 원정 놀이를 다니고 싶어질 테니 아파트 단지는 놀이터 이용 제한을 할 이유가 없어질 것 같다. 별로 소원치도 않던 아파트 단지를 엄마가 되어 못 가진 데 허기를 느낄 필요도, 아파트 주민이란 이유로 한 번 실수에 바로 ‘웃기는 엄마’로 오해받을 일도 없으면 좋겠다.
상상일 뿐이다. 현실에서는 양육자와 아파트 단지와 놀이터와 주민 시설을 놓고 벌어지는 갈등을 해소하려는 행정적 노력에 얼마나 관심을 두는지 잘 모르겠다. 작년엔 그나마 동네마다 지역 공동 육아터나 놀이터 역할을 하던 작은도서관들을 폐쇄하는 행정이 쓰나미처럼 일었다. 서울시는 10년 가까이 관내·사립 작은도서관을 지원해오던 예산을 전액 삭감하며 전면 폐기를 작년에 발표했다가 주민 반발이 커지면서 지원 대책을 다시 내놨고, 서울 마포구에서는 작은도서관을 독서실화하겠다는 일방적인 발표를 했다가 구민 반발로 무산됐다. 동작구에서는 2013년부터 무려 10년 넘게 운영된 서울 동작구 서달산 중턱의 숲속작은도서관 글헤는숲이 2023년 말로 구청의 폐쇄 방침을 통보받았다. 당해 초 구청과 3년 기한의 협약서를 체결한 상태였다. 대구광역시도 작년에 작은도서관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오지은
사람과 사회를 관찰하고, 둘 사이를 연결하는 콘텐츠 노동자. 언제나 재미있는 일거리를 기대하고, 빵은 만들어 먹는 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