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호 우리 시대 종교 사상가들과의 만남]

나는 3월 말부터 5월 초순까지 미국 보스턴에 체류하는 가운데 뉴욕과 뉴저지를 오가며 우리 시대의 종교 사상가, 더 정확히는 종교철학 분야에서 독창적 입장을 개진했거나 유의미하고 실험적인 성과를 내놓고 있는 종교철학자들을 인터뷰했다. 미국이 워낙 크고 인터뷰하고 싶은 사상가는 여럿이었기에 인터뷰를 계획한 모든 철학자를 직접 만날 수는 없었고, 몇몇 철학자와는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대화를 이어갔다. 이 철학자들과의 대화를 〈복음과상황〉에 대략 6회에 걸쳐 요약해 싣고자 한다. 앞으로 게재될 철학자들 이력을 간략히 소개하고, 각 대화가 함축하는 의미와 독특성을 전체적으로 개관해보겠다.

대화를 나눈 이들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보스턴 칼리지 철학과 찰스 시릭(Charles Seelig) 석좌교수 리처드 카니(Richard Kearney)와 제프리 블뢰클(Jeffrey Bloechl) 교수, 뉴욕 포덤 대학교 철학과 명예 석좌교수 메롤드 웨스트폴(Merold Westphal)과 현재 재직 중인 크리스티나 M. 그슈반트너(Christina M. Gschwandtner) 교수, 뉴욕주 시라큐스에 위치한 시라큐스 대학 데이비드 쿡(David Cook) 명예 석좌교수 존 D. 카푸토(John D. Caputo), 그리고 2019년 한국에서 열린 베리타스 포럼 강사로서 우리에게도 익숙한 미국 칼빈 대학의 제임스 K. A. 스미스(James K. A. Smith) 교수다.

각 사람의 특징을 열거하기 전에 이들이 공통적으로 딛고 있는 지반에 주목하면서, 독자들이 눈여겨보면 좋을 기초적 이해를 제공하려 한다. 저마다 독창적 관심사를 학문적으로 풀어내고 있기에, 이들을 한데 묶는 일은 다소 무리수일 수 있다. 그럼에도 유럽 대륙종교철학(Continental Philosophy of Religion)이란 영역은 위 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속한 연구 분야로서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규정임은 틀림없다. 유럽 대륙철학이란 용어가 애당초 영국 철학, 또는 조금 더 넓게 보면 영국과 미국 철학자 시각에서 유럽 대륙의 철학 전통을 한데 묶은 말이라 일각의 유럽 대륙 철학자들은 이 자체가 영미권의 협소한 관점에서 유래했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 숱한 오해를 함축하는데도 학계에서 근대성 이후 또는 근대성 극복이라는 현대사상의 방향을 설정하는 말로 사용되고, 비교적 최근 활발하게 전파 중인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이란 말 역시 이 조류에 속한다고 평가되는 사상가들 사이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이지만 인간주의 이후 새로운 인간 이해를 나타내는 나름 유의미한 사상적 규정으로 우리에게 도입되는 실정을 고려할 때, 유럽 대륙철학이란 말 자체도 이제는 유의미한 규정적 의미로 적극 사용되고 있다.

유럽 대륙철학의 흐름

유럽 대륙철학은 주로 20세기, 더 넓게는 19세기 유럽 대륙에서 일어난 철학의 흐름을 모두 아우른다. 영국과 미국의 언어분석철학이나 논리철학 경향에 대립하여 철학을 어떤 문제 해결이나 언어와 개념의 분석이라기보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서의 ‘삶’이 갖는 의미에 대한 이해와 해석으로 보고서 삶에 대해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는 유럽 대륙의 사상을 통칭한다. 이때 20세기 유럽 대륙철학의 본격적 발전에 영향을 준 19세기 선구자적 인물로는 키르케고르와 니체, 마르크스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이후 발전된 현상학, 해석학, 구조주의 및 포스트-구조주의, 비판이론 등은 유럽 대륙철학에 속하는 철학 학파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너무나도 단순화된 규정이다. 서로 대립하는 현상학과 구조주의 전통을 한데 묶을 수 있는지도 의문이고, 포스트-구조주의로 분류되기도 하는 데리다나 들뢰즈 같은 경우 살아생전 그런 규정 자체를 잘 모르거나 ‘포스트’ 담론에 자신을 욱여넣는 일을 달가워하지 않았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이런 한계에도 여전히 20세기 이후 유럽 대륙에서 일어난 철학들의 독특한 접근 방식이 있는데, 곧 삶을 다양하게 이해하기 위해 전통 철학의 유산을 적극 활용하거나 문학과 종교에까지 손을 뻗치는 ‘경계 가로지르기’ 등 창조적 철학함의 태도이다. 학술적으로도 이러한 전통에서 비롯한 철학적 성과들을 게재하는 〈유럽 대륙철학 리뷰〉(Continental Philosophy Review)가 1968년부터 지금까지 해당 분야 주요 학술지로 학계에 자리 잡기도 했다.

급기야 유럽 대륙철학 전통은 21세기, 더 급격하게는 2010년대로 진입하면서 유럽 대륙종교철학이라는 독특한 분과를 벼려내기에 이른다. 2019년에는 〈유럽 대륙종교철학 저널〉(Journal for Continental Philosophy of Religion)이 창간되기도 했으며, 앞서 언급한 학자들뿐 아니라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인 종교철학자들도 현재는 유럽 대륙철학이라는 명칭을 대체로 수용하면서 서로 생각을 공유하고,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럼 유럽 대륙철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또 한층 범위를 좁힌 대륙종교철학은 어떻게 종교적 물음에 접근하는가? 일단 방법론적으로는 주로 현상학과 해석학의 사유에 천착한다. 대륙철학에 다양한 사유의 흐름이 있지만 가장 많이 활용되는 사유 방식은 현상학과 해석학이며, 앞으로 순차적으로 게재될 철학자들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상학과 해석학에 대체로 친화적인 태도를 보여주면서 이를 자기만의 것으로 전유해내는 가운데, 신과 신앙의 문제를 다룬다. 비록 지난 세기 에디트 슈타인, 가브리엘 마르셀, 에마뉘엘 레비나스, 한스-게오르크 가다머, 폴 리쾨르 등 현상학과 해석학 전통에서 유신론 철학자나 종교 친화적 철학자가 많기는 했으나 이것이 우리가 만나볼 철학자들 사유의 원천이 된 주요 이유는 아니다.

형이상학적 사변에서 벗어나 더 자유롭게 사유하다

20세기 사유의 혁신을 일궈낸 현상학과 해석학은 신학에서도 크게 의존한 형이상학의 방식과 결을 달리하는 독특한 사유의 접근법을 만들어냈다. 이를 종교적 물음에 적용했을 때 기존의 신-담론과는 다른 사유의 물음을 전개하는 것을 넘어 아예 종교적 주제에 관한 논의 방식 자체를 바꾸는 효과를 낸다는 점이 일련의 철학자들에게는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이를테면 현상학은 현상에 대한 학문으로서, 어떤 형이상학적 전제나 사변적 사유의 전제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지고 나타나는 것들인 현상의 의미를 그 자체로 기술하며 이것들이 대체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지를 규명하는 학문이다. 이런 사유에서는 신도 (형이상학적 개념으로서) 존재나 존재자이기에 앞서 현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고 나타난다. 조직신학 개론서나 신학 입문서를 탐독한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조직신학 연구에서 신의 존재에 대한 논의가 대체로 신 존재 증명에서 시작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 다음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증명된 존재, 이른바 최고 존재인 신의 속성을 검토하는 작업이 이어진다. 인간과 공유하지 않는 신의 비공유적 속성으로서 신의 완전성이나 전지함, 전능성, 편재성의 특징을 규명하거나 인간과 공유하는 인격성에 대한 논의가 전개된다. 이 모든 것이 특정 존재와 그 존재에게 고유한 속성을 규명함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밝혀내는 전통 형이상학의 존재 이해에 속한다. 하지만 현상학에서는 이런 논의 자체가 대체로 현상의 본질을 밝혀내는 데는 무익하다고 본다. 나에게 현상으로서 신이 주어지고 나타났다면, 신은 현상으로 내게 현시되었고, 이때 내가 이해해야 할 것은 신에 대한 나의 체험과 그 의미다. 그러므로 신의 나타남은, 그것이 우리 인간에게 나타났다면, 이는 현상학적 사실성 문제이지 더는 증명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제 과제는 존재론적 존재 증명과 존재의 성격 규명이 아니라 체험의 현상학적 사실로 주어진 것을 기술하는 일이다. 이것이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부터 수많은 현상학자가 공유했던 신과 종교적 체험 현상에 대한 기본 접근 방식이다.

이런 점에서 유럽 대륙종교철학은 형이상학적 증명과 같은 작업에 얽매이지 않은 채, 자유롭게 신의 나타남에 초점을 맞추어 의미를 기술한다. 신이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낼 때, 소위 자신을 계시할 때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무엇인가? 이 일로 나에게 일어난 일을 철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런 체험으로 신앙이 내 안에서 일어났다면, 나의 삶은 더는 범속한 삶이 아니라 종교적 삶이 될 터인데, 이 삶의 본질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종교적 체험은 개인적으로도 일어나겠지만, 전례와 같은 공동체적 체험에서도 일어날 텐데, 그러한 종교적 의례의 체험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것들이 바로 유럽 대륙종교철학이 주로 파헤치는 중요한 문제들에 속한다. 당장 20세기 유럽 대륙철학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준 키르케고르가 신과 나의 관계를 규명하며 종교적 주제를 따져 묻는 방식을 떠올려보자. 《공포와 전율》을 예로 든다면, 그는 거기서 어떤 형이상학적 증명도 시도하지 않으며, 신앙의 본질에 대해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비롯하는 아브라함이라는 종교적 주체의 실존론적 의미를 기술하며, 신 앞에서 결단하는 신앙의 새로운 의미를 파헤치는 데 천착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아직 영글지는 않았을지라도 키르케고르를 현상학, 또는 종교적 현상학의 프로토타입으로 보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이런 식으로 유럽 대륙종교철학은 형이상학적 사변에서 벗어나 더 자유롭게 사유의 상상을 펼치면서 신과 종교의 물음을 고찰하는 데 주력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사유의 도전이 신학과는 대체 무슨 차별점이 있는지 물어야 한다. 현대신학의 경우 워낙 다양하게 전개되는지라 신학 학파별로 철학과의 차이를 논하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사유의 원천을 성서와 전통에서 찾느냐 여부다. 대체로 신학에서는 성서의 근거나 공의회, 신앙 전승, 신앙고백서가 중요한 신학적 주장의 논거로 제시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철학자들도 성서나 신앙 전승과 종교적 삶의 의미 사이에서 적절한 관련성을 찾을 때가 있다. 특히 해석학적 철학에서는 우리가 체험하는 현상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지만 어떤 매개를 기반으로 삼아 이해된다고 본다. 즉, 현상에 대해 유효한 체험을 했을 때, 나는 내가 속한 전통의 기반인 성서 텍스트나 신앙 전승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으며, 이런 과정을 거쳐 나의 신앙 체험을 검증하기도 하고 확장하기도 한다. 악과 죄에 관한 신앙 체험이 있다고 해보자. 그런 체험에 충격을 받은 나는 이를 더 잘, 깊이 이해하기 위해 성서 속 인물들을 검토할 수 있고,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경유하여 나의 실존을 달리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해석학적 철학에서 주목하는 텍스트를 매개로 삼은 자기 이해는 텍스트를 그야말로 나와의 연관 속에서 이해하지, 그것을 특정 주장에 대한 절대적, 또는 매우 유효한 권위를 가진 근거로 제시하지 않는다. 앞으로 보겠지만, 우리가 주목할 철학자들도 여러 흥미로운 성서 해석을 제시하며, 심지어 부활의 의미에 대해 자기 나름의 철학적 이해를 제시한다. 하지만 이 모든 성서나 부활 전승에 대한 이해는 그저 하나의 해석이고, 거기서 유효한 신앙의 의미를 해석학적으로 보여줄 수 있지만, 철학자들은 이를 어떤 신앙의 규범이나 신학적 권위로 만드는 일을 거부한다. 또 기존에 주어진 신앙고백서나 교리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지도 않는다(물론 철학자마다 성서와 전통에 부여하는 무게감이 다르기는 하다). 그것은 그야말로 신학이 할 수 있는 일이고, 철학자들이 주목하는 요소는 실존적 주체이면서 종교적 인간이기도 한 우리 인간 주체의 종교적 삶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특정한 교리에 신학적 논박을 가하거나 교회를 위해 교의를 세우는 데는 관심이 없다. 물론 우리가 다룰 철학자들 역시 그리스도교의 기본교리 ―삼위일체, 성육신, 부활 등― 를 나름 존중하지만, 존중 여부는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는 개인적 긍정 정도를 따라 형성되거나, 각자의 신실한 종교적 삶에 특정 교리가 얼마나 유익한 의미를 주는지, 아니면 오히려 종교적 삶에 대한 긍정을 방해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즉, 나의 삶을 사랑할 수 없고 부정하게 만드는 교리라면, 그들은 조금 극단적인 경우, 특정 교리를 치워버리거나 교회의 이해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다. 유럽 대륙철학 전통에 속한 철학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전통이나 교리의 수호가 아니라 삶이며,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삶, 더 나은 실천적인 의미로서 종교적 삶의 영성을 갖출 수 있는가 여부다. 제아무리 교리가 중요하다 한들 그것은 삶을 대체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전통 교리는 충분히 중요한 사유의 자산이 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제한적 의미에서, 우리 운명이기도 한 삶에 대한 사랑(amor fati), 세상에 대한 사랑(amor mundi)과 관련해서만 중요할 뿐이다.

나는 독자들이 앞으로 만나볼 철학자들을 특정 신학이나 교리로 재단하기보다 그들의 사유 방식과 의미 추구에 주목해주길 바란다. 앞서도 언급한 현상학에는 에포케 또는 환원이라는 중요한 사유의 조치가 있다. 형이상학적 사변이나 상식적 이해가 우리의 현상에 대한 접근을 편견 어린 태도에 휘말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현상학자들은 그러한 사변적 전제에 괄호를 치고, 우리의 모든 상식이나 이해에 입각한 판단을 중지하고, 가능한 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나타나는 그대로 체험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이것이 바로 현상학적 환원 또는 에포케다. 독자들에게는 아마 각기 고유한 신앙의 전통, 믿고 따르는 교리적 지향이나 노선이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 종교 사상가들과의 대화를 시작하며, 그들과 함께 신과 신앙에 대한 물음을 다시 묻는 가운데 자신이 견지하던 노선에 대한 집착이나 신뢰를 잠시 유보하자. 그럴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대가들의 신앙과 사상이 어떤 종교적 삶의 의미를 줄 수 있는지 함께 체험해보자. 그럴 수 있다면, 독자들은 새로운 신앙의 상상을 펼칠 수 있을 것이고, 뭔가 풀리지 않는 종교적 물음에 대한 일련의 유의미한 잠정적 해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만나볼 사상가들의 면면

이런 태도 가운데 우리가 마주할 사상가들을 개괄적으로나마 알아보자. 리처드 카니는 아일랜드 태생으로 캐나다 맥길 대학교에서는 찰스 테일러에게, 파리 10-낭테르 대학교에서는 폴 리쾨르에게 지도를 받아 철학을 공부한 학자다. 그는 부활절 휴가 기간 중 자택에서 나와 동료들을 초대해 어린 시절 신앙 형성기부터 현재 사상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독자들은 이 대화를 통해 우리에게 잘 전해지지 않은 아일랜드 특유의 가톨릭 신앙 및 켈틱 영성에 대해 들을 수 있겠다. 이러한 신앙의 기초 아래 카니는 메를로-퐁티의 신체의 현상학, 리쾨르의 철학적 해석학, 현대 무신론 철학 및 불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상과 종교적 영성을 가로지르며 재신론(anatheism)이라는 독특한 종교철학을 개진한다. ana-라는 접두어는 새로이, 다시, 이후에 등의 의미를 담을 수 있는 말이다. 그는 아우슈비츠 같은 비극과 그 고통 속에 울부짖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던 형이상학적 신의 죽음 이후 신을 사유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흥미로운 철학적 안내를 제시한다. 무엇보다 재신론적 삶은 신의 죽음 이후 나에게 도래하는 이방인 타자를 향한 태도로 결정되는데, 우리는 이 맥락에서 혐오와 배제가 난무하는 시대에 추구해야 할 환대의 철학과 이방인 환대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소중한 통찰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거리상 한계로 직접 만날 수 없어 온라인 미팅으로 대화를 나눴지만, 존 카푸토는 거리감이 무색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자신의 급진신학(radical theology)과 신시학(theopoetics)에 대해 열렬히 증언하며, 이를 기반으로 포스트휴머니즘을 통해 대변되는 오늘날 흐름 가운데 종교적 신앙의 의미가 무엇인지 자신의 견해를 들려준다. 본래 정통 가톨릭 신앙에 가까웠으나 하이데거와 데리다 등을 경유하면서 해체론적이고 급진적인 신학으로 나아간 과정을 흥미롭게 들을 수 있다. 더 엄밀하게는 급진신학에서 뿌리, 근원을 의미하는 라틴어 ‘radix’에서 비롯한 근본적/급진적이라는 의미를 담는 래디컬(radical)이 전통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거나 전통에 무조건 반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그의 입장에 주목하자. 그보다 전통의 뿌리를 뽑아 묻어있는 것을 털어내면서 원천을 면밀히 검토하는 일이 정통신학에서 말하는 신앙의 근본이나 기초에 대한 천착보다 더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신앙의 태도라는 점을 카푸토는 재기 넘치게 설명한다. 즉, 전통은 순전하게 형성되지 않고 뿌리에서부터 다양한 것들과 얽혀있으므로, 그렇게 얽혀있는 어떤 것과 더불어 신앙의 근본을 탐색해야 한다는 급진신학의 기본 정신은 우리를 전통과 근본에 대한 더 유연한 사고로 안내한다. 아울러 독자들은 이 대화에서 포스트휴머니즘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인간 이해나 인공지능의 발전 속에 변형될 신앙과 삶에 대한 하나의 전망도 접할 수 있겠다.

신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레비나스와 프랑스 현상학에 관한 뛰어난 전문가인 제프리 블뢰클은 강의와 연구를 통해 어떻게 철학적 이론과 영성이 통합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성실한 철학자다. 이론과 영성에 대한 통합을 고민하는 그의 노력은 철학과 정규 수업을 통해 학생들과 산티아고 순례길을 함께하며, 종교철학자들과 교부들의 텍스트를 읽고 그 가르침을 몸소 실현하기 위해 수도원 체험을 수업 중 함께하는 것 등 매우 구체적인 형태로 구현되고 있다. 독자들은 블뢰클의 차분하고 친절한 목소리를 통해 순례길의 현상학과 이론과 영성의 통합, 그리고 이런 통합적 사유의 기반인 프랑스 현상학이 지닌 종교적 자원이 무엇인지, 열린 자세로 타자의 생각을 수용하는 바람직한 철학적 태도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뉴저지 자택에 우리를 초대해준 메롤드 웨스트폴은 개혁파 철학자로서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는 목회자 가정의 자녀로서 커온 이야기, 그러면서도 휘튼 칼리지에서 철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 등을 흥미롭게 들려준다. 한국에서도 익숙한 개혁파 신앙 토대 위에 포스트모더니즘을 가장 적극적으로 전유하고 활용한 철학자로서, 독자들은 왜 포스트모더니즘이 신앙과 친화적일 수 있는지, 심지어 왜 소위 순전한 그리스도교와 포스트모던 사상이 반드시 적대적일 필요가 없는지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철학자이자 교회 장로이기도 한 그의 교회를 향한 애정 어린 조언과 팬데믹 이후의 신앙과 삶에 대한 지혜도 곁들어 들어볼 수 있다.

이번 인터뷰에서 만난 유일한 여성 철학자이기도 한 크리스티나 그슈반트너는 현상학과 해석학, 종교철학에 대한 예리하고 날카로운 통찰과 더불어 정교회 영성이 지닌 매력이 무엇인지 독자들에게 들려줄 것이다. 특히 정교회 전례에서 일어나는 일을 현상학적 관점에서 기술하는 작업은 종교적 체험의 의미가 어떤 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예시로 삼을 만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슈반트너는 생태론적 위기 상황에서 정교회 전례의 영성이 우리에게 생태 친화적 의식을 일깨울 수 있는 중요한 계기로 작동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이외에 가톨릭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의 의미, 미국 학계에서 여성으로 자리 잡는 일의 어려움 등 우리가 귀담아들어야 할 다양한 삶의 주제들을 가감 없이 우리에게 전해준다.

마지막으로 2019년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베리타스 포럼 주강사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제임스 K. A. 스미스와의 대화는 한국에서도 이미 주저가 여러 권 번역된 탓에 더욱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으리라 본다. 비록 한국에 방문한 적은 있지만, 그 후 별다른 직접적 교류가 없었고, 특별한 진전된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다. 이 점을 아쉬워하던 차에 우리는 스미스와의 대화 기회를 온라인상으로나마 마련했고, 그의 신앙 여정에서부터 최근 관심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독자들에게 아직 생소할 수 있는 회심 이야기와 그리스도교 철학자로서의 소명, 개혁파 철학자로서 대륙종교철학을 통해 종교적 물음에 접근할 때 얻을 수 있는 유익, 문화적 전례에 관한 더 발전된 생각, 시간에 대한 영적 성찰 등 최근 어떤 관심 아래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지도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팬데믹 이후 신앙과 인공지능의 발전 속에서도 견지해야 할 삶의 지혜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그리스도교 철학자의 생각 역시 함께 배울 수 있겠다.

나는 이렇게 대화를 나눈 학자들을 소개하면서 “우리”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했다. 이는 해당 인터뷰에 많은 사람의 도움이 있었음을 뜻한다. 보스턴 칼리지의 일정을 동행해주고, 통역에도 도움을 준 보스턴 칼리지에서 수학 중인 안동교구 박효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과 제리 정 님, 이분들을 소개해주고, 역시 보스턴 칼리지에서 공부하시며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도움을 준 예수회의 김우재 스테파노 신부님, 김현직 토마스 신부님, 김우재 야고보 수사님, 뉴욕과 뉴저지 일정에 동행해주고, 통역으로 수고해주신 박예일 목사님, 온라인 인터뷰마다 통역으로 대화를 도와준 철학자 강지하 선생님께 더없이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또한 지면을 내주어 철학자들과의 대화를 한국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매개가 되어준 〈복음과상황〉 편집부에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 신학이나 일반적인 교리적 가르침으로는 해소되지 않았던 신앙의 갈증을 느꼈던 분들, 또 신과 신앙에 대한 새로운 사유의 역동을 기대했던 분들,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삶의 지혜를 얻고자 했던 분들에게 앞으로 소개될 대화가 어떤 해답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유와 삶을 자극하는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한다.

김동규
서강대 철학연구소 연구교수·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연구원. 현상학, 해석학, 종교철학 등을 주로 연구한다. (신학적 전제를 괄호 치고) 철학적 상상력을 통해 신과 신앙을 다시 사유하는 일이 (비)신자들을 위해 필요하다고 믿으며 여러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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