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호 특집]
무더운 여름입니다. 모두 안녕하신가요?
이맘때쯤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주거 정의’를 상상하던 날 말입니다. 저는 이주인권 활동가로 이주민과 이주 배경 식구들과 동행하며, 여름과 겨울이 얼마나 무서운 계절인지 생생히 경험했습니다. 지구의 회복력을 넘어서는 소비의 결과를, 우리 사회에서 가장 작고 낮고 외롭고 연약한 이들이 가장 심하게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더운 날은 더욱 덥고, 비 오는 날은 집 안에 물이 차고, 추운 날에는 웃풍이 심한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기후위기의 책임을 고스란히, 더 심하게 짊어진 식구들을 보며 이주인권의 일환으로 주거 지원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곁에서 주거 지원 활동을 이어오다, 올해 1월 저는 갑자기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가 되었습니다. 뉴스에서만 접하던 ‘전세사기 피해자’가 된 것입니다. 저는 이주인권 활동가이자 전세사기 피해자로서, ‘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거 문제가 어떻게 한 사람의 삶 전체를 흔들고, 사회를 뒤흔드는지, 그 속에서도 어떻게 연대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는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보이지 않는 주거 위기
한국 사회에서 유의미한 통계조차 없는 대표적인 사회적 소수자가 있습니다. 바로 ‘미등록 이주민’1)입니다. 제가 만난 도심 속 미등록 이주민 식구들은 대부분 저임금 노동자입니다. 본국에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고, 체류 자격이 없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큰 지출도 많아 보증금을 마련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언제 한국에서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보증금을 쉽게 회수할 수 있도록 낮은 보증금과 저렴한 월세방을 찾을 수밖에 없지요. 결국 반지하나 고시원 등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체류 자격 증빙 서류가 없다 보니 본인 명의로 임대차계약을 맺는 일조차 쉽지 않습니다. 고용주나 지인 명의로 임대차계약을 맺는 경우가 많아, 자신이 사는 집에서조차 권리를 제대로 주장할 수 없는 처지에 놓입니다.
사계절도 고역입니다. 여름이면 찜통더위와 장마로 집 안에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쉽게 피어나, 어린 자녀들은 피부 질환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겨울이면 열악한 난방시설로 감기나 호흡기 질환에 자주 걸립니다. 건물이 낡아 부엌 싱크대가 무너져도, 집주인은 알아서 고쳐 살거나 아니면 당장 나가라며 협박합니다.
미등록 이주민은 불안정한 노동 형태로 주급이나 일급으로 급여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코로나 유행 시기나, 명절 연휴, 공장 비수기 에 일감이 끊기면 수입이 급격히 줄어 월세나 공과금 등 기본 주거비마저 제때 내지 못하게 되지요.
이들은 지역사회에서 노동하고 생활하며 거주하는 구성원이지만, 공식적인 ‘주민’으로는 인정받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극심한 주거 불안이나 위기를 겪는데도 지자체의 긴급 복지에서 배제되고 있습니다.
공적 지원이 불가능한 현실, 민간의 지원이 절실합니다. 이 현실을 조금이라도 개선하기 위해 제가 활동하는 성공회 용산나눔의집에서는 긴급 주거 지원 기금을 운영합니다. 후원자분들이 모아주신 기금을 통해 긴급 월세 지원, 공과금 지원이 이루어집니다. 폭염과 한파를 대비해 이불, 전기장판, 히터, 난방 텐트, 선풍기 등 생필품도 지원하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역할도 매우 중요합니다. 몇몇 교회들은 용산나눔의집을 통해 미등록 이주 아동 가정과 결연을 맺고 중장기적으로 주거비를 지원하여 주거 안정에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곰팡이 핀 벽지를 새로 도배하거나, 썩은 가구를 교체하는 등 주거 환경 개선 활동에도 나서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구조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미등록 이주민을 위한 사회 안전망을 조성한다면 복지 체계 내에서 많은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등록 이주민에게 체류 자격을 부여하여 애초에 열악한 상황에 놓이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들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큰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에, ‘지금 당장 안전한 주거가 필요한 미등록 이주민’에게 실질적인 손을 내미는 활동 역시 필요합니다.
사회에서 가장 작고, 낮고, 외롭고, 연약한 이들의 주거를 보장하는 일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안전한 삶을 위한 첫걸음입니다. 미등록 이주민의 삶이 보호받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 사회 전체의 주거 안전과 인권 보장의 튼튼한 기반이 마련될 것입니다. 숨 쉴 틈을 만드는 우리의 손길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크고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지금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는 우리의 연대가 ‘모두를 위한 안전한 주거’를 향한 진정한 변화를 이끄는 출발점이 된다고 믿습니다.
전세사기라는 사회적 재난
지금까지 제가 미등록 이주민 식구들과 동행하며 경험한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이제는 ‘전세사기 피해자이자 동작구 아트하우스 전세사기 피해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겪은 일과 생각을 전하려고 합니다.
다시 한번 여쭙습니다. 여러분, 안녕하신가요?
저는 안녕하지 못합니다. 마음이 참 무겁습니다. 전세사기라는 문제가 단지 개인의 일이 아니라, 이 순간에도 반복적으로 벌어지는 사회적 재난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일은 생각보다 우리 주변 아주 가까이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자취한 지 채 2년이 안 된 사회 초년생입니다. 원래 수원에서 서울로 왕복 4시간을 출퇴근하며 개인의 삶을 잃고 지쳐가던 중, 직장 근처에 집을 얻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서울의 월세는 매우 비쌌고, 공공임대나 셰어하우스 같은 대안 주거는 너무나 부족해 현실적인 선택지가 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중소기업 청년 보증금 대출이라는 정부의 청년 주거 정책을 통해 어렵게 작은 원룸을 계약했습니다. 5평 남짓 작은 집이었지만, 전셋값은 무려 1억 원이었습니다. 전 재산 2천만 원과 대출 8천만 원을 더해 겨우 집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올 1월, 임대인의 갑작스러운 파산 통보로 모든 게 무너졌습니다. 알고 보니, 제가 계약한 집은 이미 선순위 근저당과 다른 임차인 보증금으로 담보 가치가 전혀 없는 ‘깡통 매물’이었습니다. 당시 공인중개사였던 임대인의 딸은 이 사실을 숨기고 허위 정보를 제공해 저를 속였습니다. 피해자는 저를 포함해 75명, 돌려받지 못한 보증금은 66억 원에 달합니다.
전세사기 피해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손이 떨리고 머리가 하얘졌습니다. ‘은행 빚은 어떻게 갚지?’ ‘언제 집에서 쫓겨날까’ 같은 온갖 걱정과 불안이 제 머릿속을 헤집었습니다.
다행히 다른 피해자들과 대책위를 구성해 공동 대응을 시작했습니다. 피해자가 모여 만든 동작구 아트하우스 전세사기 피해대책위원회는 출범 전 워크숍을 통해 세 가지 목표를 세웠습니다. 첫째, 전세사기 피해 회복, 둘째, 피해자 상호 돌봄, 셋째, 연대입니다.
피해자들이 함께 목소리를 내면 더 큰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대책위 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경찰 수사가 더딜 때는 경찰서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적극적 수사를 촉구했고, 기자회견이 끝나자마자 담당 수사팀장과 수사관이 저희 대책위를 상대로 수사 과정을 브리핑하며, 적극적인 수사를 약속했습니다. 구청과의 미팅을 통해 피해자가 원하는 구제 방안을 전달했고, 실제로 구청의 관련 조례가 개정되었습니다. 전세사기·깡통전세 전국대책위와 시민대책위가 연대하여 국회와 대통령실 앞에서도 전세사기 피해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발언하고, 국회의원, 시의원, 구청 직원 등 다양한 공무원과 소통하며 피해자를 위한 정책과 예방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공동 대응 덕분에 전세사기 특별법 연장을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현재 대책위는 전세보증금 반환 채권의 비면책 결정을 촉구하는 활동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임대인의 파산 이후에도 보증금을 돌려받을 권리를 박탈당하지 않기 위해 회생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탄원서를 모아 제출했습니다. 최근에는 1천2백 명이 넘는 시민분이 탄원서 서명에 참여했습니다.
대책위라는 공동체의 또 다른 중요한 기능은 바로 ‘상호 돌봄’입니다. 전세사기 피해자는 심리적 어려움도 크게 겪습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활동가 월급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8천만 원의 빚, 피해자에게 요구되는 끊임없는 입증 책임, 주변의 2차 가해까지 견디기 어려운 순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대책위 회의의 첫 번째 순서는 일상 공유입니다. 지난 회의 이후 변화한 일상과 마음을 자유롭게 나누는 시간인데요. 다른 곳에서는 쉽게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돌봅니다. 또한, 심리 상담을 적극 권장합니다. 저는 전세사기 피해 이후 우울감이 심해져 심리 검사를 받았고, 자살 사고가 높다는 결과에 놀라 꾸준히 상담받고 있습니다. 한 교회가 청년을 위한 긴급 상담을 20회 무료로 지원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할 수 있는 실천이라 생각하며 반가웠습니다.
대책위 활동을 하며 우리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이들도 많아졌습니다. 언론, 연구자, 종교 커뮤니티, 시민 등 다양한 사람들이 귀 기울여준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피해자가 큰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전세사기 피해자는 고립감으로 무너지기 쉽습니다. 피해를 알게 된 순간부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거운 감정에 갇히기 때문입니다. 이때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은 대책위라는 공동체의 존재입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고통을 듣고, 함께 대응하는 공동체가 있기에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전세사기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이 순간에도 계속되는 사회적 재난입니다. 이 문제를 개인에게만 맡기지 않고 공동체가 함께 대응할 때, 비로소 진정한 회복과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신뢰의 붕괴, 전세사기
전세사기 피해를 처음 인지했을 때, 저는 스스로를 자책했습니다. ‘왜 이런 상황이 나에게 벌어진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선택을 한 걸까?’ 하지만 곱씹을수록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국가가 공인한 공인중개사를 통해 계약했습니다. 정부가 청년 주거 정책이라며 보장한 전세 자금 대출을 통해 집을 얻었습니다. 저는 국가가 마련한 절차와 사회가 권장한 방식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그런데 피해를 당한 뒤 돌아온 건 “왜 더 꼼꼼히 알아보지 않았냐”는 질책의 말들이었습니다.
그 순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회에 제도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제도가 실제로 나를 지켜줄 수 있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점을요. 전세사기의 고통은 물질적 피해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믿고 따랐던 시스템 전체에 대한 신뢰를 잃으면, 그다음부터는 누구도, 어떤 제도도 쉬이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요즘은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마다 녹음을 하게 됩니다. 그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 그런 말 한 적 없다는 부정 앞에서, 제 기억조차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기 피해가 만든 불신은, 단지 가해자 개인에게만 향하지 않습니다. 사회 전체를 향하게 됩니다.
전세사기 피해자들 상당수는 저처럼 사회 초년생입니다. 막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들이 처음 마주한 현실이 사기였다면, 우리는 앞으로 이 사회를 어떻게 믿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것은 단지 개인의 불행을 넘어, 공동체의 파괴와 사회의 파편화를 낳는 구조적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내 삶을 지키기 위해선 제도보다 나 자신만을 믿어야 한다는 인식, 남을 신뢰할 수 없다는 감정, 제도를 믿지 못하게 되는 불신. 이것이야말로 전세사기가 우리 사회에 남긴 가장 깊은 상처일 것입니다.
공동체는 신뢰 위에 서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정부가 제시한 전세사기 예방 대안과 피해 구조는 오히려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며 공동체를 더 파편화하고 있습니다. 제도는 위험을 관리하지 못하면서, 피해가 발생하면 세입자 개인이 모든 것을 입증하고 감당해야 합니다. 전세사기가 발생하면 법과 제도는 ‘입증하라’ 요구하지만, 피해자는 홀로 서있습니다. 누구도 명확한 가이드를 제공하지 않고, 심사와 결정은 제도 밖 어딘가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고립은 피해자를 불확실함과 불신 속에 방치하며, 우울과 불안, 자기 비난과 무기력으로 이어집니다.
회복은 단지 물질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건 보증금만이 아닙니다. 신뢰할 수 있는 사회,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 다시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기반. 저는 부활이 바로 그런 것이라 믿습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가능성, 그 가능성이 지금 피해자들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전세사기 특별법에는 올해 5월 말까지 계약한 사람만 신청할 수 있다는 제한이 생겼습니다. 전세사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새로운 피해자의 삶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삶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선 제도의 실질적인 응답이 필요합니다. 설명 없는 전세사기 피해자 ‘불인정’ 통보가 아닌 예측 가능한 피해자 인정 심사 기준, 피해자들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절차, 심리적 회복을 위한 지원 말입니다. 상담 프로그램은 일상에서 실제로 닿을 수 있고, 피해자가 신뢰하고 마음을 열 수 있는 방식으로 설계되어야 합니다.
지금의 제도는 피해자를 ‘입증해야 할 존재’로만 봅니다. 제도의 실질적 응답은, 피해자를 ‘회복되어야 할 존재’로 바라보는 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런 변화야말로 제도가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피해자들이 다시 사회를 믿을 수 있는 기반이 됩니다. 회복은 단지 재산의 복구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회복은 신뢰의 회복, 존엄의 회복, 공동체성과 관계의 회복이 함께 이루어져야 가능한 일입니다.
더는 집 없는 이들이 사기 대상이 되지 않도록, 제도가 피해자를 외면하지 않도록, 피해자가 다시 사회를 믿고 살아갈 수 있도록, 교회와 우리 사회 전체가 책임을 다해주십시오. 피해자들의 계속되는 삶과 미래를 위해, 모두가 다시 손을 잡고, 다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안전한 집이 모두의 권리
미등록 이주민과 전세사기 피해자가 마주하는 주거 위기를 살펴보면서, 주거 문제가 어떻게 한 사람의 삶 전체를 흔들고, 사회를 뒤흔드는지, 그 속에서도 어떻게 연대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는지 나누어 보았습니다.
집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을 넘어 인간의 존엄과 안전, 사회적 신뢰의 기반입니다. 앞으로도 이 땅 위의 모두가 안전한 집에서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교회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함께 목소리를 내고 행동해나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1) 한국 정부가 필요 이상으로 까다롭게 만든 ‘등록’ 이주민 기준에 맞출 만한 서류가 부족하거나 준비할 수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불법체류자’라는 용어가 체류자에게 잘못을 묻는 듯한 인상을 준다면, ‘미등록 이주민’은 ‘등록이 어려운 한국 사회’ 자체를 문제시하는 중립적 표현에 가깝습니다.
강다영
인생의 절반을 이주민으로 살아왔다. 이주민과 이주 배경 청년으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에서 이주인권 활동을 한다. 최근 전세사기 피해를 인지해, ‘동작구 아트하우스 전세사기 피해대책위원회’를 꾸리고 위원장으로서 주거권 활동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