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호 이한주의 책갈피]

언니는 한밤중 홀연히 나타나 새까매진 얼굴로 현관문을 두드렸다. 그러고는 적당히 달궈진 온돌 위에 고꾸라져 사정없이 잤다. 마치 우리 집에 온 이유는 딱 하나 ‘깊은 잠’을 자기 위해서였다는 듯, 그렇게 자니 참 좋다는 듯, 오래, 꼼짝 않고. 언니가 오면 이불을 가로로 펴고 잤다. 이불 밖으로 우리의 발목과 머리통이 튀어 나왔다. (190쪽)

잠을 자기 위해 한밤중에 현관문을 두드리는 사람의 피곤함을 생각해본다. 제대로 잘 수 없는 공간에서 잠을 줄여가며 공부하는 언니에게 동생의 원룸은 깊은 잠을 잘 수 있는 유일한 곳이지만, 이 공간도 세 자매가 함께 발을 쭉 뻗을 여유를 주지 않는다.

좁은 방에 자기 삶을 구겨 넣으며 미래를 준비했던 청춘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김애란 작가가 10년 뒤 출간한 네 번째 소설집 《바깥은 여름》(문학동네)에 실려있는 〈입동〉에 나오는 미진은 〈기도〉에 나오는 언니를 떠올리게 한다. 젊은 시절 그녀는 요 대신 은박 돗자리를 갖고 독서실을 전전했고, 9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해 세 번 떨어졌고, 공무원이 되는 대신 노량진 공무원 입시학원에서 사무를 봤다. 결혼 후 난임 치료를 받다 두 번 유산한 끝에 영우를 가졌고, 다섯 번 이사 끝에 집값의 반 이상을 대출로 끼고 20년 된 아파트의 주인이 된다. 그때의 느낌을 미진 남편은 이렇게 회상한다.

“그랬다. 잠이 안 올 정도로 좋았다. 어딘가 가까스로 도착한 느낌. 중심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원 바깥으로 튕겨진 것도 아니라는 거대한 안도가 밀려왔다.”(33쪽)

고시원과 독서실에서 청춘을 보낸 미진은 정착 욕구가 강했던 만큼 어렵게 얻은 자기 집에 남다른 애착을 보인다. 이사도 하기 전에 인테리어를 하고, 부엌과 마주한 작은 방을 정성껏 아들 영우의 방으로 꾸민다. 부부는 이 집에서 아이와 함께 하루가 쌓여 계절이 되고, 계절이 쌓여 인생이 되는 행복을 경험한다. 하지만 영우가 후진하는 어린이집 차에 치여 숨지는 사고를 당하면서 모든 것이 엉망이 된다. 영우가 떠난 집은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조용해지고, 미진은 집 밖에도 나가지 못하고 매일 흐느낀다. 집값은 샀을 때보다 시세가 2천만 원이나 떨어져,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갈 수도 없다. 봄에 사고를 당한 후 두 계절을 더 보내고 겨울이 되었을 때, 미진은 실의에서 벗어나려고 미루어두었던 집 도배를 한다. 도배를 하던 미진은 갑자기 꼼짝하지 않고 벽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 미진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도배지 든 양손을 벽에서 떼지 못한 채 아내를 내려다 봤다.
- 여기…
- 응?
- 여기… 영우가 뭐 써놨어…
- …뭐라고?
- 영우가 자기 이름… 써놨어. (34쪽)

젊은 시절 읽었던 소설 중 제목에 ‘방’이 들어간 작품이 꽤 있다. 《지상의 방 한 칸》·《숲속의 방》·《숨어있기 좋은 방》. 여기서 방은 가족의 공간 ‘집’에 대비되는 개인의 공간을 의미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방은 개인의 은밀하고 고유한 장소가 아니라 잠시 머무는 임시 거처, 삶을 유지하는 최소 공간을 의미하게 되었다. 많은 청년이 고시원, 원룸, 다세대주택, 반지하 단칸방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세태 탓이겠다. 그래서인지 200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가 김애란 작가의 작품에는 유난히 ‘방’이 자주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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