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호 책방은 열린 문]
“영미 님은 이곳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되셨어요?”
“여기선 15년 됐네요.”
“와… 15년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몰랐어요? 우리 서점에 시간 도둑이 있어요.”
신촌역 3번 출구 앞 홍익문고에는 시간 도둑이 산다. 이곳에서 일하겠다고 들어와 엉덩이를 붙이고 마음도 붙이면, 시간 도둑은 꿀떡꿀떡 그 직원의 시간을 마신다. 영미 님도 시간 도둑을 만난 서점원이다. 또 한 직원은 23년을 넘겼다. 대학가에 있는 서점이다 보니, 대학 시절을 뒤로하고 한창 자신의 삶을 살다 우연히 다시 방문한 손님이, 직원에게 살며시 묻기도 한다. “혹시 예전부터 일하셨던 분 아니에요? 한 20년 전에요. 와… 아직 계시네요.”
나는 시간 도둑이 잡고 있던 티셔츠 밑자락을 슬며시 빼내고, 홍익문고에서 하던 일을 마무리했지만, 여전히 직원 독서모임인 ‘오독오독’에 나간다. 다섯 명의 직원이 우연히 비슷한 시기에 같은 책을 읽게 돼서, 우리도 출근 전에 모여서 얘기나 해보자 하고 순수하게 읽기를 즐기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엔 완독은 기본이고, 재독하는 사람도 꽤 있다. 간혹 완독을 못 한 사람이 있다면, 다른 재밌는 책을 읽느라 선정 도서를 읽을 시간을 빼앗긴 것일 뿐이다. 읽기의 쾌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이 모임도 대화를 나누다 보면 시간이 꿀떡꿀떡 가버린다.
영미 님은 홍익문고에서 15년, 전체 서점 경력으로는 18년 일한 서점원이자, 나의 상사이자, 동료였다. 여기선 손님이 들어올 때, “안녕하세요”가 아니라 “어서 오세요”라고 해야 한다고 가르쳐줬다. 모두에게 “안녕하세요”라고 하면 배본처 기사님이 오신 건지, 손님이 오신 건지 구분이 안 된다고 했다. 또 손님이 어떤 책을 찾으시면, 끝까지 찾아주는 분이다. 상대의 나이나 태도에 상관없이 모든 손님에게 최대한의 존중을 담아 대한다. 이를테면 손님에게 무언가를 건넬 땐 언제나 두 손으로, 혹은 한 손이 한 손을 받친다. 베테랑 서점원 영미 님의 어깨 너머로 손님 대하는 법을 배웠다.
오래된 서점원의 일상
오전 10시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한다. 지하철역까지 가는 버스에서는 듀오링고 앱으로 영어와 일본어를 공부하고, 지하철에선 책을 읽는다. 서점에 도착하면 총판과 출판사에서 보내주는 책들을 뜯고, 정보를 전산에 입력한다. 층별로 장르에 맞게 배분한다. 손님이 질문을 해오면 응대한다. 퇴근길 지하철에서는 야구를 본다. 집에 도착하면 저녁을 먹고, 씻고, 자그마한 서재에 들어간다. 책과 나만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책을 읽고 필사를 한다. 새벽 2-3시에 잠든다. 영미 님의 일상 루틴이다.
어쩌다 보니 인생을 통틀어 가장 오래 몸담은 곳이 홍익문고가 되었다. 처음 출근하던 날의 기분을 기억하는지 궁금했다.
“긴장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나요. 남양주 ‘신원문고’라는, 지금은 폐업한 서점에서 서점 일을 처음 시작했는데요. 신원문고 처음 출근한 날도, 홍익문고 처음 출근한 날도 긴장했어요. 서점 둘러보고, 혼자 밥 먹으러 가고, 약간 외롭기도 했고…”
책을 좋아하는 이답게, 매일 책에 둘러싸여 일하고, 책을 만지고, 집에 돌아가서도 책을 읽는다. 한 달에 열 권에서 열다섯 권 정도 읽는다고 한다. 요즘엔 독서모임 ‘오독오독’에서 나눌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고 있다. 출판사 ‘난다’에서 내는 ‘시의적절’ 시리즈로 매일 한 편의 시나 에세이를 읽는다.
영미 님은 입고 정보 입력을 담당하고 있다. 매일 출판사나 총판에서 보내주는 책의 정보를 서점 전산에 입력해 층별로 분배하고, 개정판이 나오거나 정가 인상 등의 특이 사항이 있을 때 표시한다. 중요 특이 사항은 전 직원에게 알려준다.
함께 일하던 시절, 구판 대신 개정판을 빼는 실수를 한 적이 있다. 다행히 총판으로 보내기 전에 확인했다. 직속 사수는 그럴 수 있다고 다음엔 잘하라고 했지만, 영미 님에게 혼이 났다. 이런 실수에 단호한 분이었다.
“홍익문고에 처음 들어올 때는 수험서 코너 담당으로 시작했어요. 수험서는 개정 나오면 무조건 바로 빼야 하거든요. 손님이 구판을 사가면 문제가 생기니까요. 정확함이 중요한 층에서 일을 시작해서인지, 아직도 반품을 빼야 하는데 안 빼거나 하는 부분을 보면 민감하게 반응하게 돼요. 손님이 잘못 사 가실 수도 있고, 전산에서 꼬일 수 있고요.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점 일을 처음 시작할 때 품고 있던 낭만은 없었는지 물었다. 나는 그런 게 있었기 때문이다. 책에 둘러싸여 차분히 일하는 모습을 상상했고, 그 낭만은 일하는 시절 한때를 즐겁게 보내게 해줬다. 실상은 책을 옮기고 반품을 포장하고 옮기는 등, 예상보다 더 육체를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지만 말이다.
“흠… 전 딱히 낭만이 없었어요. 지금처럼 서점에 관한 드라마나 콘텐츠가 많은 시기도 아니었고, 처음 일할 때 신원문고가 책들을 싹 뺐다가 들여놓는 시기에 들어가서인가, 그 많은 책을 다 꽂고 정리하는 일부터 시작해서인지 딱히 서점에 대한 낭만을 가지질 않았어요. 가질 수 없었다고 해야 할까.”
혹시 서점에서 일해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조언이 있는지 물었을 때도, 낭만을 버리고 ‘서비스업이다’ ‘판매업이다’라는 생각을 가지면 오래 일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책을 매일 매만지며, 틈이 날 때면 친구들과 여행을 자주 가는 영미 님은 여행지에서도 꼭 동네책방을 찾는다. 북스테이 같은, 머물며 온종일 책만 읽는 여행도 종종 한다. 여행지에서 동네책방에 들르는 일의 매력은 무엇일까?
“동네책방에서 만나는 책은 일하며 만지고 보는 책과는 또 달라요. 입고 잡으면서도 새로운 책을 많이 보고, 찍어두지만. 동네서점에서 서점 지기들이 골라놓은 책들을 구경하면 처음 보는 책도 많고, 그 책을 알게 되는 재미가 커요. 또 북스테이를 가면 확실히 책에 집중이 잘돼요. 1박 2일 가더라도, 서너 권은 읽고 와요.”
서점에 관한 책도 많이 읽은 분이라, 책 추천을 요청했다.
“《채링크로스 84번지》. 여행지 동네책방에서 발견한 책이에요. 《서점 일기》라는 책도 재밌는데, 제가 경험한 손님들 이야기와 겹치는 게 많았어요. 표지 색만 말하는 등 두루뭉술한 정보로 책 찾아달라는 손님 이야기도 비슷하고, 서점에 들어오자마자 정체를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지는 손님들도 비슷하고…”
추천해준 두 권의 책을 읽어보았다. 《채링크로스 84번지》는 1949년부터 1969년까지, 도서 구매자인 미국의 희곡 작가와 영국 고서점 직원이 주고받은 실제 편지가 실려있다. 주된 내용은 어떤 책을 구해달라는 요청과, 그에 응하여 보내주는 이야기다. 《서점 일기》는 스코틀랜드에 있는 한 중고서점 주인이 쓴 이야기로, 조지 오웰이 서점원 시절을 돌아보며 쓴 에세이 〈서점의 추억들〉을 인용하며 솔직하고 통쾌하게 서점 일기를 썼다. 두 권 모두 영미 님과 닮았다. 담백하고 은은한 여운을 준다.
소중한 것은 시간을 넘어 이어진다
홍익문고는 창업자인 박인철 씨가 1957년 판잣집을 얻어 문을 연 헌책방으로 시작했다. 현재는 아들 박세진 씨가 운영하고 있다. 2012년 재개발로 철거될 위기에 처했으나, 시민단체와 지역민들의 관심과 반대 서명운동을 통해 살아남았다. 본래 지하 1층부터 4층까지 모두 서점으로 운영했으나, 현재는 1층에서 3층까지만 서점이며, 지하 1층에선 2022년 6월부터 문구류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영미 님은 홍익문고의 굵직한 사건을 함께했다.
“재개발 때 시민단체에서 와서 손님들에게 직접 서명받고 그랬죠. 그 시기를 겪어서인지, 전부터 오는 손님들은 살아남아서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봐주시는 게 있는 것 같아요. 또 문구류를 들여놓는 것을 처음 사장님과 직원들이 논의할 때도, 전 반대하는 입장이었어요. 분실률이 높아 관리도 잘 안될 것 같고, 컴플레인도 많을 게 분명하니, 반대했어요. 지금은 문구를 사 가는 분도 많고, 문구 덕분에 여기 서점이 있는 걸 아시는 분도 있는 듯해요. 우리 서점이 나아갈 새로운 방향이었나 봐요.”
영미 님에겐 홍익문고가 어떤 존재일까? 홍익문고와 오랫동안 함께하는 이유가 있는지 궁금했다.
“한 시 반에 출근하는 근무 시간이 제 생활 방식과 잘 맞아요. 함께 일하는 직원들과도 잘 맞고, 오독오독도 재밌고요. 전에는 독서모임을 해본 적이 없어요. 낯가림이 심하고, 책을 읽고 토론하는 데 자신이 없어서 외부 독서모임에 가볼 생각을 안 했죠. 우리 모임은 다 아는 사람이니까 편하고. 선정하는 책이 이전에 안 읽어본 장르거나 선호하지 않는 작가의 것일 때도 있어서, 새롭게 알고 좋아하게 되기도 해요. 이런 과정이 좋아요. 각자 느끼는 바가 다르니까, 좋았던 문장 공유하는 것도 재밌고요.”
만약 서점 직원이 되지 않았다면, 어디서 무얼 하고 지낼 것 같은지 물었더니, 상상해본 적 없다고 했다. 지금이 편하고 좋아서 다른 걸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난 홍익문고에서 일할 때 너무 편하고 즐거워서 불안했다. 주변 사람들은 치열하게 사는 것 같은데, 나는 즐겁게 사는 것 같아서, 뒤처지는 것 같아서 불안했다. 이 부분도 영미 님은 공감하지 않았다. 즐거움이 곧 불안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영미 님은 손님이 재방문하도록 유도하는 데 힘쓴다. 친절하려 하고, 질문엔 성실히 답하며, 찾는 책이 없다면 주문까지 도와드리고, 흐름을 읽는 일에도 빠르게 반응하려 노력한다. 어떤 시기에 손님이 찾으실 만한 책을 바로 캐치하고, 입고해두는 일에도 기민하고자 한다. 이것이 오래가는 서점의 비결일까.
“홍익문고가 오래갈 수 있는 이유는 오랜 손님에게 있어요. 손님이 길게 함께해주면 서점도 오래갈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 같아요. 한 번 오신 손님이 또 오시게 만드는 것이 중요해요.”
그럼에도, 전에 비해 오프라인으로 책을 구매하는 사람이 줄면서 홍익문고 보유 서적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서점이 사양산업이라는 말을 오래전부터 들어왔을 영미 님의 생각을 물었다.
“책을 읽는 인원이 줄어들고 있다곤 하는데, 아직까진 심각할 정도로 체감하지 않아요. 오프라인 서점에 와서 책을 사는 사람들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여전히 책을 찾는 사람들이 있어서요. 서울국제도서전에 해마다 사람이 몰리는 것이나, 동네책방이 사라지는 만큼 꾸준히 생겨나는 것을 보면 그래요. 지금도 베스트셀러 위주로 팔리지만, 이전과 확연히 다른 점은 손님들이 다양한 장르의 책을 찾으신다는 거예요. 찾으시는 작가의 범위도 넓어졌어요. 기존 형태의 책방이 문을 닫는 만큼, 다양하게 책을 사고 체험하는 공간도 늘어나는 것 같고요. ‘사양산업’이라 일축하기엔, 다방면으로 책을 찾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홍익문고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매대에는 오독오독 선정 도서가 모임에서 나눈 질문과 함께 진열되어있다. 또 분기별로 ‘비밀책’ 이벤트를 진행한다. 작년 연말, 직원들이 한 해 동안 읽은 책 중 가장 좋았던 한 권을 선정해 제목을 가린 뒤, 책 속 문장으로 소개하고 포장해두며 시작한 이벤트다. 손님들 반응이 좋았고, 꾸준한 문의가 있어 올해부턴 분기별로 진행하고 있다.
“비밀책을 사는 사람들은 또 사시더라고요. 우리가 추천해주는 책을 믿고 사주는 분들이 있다는 게 감사하죠. 추천을 잘한다는 느낌을 받으시면 좋겠어요. 나랑 결이 잘 맞는 책을 찾고, 그 직원이 추천한 책은 나랑 정말 잘 맞아, 그래서 ‘이 서점은 나랑 잘 맞구나’ 생각하는 장치가 되면 좋겠어요. 직원 추천 도서를 믿고 살 수 있는 서점이 되면 좋겠어요.”
비밀책 외에도 또 해보고 싶은 이벤트가 있는지 궁금했다.
“다른 서점에서도 한 것 같은데, 여름에 홍익문고에서 밤새 책 읽는 프로그램이나, 1박 일정으로 책 속에 숨겨진 쪽지를 찾는 이벤트를 해보고 싶어요. 재밌을 것 같아요.”
특히 좋아하는 손님의 유형이 있는지도 물었다.
“정확한 책 제목이나 사진으로 질문하는 분 좋아해요. 간혹 유튜브나 TV에서 어떤 박사님이 말한 책이라는 정보만 가지고 질문하시는 분도 계세요. 이 부분도 찾아드릴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질문하셔도 좋아요. 근데 센스 있게 정확한 정보로 질문하시는 분들이 오시면 확실히 편하죠. 또, 말투에서 친절함이 느껴지는 분들 좋아해요. 기본적인 어조나 카드를 줄 때 등 사소한 행동에서 예의가 느껴지는 분들이 있어요.”
만남의 장소, 서점
“30년 후의 홍익문고, 상상해보신 적 있어요?”
“크게 바뀔 것 같지 않은데요. 물론 지금도 전에 비해 서점 규모가 작아졌다거나, 판매 부수가 줄어드는 등 변화는 있죠. 그런데 가끔 손님이 오셔서 몇 년 단골이다, 몇십 년 단골이라고 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계속 이 자리에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사장님도 이어가겠다고 하셨으니까. 직원들이 늙어갈 뿐이지. 하하하.”
영미 님은 홍익문고가 사람들 곁에 늘 있는, 뭘 찾더라도 가서 볼 수 있는 공간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 손님이 찾으시는 건 성실히 들여놓겠다는 다짐을 전한다.
“이곳을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이 여기에 서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신촌역을 허다하게 지나다녀도 홍익문고를 모르는 사람도 있으니까. 여기가 전에는 만남의 장소였어요. 서점 벽에 메시지를 붙이고 가기도 했고, 친구를 기다리는 장소로도 통했죠. 책과 만나든 사람과 만나든, 이곳이 계속 누군가와 만나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체력이 허락하는 한 서점 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영미 님을 보면서, 시간을 잘 보내는 법에 관해 생각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일을 성실한 반복으로 채워가는 게 그 시작이 아닌지. 솔직히 시간 도둑을 만나면, 매번 불안해져서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속도 내기 바빴다. 근데 차분히 함께 걸어가는 방법도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영미 님은 더 훗날 시골에 서점을 하나 차려서 사람들이 쉬었다 가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어려운 일이겠지만, 영미 님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그냥 편안한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와서 마음 편해지는 공간이 가장 좋은 것 같아요. 지치고 힘들어서 어딘가 찾아간 거니까. 그 공간에서 마음이 좀 채워지고, 그러면 좋겠어요.”
장진경
본지 객원기자. 독립서점 매니저, 오래된 서점 직원, 논술 강사로 일한 경험이 있다. 오랫동안 서점을 운영하셨던 할아버지처럼 훗날 서점을 열고 싶다. 할아버지처럼 책만 파는 서점을 열 수 없을 것 같아, 다양한 형태의 서점을 고민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