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호 책과 사람]

 ⓒ복음과상황 여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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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17초. 한 사람이 미술관에서 작품 한 점을 감상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라고 한다. 설마 그렇게까지 짧을 일인가 싶었으나, 돌이켜보건대 나는 광활한 루브르박물관도 반나절에 뚝딱 해치우고 나온 사람 아니었던가. 심지어 〈모나리자〉도 나를 1분 이상 붙잡아두진 못했다. 그마저도 오롯한 감상 대신 인증샷을 찍는 데 썼으나, 불행히도 그 사진은 2년 넘게 눈길조차 받지 못한 채 휴대폰 앨범 안에서 자고 있다.

‘우리는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고 있을까?’ 《최주훈의 명화 이야기 - 보는 것에서 읽어 내는 것으로》(비아토르)는 이 질문에서 시작한다. 제목만 보면 평범한 명화 해설집 같지만 막상 펴서 읽으면 루터신학에 명화를 곁들인 ‘설교집’ 내지 ‘묵상집’에 가깝다는 사실을 금방 눈치챌 수 있다. 그래서 실망했냐고? 아니, 오히려 좋다. 이거 완전 럭키비키다. 저자가 루터교 목사이자 신학자라는 점이야말로 이 책의 특장점이다. 명화들을 매개로 루터신학 핵심 개념들과 프로테스탄트 영성을 유려하게 풀어내는 저자의 글을 읽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더 본질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된다. ‘교회는 어떠해야 하는가?’ ‘우리는 복음의 정신에 따라 살고 있는가?’ 그림이 던지는 신학적 질문을 읽어내고, 화가와 우리 사이에 시대를 초월해 공유되는 교회를 향한 문제의식을 끌어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림을 읽는 방식이 아니라, 개신교 신앙과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제대로 읽는 방식을 알려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 최주훈 목사(중앙루터교회 담임)를 4월 1일 중앙루터교회에서 만났다. 그는 ‘17초’를 극복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했지만, 그 위트 뒤에 숨겨진 ‘진짜’ 목적은 분명 다른 데 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저자가 부제 뒤에 숨겨둔 부분이 ‘볼드체’로 읽힌다. “보는 것에서 읽어 내는 것으로”, 마침내 살아내는 것으로. 그림을 보기만 하지 말고, 우리 신앙인들과 교회를 향한 각성의 메시지로 읽어내자는, 그것을 일상에서 실천하며 거룩한 성찬 공동체로 살아내자는 초대장. 이것이 저자의 진짜 의중일 것이다. “귀중한 것은 숨겨져있다.” 최 목사가 인터뷰 도중 알려준 루터의 말이다. 그가 뭘 더 숨기고 있는지 인터뷰를 통해 유추해보자.

ⓒ복음과상황

- 새 책 《최주훈의 명화 이야기》를 출간하셨습니다.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요.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루하루를 보내는데요. 저에게는 이런 일상이 가장 귀한 것 같아요. 특히나 요즘은 일상이 깨지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시기가 아닌가 싶어요.

- 서문에 인상 깊은 ‘17초’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17초를 넘어서는 게 이 책의 저술 목적이라고도 하셨고요.

출판사에 원고 넘긴 지가 오래돼서 내용을 다 잊어버렸는데요.(웃음) 사람들이 미술관에서 소위 ‘걸작’이라 불리는 그림 하나를 감상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평균적으로 17초에 그친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어요. 그림을 제대로 본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짧은 시간이죠. 사실 그림 감상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상징과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에 가까워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그림도 아는 만큼 보이게 마련이고요. 제가 그림 전문가는 아니지만 목사이자 신학자로서 그림을 읽어내는 다양한 관점 중 한 예를 보여드릴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책을 보시는 분들은 저의 해설과 함께 명화를 적어도 17초, 그 이상은 감상하실 수 있을 거예요.

- 목사님 주요 저서를 보면, 대개 익숙한 것을 다시 생각해보고 ‘질문’을 던지는 데서 시작하는 것 같아요. 《루터의 재발견》(복있는사람)이나 《예배란 무엇인가》(비아토르)도 그랬고요. 이번 책도 ‘우리는 정말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는 걸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우연의 일치일까요, 목사님의 성격 내지 삶의 자세에서 기인하는 걸까요.

성격인 것 같아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성서를 읽고 목회를 하면서 느낀 것이 투영된 것 같기도 하고요. 저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를 가장 좋아하는데요. 밭은 사람들이 매일 무심코 지나다니는 장소잖아요. 그런데 그 밑에 보화가 숨겨져있다는 걸 아무도 몰라요. 자세히 들여다보거나 질문과 상상력을 갖고 파헤쳐보기 전까지는 말이죠. 우리가 일상에서 그냥 지나치는 것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익숙한 것들 속에는 사실 무한한 의미와 가치가 숨겨져있어요. 아까 근황을 질문하셨을 때 매일의 일상이 귀하다고 말씀드린 것도 그런 맥락이에요. 익숙한 것도 다시금 들여다보고, 질문을 던져보는 습관이 중요한 것 같아요. 루터도 “거룩한 것, 가장 귀한 것은 숨겨져있다”고 말하거든요. 그런 부분이 제가 책을 여는 데 공통적 요소로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복음과상황 여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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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갖게 되신 건가요.

연이은 두 장면이 떠오르는데요. 2007년 독일에서 열린 ‘교회의 날’ 행사에 통역으로 참가했다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로마를 들렀어요. 더운 날씨를 피해서 우연히 들어간 성당 한쪽 벽면에 웬 그림이 걸려있었는데,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더라고요. 알고 보니 동전을 넣으면 30초 동안 조명이 환하게 켜져서 감상할 수 있게 만든 거였어요. 나중에 옆에 있던 외국인 관광객이 동전을 한 움큼 쥐고 하나씩 넣어가며 오래 감상을 하더라고요. 엉겁결에 옆에 서서 보는데, 조명이 켜지면서 그림이 드러나는 순간 심장이 멎는 듯한 경험을 했어요. 그런 감정을 느끼는 스스로가 너무 놀랄 정도로 압도당했죠. 당시로서는 그림에 대한 지식이나 관심이 전혀 없었는데도, 그 생각이 하루 종일 마음을 사로잡고 떠나지 않았어요.

그 후 오스트리아 빈을 경유했는데요. 환승 시간까지 여유가 있다 보니 항공사에서 예술사 박물관 무료입장권을 제공해줬어요. 박물관의 웅장한 규모나 관람객들의 여유로운 분위기도 인상적이었지만, 역시나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그림 한 장이었어요. 로마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림 앞에서 압도당하는 일종의 종교적 체험을 했죠. 한국에 돌아와 찾아보니, 로마에서 본 것은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의 〈다메섹 도상의 회심〉(259쪽)이었고, 빈에서 본 것은 예술사 박물관의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247쪽)이었습니다. 둘 다 카라바조 작품이었고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기 시작했죠.

- 그림에 대한 관심을 넘어서 그림을 해설하는 책까지 쓰셨는데요.

서양미술사를 혼자 공부하다가 느낀 게 있어요. 대부분은 작품의 구도, 색채, 기법, 화가의 일생 같은 예술적 관점에서만 명화들을 다루더라고요. 생각해보면 서양미술, 특히 근대 이전 미술들은 사실상 교회와 기독교 세계를 배경으로 나온 것들이잖아요. 예술적 차원을 넘어 그 자체로 기독교의 신학적·역사적 차원을 가득 머금은 그림들인 거죠. 실제로 명화들은 당대 교회를 향한 예언자적 문제의식을 여러 상징에 암호처럼 담고 있기도 하고요. 이런 부분들은 신학자나 목사들이 다른 관점에서 더 풍성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신학을 모르는 사람도 시각적 요소들을 통해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고요. 시대를 넘어 신학적·문화적 대화의 장으로 초청할 수 있는 도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림 한 장으로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 설교에 활용하기도 좋겠더라고요. 틈틈이 공부하면서 자료들을 남겼죠. 교회에서 점심 애찬을 나눈 이후에 자투리 시간에 ‘15분 명화 이야기’를 진행하기도 했고요. 메모와 설교와 기고문 등이 쌓이다 보니 어느새 책으로 내도 될 만큼 양이 많아졌어요. 그 원고가 좋은 기회를 만나서 책으로 엮여 나온 거예요.

- “성화(聖畫)는 글을 모르는 이들을 위한 성서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성화의 교육적 목적을 강조하면서 남긴 유명한 말이죠. 루터의 경우, 라틴어를 모르는 독일인들을 위해 자국어 성서를 직접 번역했잖아요. 그런데도 다른 종교개혁자들과는 다르게 여전히 성화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단순히 그레고리우스 1세의 논리를 답습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루터만의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루터에게는 생각보다 간단한 이유였을 거예요. 목적은 하나, 메시지를 어떻게 잘 전달할 것인가. 성서의 메시지만 잘 전달된다면 어떤 매체든지 활용할 수 있다는 거죠. 매체에 대한 루터의 남다른 감각은 당대의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조금 차별화되는 부분인데요. 루터는 그림뿐 아니라 음악도 적극 활용했어요. 일례로 성가대와 그레고리오성가 중심이었던 교회 음악을 회중에게 돌려주고 시편 찬송과 대중 찬송(choral)을 도입한 것도 루터의 공이었고요. 보통 루터의 ‘성서 번역’이 종교개혁에 가져온 파급력에만 집중하는데요. 당시에 ‘판화’ 제작 기술이 없었다면 그 정도 성공은 불가능했을지 몰라요. 루터의 사상을 직관적으로 표현해낸 판화 인쇄물이 매우 큰 역할을 했죠. 제가 루터를 “지라시로 성공한 세계 최초의 인물”로 평하는 이유입니다. 이처럼 다양한 매체에 열려있는 모습은 루터의 종교개혁 원리 중 하나인 본질과 비본질(adiaphora)의 문제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해요. 목표가 분명했기에 수단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거죠. 말하자면, 그레고리우스 1세가 이야기했던 요소를 루터는 자신만의 콘텍스트에서 매체 활용을 통해 잘 실현했다고 볼 수 있어요.

- 책에서 긴 논문이나 설교보다 그림 한 장의 힘이 더 강하고, 그림 잘 그리는 화가가 목사보다 낫다고 강조하셨는데요. 루터도 이 말에 동의했을까요.

우리가 쉽게 접근하고 의미를 발견해낼 수 있다면 그 그림 한 장은 목사의 장황한 말로 이루어진 어떤 설교보다 좋죠. 저는 루터도 이 말에 충분히 동의하지 않을까 싶어요.

- 중앙루터교회 주보 1면에 늘 종교화를 넣는 이유가 그건가요.(웃음)

맞아요. 그러니 제 설교에 실망하시더라도, 그림과 성찬에서 은혜를 받고 돌아가십시오.(웃음)

-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하셨지만, 저는 이 책을 보면서 “보고 싶은 것을 본다”라는 말이 좀 더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정적인 의미로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그게 이 책의 강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목사님께서 루터교 목회자이자 신학자이기 때문에 보이는, 혹은 의도적으로 보는 게 있다고 느껴졌어요. 어쩐지 화가 선정도 독일 위주인 것 같았고요.(웃음)

맞아요. 사람은 누구나 보고 싶은 것을 보죠.(웃음) 저도 제 삶의 배경을 무시할 수는 없어요. 일단 수많은 명화 중에 제가 일부를 선정한 거잖아요. 거기서부터 이미 제 해석이 들어간 거고요. 어쩔 수 없이 제 관점과 틀 안에서 보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이 책은 정답지가 아니라는 것을 꼭 알아두셔야 해요. 다만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 하는 예시 정도로 여겨주시면 좋겠어요. 저는 루터교 목사로서 이 그림을 이렇게 보지만, 다른 교단 목회자 혹은 평신도, 신학생들이 보는 입장은 또 다를 수 있거든요. 그림이든 성서든 각자의 입장에서 매우 다양한 각도로 풍성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아는 만큼 보인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림은 아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이야기를 걸어와요. 저도 오래전 카라바조 작품을 통해서 전혀 모르는 세계에 압도당하고 그 세계와 만난 거잖아요. 선지식 여부와 상관없이 전혀 다른 세계가 불쑥 나를 만나러 오는 가능성을 그림에서 봤어요. 그런 의미에서 그림은 새 지평을 열어주고,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창문이기도 하죠.

- 루터신학과 개신교 영성에 비춰 본 명화 해설서 겸 설교집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여러 그림에서 권위주의적인 중세 가톨릭교회를 향한 비판, 그와 비교되는 프로테스탄트 정신의 차별성을 읽어내는 지점도 엿보이고요.

맞아요. 이를테면, 르네상스 시대로 넘어가면서 부쩍 예수의 신성보다는 인성을 강조하는 그림이 많아지는데요. 이건 루터교 목사인 제 눈에 일차적으로 당대의 권위주의적이고 부패한 가톨릭교회를 겨냥한 작가들의 비판으로 읽히죠. 화려함이 아니라 평범함 안에서 비범함과 거룩함을 찾으려는 종교개혁 정신으로 보이고요. 이걸 꼭 중세 가톨릭교회에 국한해서 생각해야 할 필요는 없어요. 그 해석을 당장 오늘날로 가져와도 남의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지금 여기서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한국 개신교회의 적나라한 모습으로 보여요. 루터만 해도 내부 비판을 굉장히 많이 한 인물이에요. 16세기 종교개혁으로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루터가 꿈꾸던 대로 됐느냐, 절대 그렇지 않거든요.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퇴보한 경우도 있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끊임없는 내부 성찰이 중요합니다. 종교개혁도 일차적으로 외부가 아닌 내부를 향한 개혁, 말씀에 비춰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자성의 개혁이었어요. ‘우리는 본질로 돌아가고 있습니까’ ‘말씀으로 돌아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제대로 살고 있습니까’…. 루터는 죽을 때까지 이런 질문거리를 안고 살았어요. 우리가 오늘날 일상을 살아가면서 늘 던져야 하는 질문이기도 하고요.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최후의 만찬〉(1630-1631)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최후의 만찬〉(1630-1631)

- 그림 해설을 통해 ‘말씀 선포, 죄 용서, 만인제사장, 양형 성찬, 공적 참회’ 등등 수많은 신학 개념도 설명해 주시는데요. 그중 ‘매일 세례’와 ‘일상 속 성찬’만큼은 꼭 소개해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개념 모두 ‘일상’이 핵심 키워드라고 할 수 있겠네요. ‘매일 세례’는 루터의 《대교리문답》에 나오는 개념인데요. 세례는 일생에 단 한 번 받는 예식이지만, 세례받은 신자는 매일의 일상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는 ‘갱신’의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해요. 개념적으로 그대로 상응하지는 않겠지만, 개혁교회의 ‘성화’ 개념과 비슷하게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일상 속 성찬’은 교회 공동체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개념인데요. 이 책에는 성찬에 대한 그림이 특히 많이 담겼어요. 다양한 그림이 있지만 사실 다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고요. 일례로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최후의 만찬〉(159쪽)을 살펴보면요. 예수님이 성찬을 제정하며 감사 기도를 드리고 계신데, 열두제자들의 시선이 다 엇갈려요. 다들 엉뚱한 곳을 쳐다보고 있거든요. 그런 중에 식탁 밑에는 탐욕스러운 개가 고깃덩어리 하나를 물고 감상자를 바라봐요. 맨 앞에 앉은 배신의 아이콘 가룟 유다도 감상자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싶어 하죠.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당신은 이 중 어느 자리에 있습니까’ 하면서 우리를 그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이는 거예요. 교회가 ‘거룩한 성찬 공동체’라지만, 그 안에는 매우 다양한 사람이 있어요. 그에 걸맞지 않은 사람도 많고요.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다 아시면서도 모두를 용서하시고 자기 몸을 그들을 위한 밥으로 내어주셨죠. ‘일상 속 성찬’이란, 성찬으로 힘을 받은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가난한 이들, 자격 없는 이들, 소외당한 이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 루터신학과 교회를 향한 이상을 가장 잘 담아내고 있는 그림은 단연 〈비텐베르크 제단화〉(309쪽)이겠습니다만, 그것을 제외하고 이 책에 담긴 그림 중 딱 하나만 꼽아서 소개해 주신다면요.

비텐베르크 제단화는 다른 데서도 워낙 많이 얘기했죠.(웃음) 오늘의 시대를 잘 비춰주는 그림 중 하나를 소개할게요. 책 마지막에 있는 〈시에나 시청사 9인의 방 벽화〉인데요. ‘선한 정부와 악한 정부의 알레고리’를 표현한 그림이에요. 아마 한국에는 많이 소개가 안 되었을 거예요. 이건 단순히 정부에 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교회에 대한 이야기, 우리 일상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어요.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는 책을 읽어보면 알게 될 겁니다. 선한 정부와 악한 정부의 벽화가 대조되는데, 거기 담긴 부분들을 감상해보면, 단순히 ‘정부’에 대한 그림이 아니에요. 우리가 몸담은 모든 공동체, 그러니까 교회나 직장, 학교, 심지어 가정이라는 공동체가 모두 함께 고민할 지점을 읽어낼 수 있을 겁니다.

암브로지오 로렌체티의 〈시에나 시청사 9인의 방 벽화〉(1338-1339)에서 ‘악한 통치의 알레고리’ 부분. 프레스코 아래쪽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고 한다.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 추구하기에 이곳에선 폭정이 정의를 짓누른다. 그렇기에 이곳으로 가는 길에선 누구나 목숨의 위협을 느끼게 될 것이다. … 도시 성문 안팎은 강도들이 날뛴다.”(357-358쪽)
암브로지오 로렌체티의 〈시에나 시청사 9인의 방 벽화〉(1338-1339)에서 ‘악한 통치의 알레고리’ 부분. 프레스코 아래쪽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고 한다.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 추구하기에 이곳에선 폭정이 정의를 짓누른다. 그렇기에 이곳으로 가는 길에선 누구나 목숨의 위협을 느끼게 될 것이다. … 도시 성문 안팎은 강도들이 날뛴다.”(357-358쪽)

- 요즘에는 ‘악한 통치의 알레고리’가 전혀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습니다. 루터신학은 악(惡)을 어떻게 규정하나요.

루터는 인간의 세 가지 큰 적으로 죄, 마귀, 죽음을 언급해요. 악의 3대장인 셈이지요. 루터의 글을 읽다 보면, 거의 관용구처럼 이 셋이 등장합니다. 죄는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로 보고요. 이걸 ‘원죄’라고도 하지요. 마귀는 인간을 하나님에게서 지속적으로 분리시키려는 유혹과 힘으로 설명해요. 루터는 인간을 ‘의인인 동시에 죄인’으로 정의하는데, 그리스도의 구원을 신뢰하는 사람이라 해도 이 땅에 사는 동안 악의 유혹과 대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다른 말로는 ‘영적 전쟁’이라고도 하죠. 그러면서 하는 말이 “마귀는 하나님의 사슬에 묶인 개”라고 표현해요. 마귀도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다는 표현이겠지요. 마지막에 언급한 ‘죽음’은 죄의 결과예요. 루터는 이 죽음을 영적 죽음(하나님과의 분리), 육체적 죽음, 영원한 죽음(지옥)으로 구분하기도 하죠. 죄와 악의 증상이 있어요. 루터 말대로 하면 ‘모든 것을 자기에게 구부러뜨리는 힘’인데요. 이걸 이기는 방법은 당연히 믿음, 말씀, 은총이죠. 이 셋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자와 손을 잡게 합니다. 그 타자가 누구냐면, 우선은 그리스도이고, 다음은 이웃이에요. 선한 정부와 악한 정부의 알레고리 벽화에서 화합의 여신이 나와요. ‘콘코르디아’(concordia)라는 여신인데, 그 이름이 ‘마음을 모은다’라는 뜻이에요. 우리 마음이 하나님과 이웃에게 연결될 때 비로소 악을 이길 수 있다는 게 루터의 이해라고 할 수 있죠.

-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그리는 이상적 공동 체의 모습을 “살아 있는 힘을 지닌 거룩하고 선한 사귐의 공동체”(370쪽)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는 정반대로 ‘헛된 힘을 추구하는 세속적이고 악한 야합의 무리’ 정도로 전락해버린 것 같습니다. 특히나 세속 권력을 위해 복무하는 모습도 많이 보이죠. 이런 모습은 루터가 말하는 두 왕국론과도 배치되는 것 같고요.

너무 아픈 지적이에요. 루터는 교회가 하나님 이름을 들먹거리며 정치권력화하거나 세속적 이익에 뛰어드는 것을 경계해요. 루터에게 교회의 진정한 힘은 권력이나 규모가 아니거든요. 모든 신자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서로를 섬기는 공동체가 교회예요. 루터가 오늘 대한민국에 와서 설교한다면, 아마 ‘그리스도인은 이웃에게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돈과 권력, 정치적 영향력에 올인하는 교회들을 질타했을 것 같아요.

- 이 책이 어떻게 활용되길 바라시나요.

이 책은 교인들을 위한 명화 해설서 혹은 성서 입문서라고 볼 수 있어요.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교인들과 함께 성서와 역사와 문화와 신학을 부담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발판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책이 예수님의 생애, 수난과 부활, 교회와 세상이라는 3부로 구성돼있어서 묵상집으로 사용해도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이 책에 실린 그림과 해설을 통해 오늘날의 교회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으면 좋겠어요. 여기서 다룬 그림들은 모두 풍성한 의미를 담고 있으니, 나름의 상상력과 질문을 가지고 그림을 읽어나가시길 바라요. 성서를 읽을 적에 그 안에서 메시지를 찾아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저는 이 책이 사명을 다했다고 봐요.

여운송
본지 객원기자. 총신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개신교 독립 언론 〈뉴스앤조이〉에서 편집기자로 일했다. 현재는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에서 성직 청원 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월간 그리스도교 서평지 〈엠마오〉의 기획위원으로도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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