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호 책과 사람] 《한국 기독교 세계관 READER》 펴낸 전성민 원장

본지 2023년 7월호 인터뷰 사진. 전성민 원장은 캐나다 밴쿠버 리젠트 칼리지에서 성서 언어(M.C.S.)와 구약학(Th.M.)을 공부했으며,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구약 내러티브의 윤리적 읽기’ 연구로 박사학위(D.Phil.)를 받았다. VIEW 원장으로 지내면서 세계관 및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본지 2023년 7월호 인터뷰 사진. 전성민 원장은 캐나다 밴쿠버 리젠트 칼리지에서 성서 언어(M.C.S.)와 구약학(Th.M.)을 공부했으며,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구약 내러티브의 윤리적 읽기’ 연구로 박사학위(D.Phil.)를 받았다. VIEW 원장으로 지내면서 세계관 및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기독교 세계관은 1970년대에 국내에 소개되어 1980년 이후 시기에 사회참여를 고민하는 한국의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공적 의미를 일깨워주었다. 진보적 복음주의 진영은 이 세계관 담론을 통하여 ‘운동’이라 할 만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2000년대 초 이 운동의 유효성과 다양한 맥락에 대한 논의가 치열하게 이어지다가 가라앉게 되었고, 20여 년이 지난 현재 한국 기독교 세계관은 국가주의·극우 이데올로기를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이론적 토대로 쓰이는 듯한 양상이다. 이런 상황에 ‘기독교 세계관은 대결의 세계관이 아니고 평화의 세계관’임을 강조해온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 전성민 원장이 1,200쪽이 넘는 벽돌책을 내놨다. ‘한국 기독교 세계관’의 지난 50년 역사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방향을 모색하는 책 《한국 기독교 세계관 READER–기억과 모색》이다. 보수화되면서 끊어진 개혁적 담론으로서 기독교 세계관을 되살리기 위해 편저자로 나선 그는 서른 명의 저자가 쓴 70여 편을 가려 뽑아 ‘한국 기독교 세계관’의 흐름을 자세히 분석 및 해설하고 세계관 운동의 미래를 모색한다. 이 책에는 특별히 2000년대 초 본지 지면을 뜨겁게 달구었던 기독교 세계관 논쟁도 원문으로 담겨있다.

3월 4일(한국 시각)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전성민 원장을 줌(Zoom)으로 만났다. 이 책을 중심에 놓고, 한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둘러싼 여러 물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 기독교 세계관이 어떤 식으로 원장님의 신앙 토대를 형성했는지 이야기해 주세요.

저는 1989년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10년도 안 된 해였어요. 1987년 민주 항쟁이 있었지만 이후 군사정권이 이어졌기에 대학가는 여전히 민주화 시기를 지나고 있었죠. 학과 신입생 환영회에서 만난 선배들이 시위하는 모습을 멀리서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에 가면 최루탄 냄새가 교정에 배어있던 시절이라, 대학 생활을 하면서 민주화를 둘러싼 사회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죠.

당시 교회 대학청년부 생활을 하면서 배웠던 건 신앙이 개인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회와 관계가 있다는 이야기였어요. 소그룹 성경공부 교재처럼 읽은 책 중에 ‘기독교 세계관’을 다룬 송인규 교수님의 《죄많은 이 세상으로 충분한가》(1984)가 있었습니다. 독서모임을 통해 미들톤과 왈쉬의 《그리스도인의 비전 - 기독교 세계관과 문화 변혁》(1987)을 읽기도 했습니다. 신앙 관심사가 개인 구원을 넘어 사회 영역까지 확장되었죠. 기독교 세계관은 저를 포함해 신앙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가 고민하던 사람들에게 탈출구였습니다.

그렇게 다져진 제 신앙의 중요한 토대가 무엇이었나 생각해보면, 평신도 삶의 중요성과 기독교 신앙의 공적 의미로 정리할 수 있겠네요. 달리 말해 평신도 신학과 복음의 공공성입니다. 대학 시절 사랑의교회를 다녔는데 당시 옥한흠 목사님의 목회 기조가 ‘평신도를 깨운다’였죠. 기독교 세계관이 성(聖)과 속(俗)의 분리 곧 이원론을 극복하자는 이야기잖아요. 여기엔 시간의 위계(주일/주중), 공간의 위계(교회/회사·집), 존재의 위계(목회자/평신도)를 극복하는 문제가 있죠. 내 일상이 결코 목회자와 비교해서 열등하지 않구나, 일상생활의 중요성을 일깨웠죠. 그것들은 넓은 의미에서 기독교 세계관의 주제였습니다.

이 책은 ‘시작을 선언하다–토대를 마련하다–논쟁이 펼쳐지다–방향을 모색하다–미래를 바라보다’라는 1-5부 구성으로 한국 기독교 세계관의 흐름을 소개한다. 각 부는 전성민 원장의 해설과 1차 문헌으로 구성되어있다. 1차 문헌은 1973년부터 2024년까지의 한국 저자들 글을 선별한 것이다. IVP와 한국교회탐구센터가 함께 만들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이 책은 ‘시작을 선언하다–토대를 마련하다–논쟁이 펼쳐지다–방향을 모색하다–미래를 바라보다’라는 1-5부 구성으로 한국 기독교 세계관의 흐름을 소개한다. 각 부는 전성민 원장의 해설과 1차 문헌으로 구성되어있다. 1차 문헌은 1973년부터 2024년까지의 한국 저자들 글을 선별한 것이다. IVP와 한국교회탐구센터가 함께 만들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 《한국 기독교 세계관 READER》는 한국 기독교 출판계에 생소한 ‘READER’ 형식의 책으로, 한국 기독교 세계관 담론을 정리합니다.

‘리더’(READER)는 특정 주제에 관한 읽을거리를 추려놓은 형식이죠. 서구권에서는 낯설지 않은 장르예요. 제가 한국 기독교 세계관의 흐름을 보며 나름 정리한 논지와 읽어낸 방식이 있는데요. 1차 문헌 없이 제 논점만 풀어내면 얼마나 적절한지 검증받기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1차 자료를 직접 제공해서 세계관 담론의 문제의식을 쌓아갈 수 있으면 좋겠더라고요. 독자들이 똑같이 1차 문헌을 읽고 나름대로 정리할 수 있도록 해서 주체적 판단을 촉발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1차 문헌을 충분히 읽을 수 있게 원문을 그대로 싣거나 길게 발췌하는 형식을 택한 거죠.

이렇게 책을 낸 목적은 ‘복각’ ‘발굴’ ‘주목’ 그리고 ‘토론’을 위해서예요. 이를테면, 앞쪽에 실린 손봉호·송인규·양승훈 교수님 글은 한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어떤 고민을 안고 시작했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1차 문헌입니다. 지금은 구하기가 어려운데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되살려놓아서 ‘복각’이에요. 그리고 한국 기독교 세계관을 이해하고 새로운 고민을 촉발하는 데 도움을 주는 글 중에 알려지지 않은 글을 무대에 올리는 측면에서 ‘발굴’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국운·김현준 교수님 글이 여기에 해당하죠. 또한 김동춘 교수님의 《전환기의 한국교회》(2012)에 담긴 글이나 뉴라이트 세계관의 발흥 배경을 탐구한 류대영 교수님 글 등은 ‘주목’하고 싶은 것들이었습니다. 김동춘 교수님 글은 기독교 세계관과 하나님 나라 운동의 신학적 토대를 논의하는데요. 한국 기독교의 패러다임을 분리형·변혁형·적응형 등으로 범주화해서 설명하고요. 한국교회 맥락에서 공적 신학으로서 기독교 세계관을 평가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방향이 요청되는지를 제안하는 글이에요. 중요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던 글을 많이 읽고,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촉발되어 ‘토론’이 활발해졌으면 좋겠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원문을 넣고 싶었지만 늦게 발견해서 해설로 언급하거나 ‘더 읽을 문헌’에 서지 사항만 담은 글도 있습니다. 책에 수록한 글 외에도 기독교 세계관 관련 주제들을 다룬 다양한 글이 많이 있었지만, 제가 연구자로서 기독교 세계관과 관련해서 논문이나 연구 작업을 할 때 어느 문헌까지 인용하고 싶을까를 기준으로 우선권을 주고 문헌을 선별했습니다. 물론 이 기준으로 보았을 때 수록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글이었지만 지면의 제한으로 아쉽게 수록하지 못한 것들도 있습니다.

- ‘서론’에서 수록할 글들을 다 결정했을 때 여성 저자의 글이 하나밖에 없어서 당혹스러웠고, 더 적극적으로 여성 저자의 글을 찾아보지 못한 데 대해 반성하시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는데요.

방금 말씀드렸듯이 당연히 기독교 세계관과 관련된 모든 글을 담아내지는 못했지요. 한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 50년의 역사를 가능한 한 잘 대표하려면 어떤 문건을 추려야 할까 고민했어요. 어떤 성격의 글을 모아야 ‘한국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제목이 정당할까 고심했죠. 거창하게 말해서 ‘메타 담론’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독교 세계관 글을 다 추려보면 여성 저자가 쓴 글이 꽤 많아요. 특히 구체적 각론, 예를 들어 기독교교육학이나 상담 영역에 많았어요. 총론이나 메타 담론이나 방법론을 다루는 이 책의 관심사와 결이 달랐던 거죠.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내용보다 ‘기독교 세계관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제게 더 근본적인 관심이었습니다. 변명하자면, 최소한 2000년대까지, 혹은 2010년대까지의 글 중 총론과 메타 논의나 방법론에 대한 여성 저자의 글은 찾지 못한 것 같아요.

비교적 오래된 과거의 글을 수록한 4부까지는 그렇다 쳐도, 포스트모던과 복음주의라는 주제를 다루고 세계관 개념 자체에 질문을 던지는 5부에는 적절한 논의를 쓴 여성이 더 있지 않겠느냐는 지적도 받았는데요. 5부는 기독교 세계관의 방향도 이야기하니까, 예를 들어 각론으로 풀어낸 여성주의 문제도 품을 수 있지 않겠냐는 질책이죠. 타당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약간 비겁한 책일 수 있어요. 아주 예리하게 개별 사안을 다루는 글은 없죠. 굳이 하나 있다면 창조과학을 다루는 글입니다. 한국교회의 혐오 이슈 중 논의의 진도가 많이 나갔기 때문인지 들어갈 수 있었네요. 다른 구체적 이슈를 담지 못하고 원론적 지점에서 멈추었다는 한계가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듯이 ‘메타 담론’이 주된 관심사였기에 자연스럽고 필요했던 한계인 것 같기도 해요.

그리고 이것이 ‘한국 개신교 세계관’이지 ‘한국 기독교 세계관’이냐고 묻는 분도 계셨어요. 정교회나 가톨릭 이야기는 없으니까. 미처 생각 못 했던 지점인데요. 정교회나 가톨릭 관점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방법론적으로 큰 그림 내에서 다룬 경우도 찾지 못했습니다.

- 《한국 기독교 세계관 READER》라는 제목은 ‘기독교 세계관’이 ‘한국’이라는 토양과 만나면서 형성하게 된 ‘한국적 기독교 세계관’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 세계관만이 갖는 독특성이 있다면요?

서양이나 세계 맥락에서 기독교 세계관은 근대주의나 근대성에 맞서 기독교를 보수적으로 변증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됐어요. 한국은 보수적 담론이 아닌 개혁적 담론으로 시작하여 1980년대 현실에서 기독교 신앙의 사회적 의미를 제시했죠. 당시 이 문제를 고민한 이들은 기독교 세계관과 하나님 나라를 두 개의 신학적 기둥으로 삼았습니다. 굳이 덧붙이면 로잔언약도 있죠. 로잔은 사실 세계 복음화 국제 대회이고 로잔 문서들은 전체적으로 보아 보수적 문건인데, 남미나 한국에서는 갑갑한 시대 상황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를 이야기하는 로잔언약 5항에 주목한 거예요. 이렇듯 보수적 기독교 담론들이 진보적·개혁적으로 이해되어 활용된 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한국적 특징이 아닐까 싶어요.

문제는 개혁적 고민을 안고 세계관 담론이 활용됐지만 원래 보수적 담론이라서 시간이 갈수록 보수화되기가 쉬웠던 것 같아요. 새로운 세대와 소통이 이어지면서 담론이 발전해야 했는데, 그 부분도 부족했고요. 우리 신앙이 종교적 영역뿐 아니라 문화·정치·경제와 관련이 있다는 큰 그림을 세계관 담론이 그려줬지만, 이와 관련한 논의를 펼쳤던 신학자들은 문화·정치·경제 영역의 정교한 논의를 좇아가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어요. 전문성이 없었으니까요. 반면, 문화·정치·경제 영역에 전문성이 있는 그리스도인 학자는 신학적 논의에 있어서는 미흡해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신앙과 학문의 통합이 이루어지려면, 둘 다 밀도 있게 할 수 있어야 해요. 이게 어렵다 보니 보수화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또 하나의 한국적 특징은 번역서에 의존하는 경향입니다. 어떤 책을 번역하느냐가 한국 기독교 세계관의 흐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거예요. 최근 세계관 담론을 외부에서 들여올 때 보수적 성향의 책들이 번역되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이름 아래 국가주의·극우 이데올로기가 대중화되어 문제가 발생하고 있죠.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번역하더라도 저자 입장과 책의 특성을 제삼자 관점에서 성찰해 비평적으로 소화해야 했지만 그런 작업은 거의 없었죠. 번역서들이 담고 있는 전문성·편파성에 대한 더 밀도 있는 고민이 필요했다고 봅니다. 사실 기독교 세계관이 이데올로기로 전락할 위험에 대한 경고가 2002년 복상 지면에서 벌어진 기독교 세계관 논쟁에도 담겨있어요. 문제는 논쟁이 어느 시점부터 끊어져 그런 문제의식이 한국의 자체적 담론으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점이죠.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 지점입니다.

- 요즘 한국교회에서 대중적으로 전파되는 세계관 담론의 특징은 구체적으로 무엇이라 보시나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말을 내걸고 활발하게 활동하는 유튜버가 있는데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무시하고 주일 신앙만 지키다 보니, 나라가 이 모양이 됐다면서 신앙의 일상적·신학적 의미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일상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은 옳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과 방향에 대해서 저는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 매우 많습니다. 이분이 얼마 전 세이브코리아 집회에 나가 연설했는데요. ‘배워야 지킨다’라는 구호를 외치더라고요. 책 읽기와 공부를 강조하는데요. 지성 운동을 빙자한 반지성주의라고 봐요. 제가 생각하는 지성적 작업은 자기 성찰적 능력을 길러가는 데 있어요. 나와 결이 맞지 않은 이야기를 통해서도 내 생각을 조정해나갈 수 있는 능력이요. 그런데 이분이 말하는 것은 자기 생각만 계속 강화해나가는 책 읽기죠. 이분 외에 식자층이나 목회자, 청소년·청년에게 대중적 메시지를 전하면서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극우 담론을 전파하는 통로 역할을 하는 분들도 계세요. 문제는 기독교 신앙으로 세상과 관계 맺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서, 내용으로는 이승만 국부론과 일방적인 우파 이데올로기를 담아낸다는 점이에요. 이것이 현재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번지는 가장 대중적인 모습이에요.

이분들은 기독교 세계관을 대결의 세계관으로 이해하고 있어요. 성경은 세상과 대결하는 내용으로만 가득 차있다고 생각하죠. 분명 대결적 요소가 성경에 나오기는 해요. 하지만 정말 성경 전체를 다 살핀다면, 대결로만 끝나지 않아요. 그것을 넘어서는 대화와 공존, 감사와 사랑과 겸손의 태도가 있거든요. 기독교 세계관을 이야기할 때 내세우는 ‘창조-타락-구속’ 프레임에서 타락을 부각하면서 세상과의 차이를 강조하다 보니, 늘 대결 기조로만 가지 않나 싶은데요. 정말 성경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전체를 제대로 읽어보자고 한다면, 평화·관용·적응의 이야기가 성경 안에 그득그득해요.

그래서 저는 ‘기독교 세계관은 평화의 세계관이다’라는 모토를 만들어 활동해왔죠. 저는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도록 신앙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첫 번째 역할이라고 생각하고요. 사람들과 대화하거나 세상과 만났을 때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큰 그림을 그려주는 것이 두 번째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기독교 세계관을 논할 때 내용을 무엇으로 채울 것이냐보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어때야 하는지를 신앙적·신학적·성경적으로 만들어주는 흐름이 더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본지 2020년 8월호 인터뷰 사진. ⓒ복음과상황 정민호
본지 2020년 8월호 인터뷰 사진. ⓒ복음과상황 정민호

- 세계관 담론을 내걸고 극우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것은 신칼뱅주의 연장선상에서 탄생한 철학적 담론으로서 기독교 세계관이 갖는 한계와, 보수적 개혁주의 신학이 위세를 떨치는 한국 교계 상황을 고려할 때 필연적인 결과이지 않았겠나 싶은 생각도 드는데요.

한국에 보수적 개혁주의 신학이 위세를 떨친다고 말씀하셨는데, 사실 한국에서 말하는 개혁주의 신학은 세계적 스펙트럼에서 정의하는 보통의 개혁주의와 다릅니다. 신칼뱅주의와도 다르고요. 근본주의 신학 또는 보수적 신학이라는 표현이 정확한 것 같아요. 흥미롭게도 한국 개혁주의는 여러 측면에서 재세례파 느낌이 강해요.

보통의 개혁주의는 ‘창조-타락-구속’ 중 창조를 매우 강조합니다. 알버트 월터스 교수님의 책 《창조 타락 구속》의 원제목도 ‘Creation Regained’(회복된 창조)잖아요. 신칼뱅주의자 리처드 마우와 재세례파 존 하워드 요더가 논쟁을 벌였을 때, 이 세상은 타락했지만 하나님이 창조한 곳이라고 강조했던 것이 마우의 견해였고요. 하나님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했지만 타락했다고 강조했던 것이 요더의 견해였죠. 한국 개혁주의는 창조보다 타락을 강조해요. 보통의 개혁주의라면 창조를 강조하니까, 보수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세속화 신학이 될 위험성이 있어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선한 창조로 긍정할 수 있으니까요. 보수화할 가능성보다는 세속화로 넓어져서 대화를 추구하고, 더 나아가면 다원적으로 흐를 가능성도 있는 신학이에요.

보수적 신학이 위세를 떨치는 한국 교계 상황을 고려해서 보면, 세상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사실을 세계관 담론이 알려줬지만 어떻게 관계를 맺을지가 훈련되지 않은 셈이죠. 세상을 읽고 소통할 능력이 없는 상태로 세상에 들어가면요. 기독교 왕국을 전제한 정복주의·승리주의 입장에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것을 보수화 현상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어요. 기독교가 힘이 있으면 세상과 만났을 때 세상을 정복해버리고 싶어 하고요. 힘이 없으면 스스로 보호막을 칩니다. ‘정복’과 ‘보호’의 태도가 특징이죠. 대화를 나누기 위한 태도나 지식이 갖춰지지 않은 채로, 준비 없이 세상과의 만남이 이루어진 경우라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 앞서 1980년대에 한국 기독교 세계관이 개혁적 담론으로 시작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진보적 복음주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젊은 그리스도인 중에서 당시의 논의를 보면서 ‘생각보다 개혁적이지 않다’라고 비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비판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나요?

그런 평가가 옳다고 봅니다. 다만, 그렇게 비판하는 젊은 세대가 오늘날의 사회문제에 더 예민하고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게 한 뿌리는 기독교 세계관을 토대 삼아 신앙의 사회적 의미를 탐구했던 위 세대의 작업에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위로 내지 변명해보고 싶어요.

기독교 세계관을 이야기한 첫 세대는 이원론을 극복하는 데 에너지를 다 썼어요. 첫 세대가 깔아둔 토대가 있어서 다음 세대인 저 같은 사람들이 조금 더 발전된 이야기, 즉 세상의 구체적 영역에 대한 세계관적 고민을 할 수 있었어요. 이런 논의들이 없었다면 복음주의적 신앙의 토대에 서있는 분들이 구체적인 사회문제 하나하나를 고민하는 지점까지 올 수 있었을까 싶거든요. 기존에 쌓인 논의가 갖는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좋은 의미에서 위 세대를 비판해야 그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동시에, 어떤 씨름의 과정을 거쳐서 지금 젊은 세대가 하는 고민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는지 살펴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쉬운 예를 하나 들자면요. 위 세대는 시위할 수 있냐 없냐 정도 문제를 로마서 13장을 갖고 논하면서 기존 신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세대였으니까요. 갑갑할 수 있지만, 이것을 극복했기에 복음이 사회적 함의를 갖는다는 인식이 지당한 이야기가 되어, 이제 이 사회적 함의를 지닌 복음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지 고민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전성민 원장의 저서들. 그는 《특강 여호수아》를 다음 책으로 준비하고 있으며, 《세계관적 설교》 개정판 작업도 하려고 한다. 세계관을 접목해서 구약신학을 풀어내는 책 등, 다수의 책에 대한 장기 집필 계획이 세워져있었다.
전성민 원장의 저서들. 그는 《특강 여호수아》를 다음 책으로 준비하고 있으며, 《세계관적 설교》 개정판 작업도 하려고 한다. 세계관을 접목해서 구약신학을 풀어내는 책 등, 다수의 책에 대한 장기 집필 계획이 세워져있었다.

- 12·3 계엄 이후 ‘탄핵 반대’ 집회의 중심에는 전광훈과 손현보 목사가 있는데요. 이들은 기독교 세계관적 이론을 바탕으로 극우 담론을 확산하고 있습니다. 갈수록 교회는 쪼그라들고, 이런 이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이 절망적이기도 한데요. 여전히 기독교 세계관을 논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기독교 신앙과 세상이 만났을 때 극우적이거나 기독교 국가를 추구하는 방법 외에, ‘평화의 세계관’과 같은 다른 이야기도 있다는 담론을 충분히 퍼뜨려서 전파할 수 있다면 의미 있는 대안이 되리라 봅니다. 우경화된 기독교 세계관과 다른 기독교 세계관적 논의를 성장시켜서 극우 기독교가 잦아드는 흐름이 생기면 좋겠는데요. 당장은 비관적이에요.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극우적 기독교 세계관의 목소리가 더 팽창하지 않을까 싶어요.

한국 기독교 복음주의 흐름 내에서 의미가 있었던 이 담론이, 이렇게나 왜곡되어 기독교에 해를 끼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서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개념을 지키고 싶은지도 모르겠어요. 문제는, 앞서 말씀드린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진정 지성 운동이라면 가져야 할 자기 성찰적 성격 때문에 제가 추구하는 방식으로는 일방적인 주장을 하기가 힘듭니다. 나도 틀릴 수 있고, 너의 말이 완벽하게 틀린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열어놓고 자기 성찰적 태도로 대화해야 한다는 것이 제가 추구하는 기독교 세계관의 방법론적 특성이자 한계예요. 제가 생각하기에 아무리 바람직하지 못한 왜곡된 기독교 세계관 흐름이라고 하더라도 마냥 비판만 할 수는 없는 거죠. 어떻게 하면 다른 생각을 존중하면서도 무책임한 양비론이나 양시론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이것이 저의 고민입니다.

저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이름을 꼭 지켜야 하느냐고 누군가가 물음을 던지면,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기는 해요. 다른 좋은 이름이 있다면, 그것을 내걸어도 되죠. 서양은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명칭에 미련을 덜 갖는 것 같아요. 서양 신학교에서는 기독교 세계관을 ‘너무 지성적인 데만 매몰된 담론’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죠. 그런데 한국 상황에서 이 명칭을 놓아버리면, 극우 이데올로기 담론이 기독교 세계관으로서 한국교회에 번져나가 더는 견제할 수 없게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이름을 포기하지 못하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진행 강동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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