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호 대안 언론가 함석헌 읽기]

본 연재는 본지 400호 기념 ‘연재 기획 공모전: ‘복음’과 ‘상황’을 잇다’ 우수상 수상작입니다.

함석헌과 언론

함석헌은 1901년에 태어나 1989년에 별세했다. 20세기, 우리 민족의 굴곡진 역사를 오롯이 살아낸 한 개인이자, 사회와 종교에 사상적으로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독립운동가·종교인·언론인·출판인·사회운동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고, 미국 퀘이커 세계 봉사회가 노벨평화상 후보로 두 번(1979·1985년) 추천하기도 했다. 이번 연재를 통해 언론인으로서의 함석헌에 초점을 맞추고 그와 관련한 언론의 대안적 기능을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함석헌이 밀접하게 관계 맺은 세 언론, 〈성서조선〉·〈사상계〉·〈씨알의소리〉가 당대에 어떤 기능을 했는지, 그가 맡은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알아보려 한다. 함석헌의 언론관을 바탕으로 우리 시대 언론도 성찰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진행할 글의 개요

연재 글은 함석헌이 관계 맺었던 세 언론을 따라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총 여섯 번 싣는다. 첫째는 〈성서조선〉이다. 1927년. 김교신·함석헌·정상훈·송두용·양인성·유석동 6명이 동인이 되어 만든 잡지다. 창간호는 국판 44면에 발행 부수가 300권도 채 안 되었지만, 영향력만큼은 작지 않았다. 〈성서조선〉은 일제로부터 끊임없이 감시에 시달렸다. 폐간 위기도 여러 번 맞이했다. 그러다가 1942년 김교신이 쓴 시 〈조와〉(弔蛙, 개구리를 애도함)를 문제 삼아 강제 폐간시켰고, 관련자들을 구속했다. 함석헌도 감옥에 간다.

〈성서조선〉은 그 이름처럼 성서의 정신을 계승하고, 조선인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잡지였다. 함석헌은 잡지가 발행되는 동안 50회 넘게 성서 또는 기독교와 관련한 글을 쓴다. 그러나 단순히 성서 주석이나 교훈을 주고자 하는 설교의 형태가 아니었다. 어두운 삶의 현실에 직면하고, 성서의 사람으로 살되, 철저한 조선인이 될 것을 촉구하는 글이었다. 대표작 《뜻으로 본 한국역사》(처음 제목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역시 〈성서조선〉에 연재했던 글이다.

특히 1920-1930년대는 ‘문화통치’ 시기로 집회와 결사, 출판의 자유가 제한적으로 허용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여러 방면에서 한국인의 정신을 누르고, 경제적 수탈을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조선인들의 삶에는 점점 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함석헌은 〈성서조선〉을 통해 그 어두운 그림자에 직면한다. 누르고 짓이겨도 계속해서 글을 쓴다. 일본 경찰들이 “너희 같은 것들이 가장 악질이다”라고 할 만큼, 붓과 정신으로 이루어낸 저항은 일제에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해방 후 함석헌은 줄곧 시를 쓴다. 글을 발표할 매체도 없었을뿐더러, 이북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감옥살이를 했다. 또한 진정한 의미의 ‘독립’에서 어긋날 해방을 맞이하여 남과 북으로 찢긴 민족의 아픔에 이성적인 글을 쓸 수 없었다. 이 시기 함석헌은 어떤 시를 썼으며, 그 시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살펴본다.

둘째는 〈사상계〉이다. 1953년 장준하가 창간한 이 잡지는 당시 정부를 대변하는 어용 언론들에 대한 대안으로 세상에 나왔다. 정부가 저지른 잘못을 ‘비판’하지 못하고 ‘비호’하는 언론이 주류였던 시기에 〈사상계〉는 민중에게 숨 쉴 틈을 제공했다. 함석헌은 장준하에게 초대받아 1956년부터 이 잡지와 함께한다.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할 말이 있다’ 등 한국 사회와 종교계에 아프지만 약이 되는 이야기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1958년에는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에서 남한을 꼭두각시라고 표현한 것을 정부가 문제 삼아 필화 사건이 발생한다. 이후 이승만 정권, 자유당과는 계속 마찰을 빚다가 4·19의 빛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이도 잠시. 곧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군부독재 시기로 접어든다.

1960년대 중반, 박정희 정권과 맞짱 뜨던 〈사상계〉는 여러 외압으로 잡지를 지속하지 못할 만큼 형편이 어려워졌다. 1970년, 김지하의 시 〈오적〉(五賊)을 문제 삼아 강제 폐간, 관련자들이 투옥되며 16년 역사에 마침표를 찍는다. 2000년대에 복간 시도가 있었지만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최근 장호근(장준하의 아들)이 발행인으로 나서 2025년 4월 1일 재창간을 시도했다. 첫 판 인쇄 문제로 4월 8일에 재창간 구독자 1천여 명에게 복간호가 발송되었다. 〈사상계〉와 함석헌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함석헌이 게재한 글들도 조명하고자 한다.

셋째는 〈씨알의소리〉다. ‘씨알’은 민중을 대체하는 순우리말로, 가장 먼저 쓴 이는 함석헌의 스승 유영모다. 유영모는 “民을 어떻게 우리 말로 고쳐 쓰면 좋을까”를 묻는 제자에게 “씨알이 좋겠다”고 말하는데, 함석헌은 이 말을 듣는 순간 전율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 씨알에 대해 고민하고 숙성시켜 자신만의 고유한 “씨알”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대안 언론이었던 〈사상계〉가 폐간되고, 민중은 ‘입틀막’을 당했다. 그 시기 함석헌은 씨알, 그러니까 민중들의 입은 절대로 막을 수 없다는 믿음으로 〈씨알의소리〉를 펴냈다. 박정희 정권은 이 잡지를 그냥 보고 있지 않았다. 창간호와 2호가 발행되자, 곧바로 트집을 잡아 폐간시킨다. 부당한 조치임을 외친 함석헌과 씨알들은 정부와 끈질기게 법적 투쟁을 벌였고 마침내 복간호를 발행할 수 있었다.

〈씨알의소리〉는 약 1년 3개월 동안 소리 내지 못했다. 그러나 진정한 씨알들의 소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함석헌은 독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가 몸담고 있던 퀘이커에서도 회보를 통해 씨알들의 목소리를 막을 수 없음을 역설했다. 이 이야기를 다루면서는, 강제 폐간과 복간 사이에 매체가 없는 상황 가운데 함석헌과 씨알은 어떻게 소통했으며, 소리내기를 시도했는지 추적하려 한다. 잃어버린 원고들, 세상에 나오지 못하도록 가로막혔던 소리를 복원한다.

이후 펼쳐지는 〈씨알의소리〉의 역사는 함석헌식 표현대로 “고난의 역사”다. 출판 담당자들이 정보부에 끌려가 고문당하기도 하고, 검열과 삭제를 너무 심하게 해서 40쪽짜리 잡지로 발행하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언론 통폐합 조치’를 통해 예고도 없이 두 번째 폐간 통보를 받으니, 이로써 씨알의 명맥이 끊어지는가 싶었다.

이 연재는 함석헌과 관계된 언론이 폐간과 복간을 거듭한 전후 맥락을 살피며, 억압에도 불구하고 언론이 마땅히 했던 일들을 찾아 밝힌다. 또한 함석헌 사후에도 그의 후신들이 어떻게 씨알 정신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설명한다. 하여, 언론인으로서 함석헌의 삶을 추적하며, 우리 시대의 언론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성서를 신앙의 밑힘으로, 저항하는 〈성서조선〉

출처: 성북문화원
출처: 성북문화원

아무리 그래봐야 조선인

함석헌과 김교신은 동갑내기 친구다. 고향이 달라 어린 시절에는 서로를 모르고 지냈다. 그러나 동년배인 만큼 공통분모도 많았다. 대표적 보기는 3·1운동. 당시 함석헌은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었고, 김교신은 함흥농업학교 학생이었다. 3·1운동은 청년 함석헌과 김교신에게 앞으로의 삶에 대한 강력한 동기를 제공했고, 이 둘을 ‘민족’에 관한 고민으로 이끌었다.

둘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났다. 일본 기독교인 우치무라 간조의 문하에서 함께 무교회 신앙을 배우며 밤새도록 토론하기도 했다. 우리 민족이 당면한 식민 지배의 현실을 초극하기 위해 기독교의 성서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했다. 이런 고민에 동참한 6인의 동인, 즉 함석헌·김교신·송두용·유석동·양인성·정상훈은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하여 성서를 읽고 연구했다. 그 결과물로 1927년 월간 동인지 〈성서조선〉이 세상에 나왔다.

김교신의 〈성서조선〉 창간사에 눈여겨볼 문장이 있다. “아무리 그래 봐야 너는 조선인이다!” 일제강탈기 조선인의 처지를 이보다 더 간명하게 설명할 길은 없다. 조선인은 아무리 학문에 매진해도, 아무리 일본인 교사들에게 학생으로서 선대받아도, 결국 ‘피식민지 조선인’이라는 한계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동인들은 무교회운동가 우치무라 간조에게서 배운바, 그러니까 성서와 일본 사랑을 연결한 그의 사상을 조국 조선에 접목하고자 했다. 〈성서조선〉 창간사를 살펴보자.

다만 우리 마음의 전부를 차지하는 것은 ‘조선’이라는 두 글자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낼 제일 좋은 선물은 ‘성서’ 한 권뿐이니 둘 중의 하나를 버릴 수 없어서 된 것이 그 이름이었다.

성서에는 숱한 해방 이야기가 나온다. 그 정점에 예수가 있다. 예수는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체제의 속박, 영적 억눌림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했다. 그의 바람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에 갇히지 않았다. 예수의 사상은 바울을 거쳐 로마의 지배 아래 사는 모든 억눌린 이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는 ‘복음’으로 탄생했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 ‘그래봐야 유대인’ ‘그래봐야 피식민지인’이었던 이들은 더 이상 ‘그래봐야’의 정체성에 자신을 가두지 않았다.

〈성서조선〉 동인들은 동족인 조선인들에게도 이 자유와 해방을 맛보게 하고 싶었다. 비록 조선인의 몸은 일제의 압제에 갇혀 있을지라도 정신과 영혼은 자유로워져서, 마침내 몸의 해방으로도 나아가기를 꿈꿨다. 또한 일제만이 아니라 조선인, 특히 조선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혼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모든 기성 종교 체제로부터도 자유로워질 것을 촉구했다.

‘성서조선’아, 너는 우선 이스라엘 집집으로 가라. 소위 기성신자의 손을 거치지 말라. 그리스도보다 사람(外人)을 예배하고, 성서보다 예배당을 중요시하는 사람의 집에서는 그 발의 먼지를 털지어다.

〈성서조선〉이 세상에 나온 1920년대. 소위 일제의 문화통치기로 불리는 시대다. 민족자결주의, 반식민지 운동 등 세계의 추세와 1919년 3·1운동의 열기에 일제는 무단통치, 헌병 경찰 통치 노선을 꺾었다. 그러나 ‘문화’라는 이름은 포장일 뿐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일제는 “아무리 그래 봐야 조선인”의 입장을 더욱 강하게 고수했다.

특히 이 시기에 종교계(대체로 기독교)는 ‘법인화’의 늪에 빠져 정체성과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대신, 교회가 가진 모든 재산을 ‘법인화’하라는 일제의 권유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달콤한 것이었다. 그전까지 교회에는 재산이랄 게 없었다. 선교사의 집이나, 유력한 공동체 구성원이 제공한 공간이 교회였기에 재산에 대한 법적 안정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제 당국에 정식으로 법인 등록을 하게 되면 합법적인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대부분의 교회가 ‘법인’에 가입했다. 이로써 일제는 조선교회 현황을 더욱 손쉽게 파악하고, 수월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

일제는 조선에 복음을 전한 미국 교회도 ‘정교분리’ 원칙을 지킨다며 정치적인 행위를 하지 말 것을 종용했고, 교회는 수용했다. 이는 왜곡된 해석으로, 본디 ‘정교분리’란 미국 건국 시기에 ‘종교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에 온 청교도들의 신앙, 수많은 교파의 다양한 신앙 형태를 보호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교회는 일제의 왜곡된 정교분리 원칙 주장에 굴복했다. 많은 한국교회사 학자들은 이때를 ‘비정치화’와 ‘평범화’의 시기로 평가한다. 1919년 전체 인구 중 1% 남짓이었던 기독교인들이 3·1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보여준 저항의 정신이 사라지고 평범한 기독교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성서조선〉 동인들은 이렇게 종교가 변질하면 또 하나의 체제가 되어, 성서를 통해 신앙을 담보하려는 이들의 영혼과 정신, 삶을 억누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참된 자유는 일제의 억압에 대한 저항과 더불어, 체제에 순응하며 재산을 챙기고 권력을 누리는 종교 기득권을 거부하는 데서부터 온다고 강조한 것이다.

함석헌, 시작부터 밑장빼기

함석헌은 〈성서조선〉 창간호에 ‘먼저 그 의를 구하라’를 게재하는데, 신약성서 마태복음 6:31-33을 바탕으로 글을 이어간다. 27살 청년 함석헌. 그는 체제의 신학 교육을 받지 않았다. 우치무라 간조에게 영향을 받아 교리나 교회의 가르침 없이, 오직 성서만으로 믿음과 자유에 이를 수 있음을 배웠다. 그렇기에 어떤 교리를 바탕으로 한 주석적 접근이나 교역자들이 설교하기 위해 메시지를 끌어내는 방식으로 성서를 이해하지 않는다. 그는 시작부터 성서를 조선과 잇는다.

살자! 그래 온 우주가 다 지나간대도 이것만은 지나갈 수 없는 것이요 온 세상이 다 꿈이라도 이것만은 어찌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막을래야 막아낼 수 없는 근원에서부터 솟는 샘이요 끌래야 끌 수 없는 감과(坩堝, 쇠붙이를 녹이는 그릇)에서 솟아나오는 불길이다. 살자! 이는 긴절(緊切)한 생명의 의지다.

살아야 한다는 청년 함석헌의 외침을 1920년대 죽은 땅 조선에서 듣는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고 했다면서, 사는 것이 사명임을 역설했다. 온 세상이 꿈처럼 비현실적이다. 일제는 조선인을 짜 먹고, 일제에 부역한 조선인들은 더 힘없는 조선인들을 짜 먹는다. 그런 상황에서 함석헌은 조선인들에게 “살자”고 외친다. 살아있어야 꿈틀거릴 수 있다. 꿈틀거리는 것이 저항이다.1) 함석헌은 이어지는 글에서 저항의 대상을 상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뜻을 거스리어 죄를 범하였다. 죄는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였다. 그들은 참 생명을 잃어버리고 맹목적 욕망만 그 안에서 미치고 얼크러지어 휩싸들게 되었다. 자신의 존재의 의의와 생활의 가치를 잊어버리었다. 이미 생명을 위한 욕망이 아니요 욕망 그것을 위한 욕망뿐이다.

이 글을 성찰적으로 읽으면, ‘죄’란 조선인 내면에 있는 죄, 스스로 옭매는 죄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함석헌은 죽음이 판치는 세상 속에서 “살자”라고 조선인들에게 외쳤고, “그들이 죄를 범한 거야”라고 패악을 부리는 이들을 상정한다. 이는 그다음 인용한 성서 구절(롬 1:24-29)을 통해 더욱 확실해지는데,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

함석헌이 “살자”라고 외친 대상이 조선인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존재는 일제가 된다. 일제는 힘으로 조선을 억눌렀고, 조선인을 ‘식량 생산 도구’로 치부했다. 대규모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침략 전쟁에 쓸 자원과 자국민을 배불리 먹여 달랠 식량을 조선에서 수탈했다. 대다수가 농민이었던 당시에 땅과 곡식을 빼앗으면, 그건 죽으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살자고 부르짖을 수밖에.

살려면 알아야 한다. 못살게 구는 존재가 누군지. 함석헌은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라는 낱말을 성서로부터 갖고 온다. 살라는 준엄한 명령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한 것처럼, 그 삶을 방해하는 이들을 향해 고도의 밑장빼기를 시전한다.

역사학자 박정신은 일제강탈기에 교회에서 〈마귀들과 싸울지라〉·〈십자가 군병들아〉 등의 찬송가를 부르며 조선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 상상한다. 조선인을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일제를 향해 분풀이하듯 찬송했을 거라는 그의 상상은 엇나가지 않았다. 실제로 일제는 저항 의식을 고취할 수 있다며 교회에서 이와 같은 찬송가를 부르지 못하게 했다. 예수는 몰라도, 성서를 몰라도, 자신들을 향해 하는 이야기는 귀신같이 잘 알아들었나 보다.

첫 호에 기록된 함석헌의 문장은 다소 복잡하지만, 문장에 담긴 마음과 생각은 선명하게 전달된다. 그의 마음을 내 식으로 정리해본다.

살자, 조선인이 잘못한 것 하나도 없다. 저들이 탐심에 빠져 우리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거다. 이 꿈과 같은 시간, 믿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이 시간, 그래도 우리 살자!

함석헌은 조선인을 향해 살자고 외쳤다. 그럼으로써 일제의 실체에 직면하게 했다. ‘살자’는 말이 ‘저항’이 되는 고도의 밑장빼기다. 〈성서조선〉을 통해 단순히 성서의 뜻을 풀어 설명하는 것을 넘어서, 조선 혼을 일깨우고 성서적 저항을 촉구한 셈이다.

비폭력 저항 사상의 서막

말년의 함석헌은 ‘비폭력 저항가’ ‘평화주의자’로 널리 알려졌다. 간디의 삶과 사상, 그를 중심으로 벌어진 비폭력 저항과 평화운동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자신도 그렇게 살고자 애썼기에 그렇다. 60대 이후 노인 함석헌의 삶에 고달픔은 끊이지 않았다. 경찰들이 감시하고, 길을 막아서고, 강연하지 못하게 방해했다. 구타와 수감은 늘 있는 일이었다. 함석헌의 제자이자 한국기독교장로회 원로 목사인 문대골은 함석헌의 비폭력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선생님은 자기를 막아서도 절대로 주먹으로 밀지 않았어요. 밀고 뚫고 나아가야 하는 상황이면 언제나 손바닥을 쓰셨죠.”

방해-구타-수감이 이어진 삶 속에서 함석헌은 비폭력 저항을 견지했다. 필자는 그에게서 비폭력 저항 사상이 배태된 때를 일제강탈기 〈성서조선〉 활동 시기로 본다. 일제는 〈성서조선〉을 불온 잡지로 규정하고 끝내 강제 폐간시킨다. 이를 통해 당대에 이 잡지는 분명 저항 언론으로 기능했고, 함석헌도 그 저항에 동참했음을 알 수 있다. 김대중 정부에서 함석헌을 ‘독립 유공자’로 지정(2002년)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여러 사전에서 함석헌을 설명할 때 ‘언론인’을 빼놓지 않는 점도 인상적이다.

〈성서조선〉 창간호는 동인들에게나 함석헌에게나 최초의 출사표였다. 세상을 향해 자기 뜻을 내비친 매우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모두 전력을 다했다. 글에 마음을 담았다. 나라 잃은 청년들의 애끓는 심정을 녹여냈다. 세상을 향해 첫 소리를 지른 함석헌. 그 소리의 규모라야 동인들 글 전부를 합쳐 44쪽이 전부이고, 발행 부수도 300부가 안 된다. 그나마도 조선에서 인쇄할 수 없어 일본에서 발행해 들여온 수준이었다. 남들은 들으려야 들을 수 없는 작은 소리. 그러나 그 작은 소리의 의미는 작지 않다. 그가 평생 가장 크게 소리 지른 ‘비폭력 저항과 평화’가 배태되는 시간이었기에 그렇다.

사실 〈성서조선〉은 언론이라고 부르기 애매한 측면이 있다. 동인들의 성서 연구가 주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제의 만행과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보도하고자 하는 저널리즘도 없었다. 그러나 당대에 〈성서조선〉은 분명 저항적 언론으로 기능했다. 일제는 이 작은 잡지에 주목했고, 검열했다. 함석헌은 〈성서조선〉에 연재한 글 때문에 감옥살이까지 했다.

일제 말년에 감옥살이를 해 본 것은 이 글(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연재) 때문이었다.2)

그는 성서를 해석하고 역사를 말하며 〈성서조선〉을 통해 저항하는 언론인이 되었다. 이 시기의 경험은 향후 펼쳐질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말씀〉·〈사상계〉·〈씨알의소리〉를 통해 저항 언론인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워갔다.

이 저항에서 주목해보아야 할 것은 바로 ‘비폭력’이다. 오늘날의 언론은 때로 글에 칼을 세워 특정인이나 세력을 죽이기도 한다. 한 정당의 정치인이 윤석열의 12·3 내란이 일어나기 수개월 전에 ‘계엄을 통한 내란 조짐’을 예견했을 때, 많은 언론에서 ‘허위 선동’이라고 못 박았다. 그의 예견이 현실이 되었을 때, 성의 있는 반성이나 정정 보도는 없었다. 수많은 독자를 보유하고, 정세에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주류 언론은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하여, 비폭력적 저항의 도구로 언론을 빚어간 함석헌의 밑뿌리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앙’이다.

신앙이 아니었던들 내 둔한 성질에, 부족한 행위에, 야비한 인격이 나로 하여금 낙심하여 죽게 하였을 것이다. 신앙이 아니었던들 내 불건전한 인생관이 내 천박한 지식이 나로 하여금 비관의 지옥에 떨어지게 하였을 것이다.

내 분망한 세사(世事)가 나를 노예로 잡지 못하고 내 죄악이 나를 먹어치우지 못하고 온갖 암초가 나를 받아 넘기지 못하는 것이 전혀 신앙 때문이다. 끊어질 듯하면서 아니 끊어지는 신앙의 힘이다. 이것이 아니었다면 하면서 각하(脚下)를 굽어볼 때 소름이 쭉 끼친다. 죽을 자로 살게 하는 것은 신앙이다. 신앙은 힘이다.3)

‘살자’를 외치며 일제에 저항했던 함석헌. 저항하되 비폭력적 방법을 견지한 삶의 뿌리에는 바로 신앙이 있었다. 당시 주류 기독교는 ‘비정치화’를 선언하며 신앙을 교회 내로 침잠시켰다. 교회 안에서는 뜨겁지만, 세상을 향해서는 평범한 교회, 소리치지 않는 교회였다. 함석헌은 당시 기독교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기독교는 조선을 과연 개조했을까. 이 시커먼 피가 응결된 지 천년이나 되는 혈관에 과연 온기가 돌아 죽었던 맥이 다시 놀게 하였나. 이 시들고 마른 얼굴에 기쁨의 웃음을 가져왔나. 이 다 끊어진 심금의 줄을 이어 가늘게나마도 맑은 소리가 나게 했나. 무교회주의는 과연 이 큰 길가에 앉은 노창녀의 어깨 위에 따뜻한 동생의 위로하는 손을 얹었나. 믿기는 같이 믿고 살림살이는 제각기 하는 믿음으로는 이것은 불가능하다. 이제 우리 전도가 묵은 밭을 같이 갈아주고 막힌 하수도를 같이 쳐주는 것인 담에 이것은 할 수 있다. 그 실력이 지금 없다. 있게 하여주시기 위하여 빌어야 할 것이다.4)

그러나 함석헌의 신앙은 〈성서조선〉을 통해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면함과 더불어, 험악한 현실을 함께 뚫고 나가자고 외치는 밑힘이었다. 이 신앙이 비폭력으로 저항하는 언론인 함석헌을 추동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이런 언론인이 있을까? 이익에 따라 기사를 생산하는 친자본주의적 언론, 권력에 붙어 기생하며 폭력적 영향력을 확장해나가는 언론이 판을 친다. 게다가 많은 교회가 그러한 언론을 소비하고 지지한다. 폭력적 현실에 맞서기는커녕 소수자를 핍박하고 극우적 정치에 앞장서는 현실을 목도한다. 성서에 입각한 신앙으로 시대의 어두움을 뚫고 나가고자 했던 언론인 함석헌이 그립다. 

■ 주

1) 《함석헌문집 10 - 꿈틀거리는 백성이라야 산다》(미간행)
2) 《뜻으로 본 인류역사》 제4판 서문에서
3) ‘신앙은 힘이다’, 〈성서조선〉 통권 5호(1928.7.)
4) ‘코이노니아’, 〈성서조선〉 통권 134호(1940.3.)


민대홍
함석헌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때때로 책을 만들며 살아가는 일목으로 파주 서로교회에서 목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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