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호 사람과 상황]
2024년 12월 3일 밤, 여느 날처럼 분주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긴급 담화를 통해 계엄령을 선포했고, 국민들은 갑작스러운 공포감에 휩싸였다. 서울 동작구 사당 인근에 울리는 헬기 소리, 국회의사당 출입을 통제한 경찰과 유리창을 깨고 국회 본관 내부로 진입한 계엄군…. 악몽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그날 이후, 같은 교회를 다니는 세 사람(황수지·이승은·송채영)은 광장에 나가 대통령 탄핵을 외쳤다. 프리랜서, 직장인, 학생. 나이도, 전공도 삶의 모습도 다른 우리는 왜, 추운 겨울 시위 현장에 나갔을까? 좌담은 서면으로 진행했고, 1월 8일 취합 정리되었다.
국회로 나간 이유
이승은(27):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어. 사실 내게 민주주의는 태어났을 때부터 당연했기 때문에 ‘민주주의 수호’라는 구호가 크게 와닿지 않았거든. 박근혜 정권 때도 촛불을 들고 대전 갤러리아 앞에 나가 ‘박근혜 탄핵’을 외쳤지만 당시에도 헌법재판소 심판, 탄핵소추안 같은 단어가 너무 낯설고 어렵게 느껴졌어. 시간이 흘러 내가 활동하던 대학교 방송국에서 정기총회 참석이 필수였는데, 정족수를 채우고 투표에 참여하는 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내가 속한 사회에 참여하는 일이 왜 중요한지 배울 수 있었어. 대학생 시선에서 사회참여를 경험했던 거지. 그런 크고 작은 경험들이 누적되어, 내가 속한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을 갖고, 필요할 땐 목소리 내고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거 같아. 그래서 갔어.
황수지(32): 그야말로 당연하게 집회에 나갔어. 우리는 2017년에 헌법을 위배한 대통령 탄핵이라는 민주주의의 모범을 보여준 경험이 있잖아? 그때의 힘을 기억하며 사람들이 다시 모일 거라 믿었어. 특히 계엄령 당시 국회에서 군인들을 막아낸 시민들을 보며, 감사한 마음과 함께 나도 동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후 무너지는 국가 시스템과 사회 곳곳에서 드러나는 피해를 보며 분노가 차오르더라. 한 사람의 이기적인 선택으로 공동체가 타격을 입고, 망가질 뻔했잖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어.
송채영(25): 나는 전공 과목인 아동학에서 ‘어린이들의 참여권’을 배우는데, 이론이 현실과 맞닥뜨려지는 걸 목격하게 됐어. 보도자료로 부모님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는 어린이 모습을 봤고, 부채감이 크게 들었어. 모두의 평범한 일상이 침해받았는데, 어린이가 이를 되찾고자 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 (어른으로서) 부끄러웠어. 다음 세대를 살아갈 어린이들은 국가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고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는 걸 체감했어. 정부는 꾸준히 약자를 외면하고, 이스라엘에 무기를 수출했고, 비상계엄이라는 평화의 대척점을 선택한 거잖아. 사회와 어른이 어린이들이 겪는 피해의 원인 제공자 역할에만 충실할 뿐, 결과에 대한 책임은 회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어린이들이 안전하게 목소리 내며 살 수 있는 세상을 고민하고 함께 살아가려면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서 나가게 됐어.
수지: 그러게. 나는 국민의힘이 투표권을 행사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자신들 자리를 지키기 위해 국민들에게 투표를 요청하던 이들이 정작 자신의 책임은 외면하는 태도에 화가 났어. 그런 모순적인 모습에도 동의할 수 없었고, 국민들이 저항의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해. 우리가 지향하는 민주주의는 그런 게 아니잖아.
승은: 그치. 단순히 대통령을 엄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들이 정치인들을 지켜보고 있다고 함께 목소리 내야 했다고 봐. 당신들이 일하는 이유는 권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을 위한 것이고, 우리는 이 모든 상황에 목소리 낼 수 있는 존재들이라고.
채영: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 ‘어린이들 보기에 부끄러운 줄 알아라’ 하는 마음이었어.
우리가 기억하는 시위 현장
승은: 각기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마음과 생각으로 나간 거 같네. 우리가 같이 간 적은 없고 각자 상황에 맞게 참여했잖아. 언제 참여했는지, 당시 상황과 분위기는 어땠는지 듣고 싶어.
채영: 계엄 선포 이후 몇 차례 시위에 다녀왔는데, 내가 두 번째로 간 날은 12월 7일 토요일이었어. 그날은 계엄 사태 이후 처음 열린 주말 집회라 사람이 많고 복잡했지. 예상보다 참여 인원이 늘어나면서 공공 인력 배치와 차량 통제가 지연되더라고. 그때, 불 켜진 응원봉을 든 여성분들이 구역마다 서서 동선을 정리하고 있었어. “안전하게 이동하는 게 먼저입니다” 외치시던 모습이 기억나. 붐비고 부대끼는 곳에서 그분들 수고 덕분에 사람들도 안전에 경각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아. 부딪히거나 불편한 일이 생기더라도 서로에게 너그럽고 친절했던 모습들이 기억에 남았어. 대치 상황이 발생하거나 긴장이 높을 것이라는 걱정이 무색하게 시위를 통해 연결되고 이어지는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어.
수지: 난 여의도에 두 번 다녀왔어. 첫 번째는 12월 11일, 두 번째는 14일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날이었어. 양일 모두 눈에 들어온 건 언론에서도 말했듯 20-30대 여성이 많았다는 점이었어. 박근혜 탄핵 때는 나이나 성별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었는데, 이번엔 확실히 젊은 여성들이 중심에 있었어. 이런 변화가 젠더 감수성이나 연대 경험의 차이 때문일까 하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 탄핵 구호를 외치고 발언을 듣고 행진할 때는 여의도 빌딩 숲이 진동하는 느낌이었어. 국회의사당 앞에 모인 수많은 국민과 정치인들에게 “우리를 보라.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라” 외치고 싶었어. 그런 마음이 구호를 더 힘차게 외치게 했어. 특히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였는데도 질서 정연한 분위기는 정말 인상적이었어. 이동이 필요할 때 양해를 구하면 자연스럽게 길이 열렸고, 사고나 불편함 없이 참여할 수 있었어.
승은: 그러게 말이야. 나는 12월 14일에서야 처음 시위에 나갔는데, 탄핵소추안이 투표 불성립으로 폐기된 이후였고, 국민의힘이 투표에 참여조차 하지 않은 것에 많은 국민이 분노하고 있었기에 정말 많은 사람이 현장에 모였어. 국회 쪽으로 걸어가는데, 사람이 정말 많더라고. 걸은 지 얼마 안 돼서 사람들이 오랫동안 멈춰있길래 ‘여기까지밖에 못 가는 건가?’ 싶었는데 신호를 기다리는 거였어. 많은 군중이 모여있는 장면을 보면 이태원 참사가 떠오르기도 해서 한편으론 조금 두려웠거든. 하지만 누구 하나 밀치거나 서두르는 사람이 없어서 내 발걸음 속도에 맞게 점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어. 신호가 짧아서 많은 사람이 건너기엔 시간이 부족했는데, 경찰분들이 차도에 서서 친절히 안내해주셔서 사고 없이 이동할 수 있었어. 일반 도보가 아닌 길을 개척하듯 뚫고 들어가서 언덕길에 서있었는데, 나무와 군중에 가려진 큰 전광판이 얼핏 보였지. 시위 내내 전광판과 스피커 소리에 의지해 상황을 살폈던 것 같아. 14일에 집에 돌아갈 땐 괜찮았어?
수지: 시위 후 집에 가는 길도 인파가 몰려 대중교통을 탈 수 없어서 사람들과 마포대교를 걸어서 건넜어. 그 모습이 마치 피난길 같았지. 지방에서 올라온 어린 친구들이 기차 시간 때문에 뛰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이 길을 열어준 장면도 기억에 남아. 그때 그 친구들은 무사히 기차를 탔으려나.
춥다고 멈출 순 없지, 시위의 뉴웨이브
승은: 한겨울의 시위였지만, 이번 시위에서의 연대는 정말 뜨거웠던 것 같아. 그럼에도 겨울이라 날이 추워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갔어. 모자, 장갑, 기모타이츠에 패딩, 양쪽에 핫팩 두 개씩 챙기고, 국회의사당 외에 우회할 수 있는 역까지 모두 휴대폰에 캡처해두고 출발했지. 소셜미디어에서 관련된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었어. 심지어 ‘어느 역을 무정차하고 지나갈 시 다른 역을 통해 가면 도보 몇 분이 걸린다’는 정보까지 상세히 공유해준 사람들도 있었지. 그분들 덕분에 어렵지 않게 친구들과 모일 수 있었던 거 같아. 한층 스마트하고 트렌디해진 이번 시위, 다들 어떻게 느꼈어? 아, 이번 시위에서 핫했던 응원봉도 들고 갔어?
수지: 선결제 매장과 재고 확인 홈페이지도 빠르게 만들어져 공유된 걸 보면서 ‘역시 대한민국’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이럴 때 단합 잘되는 국민성이 어찌나 재밌고 자랑스러운지. 이번에 새롭게 등장한 집회 문화인 ‘응원봉’을 보면서 처음으로 덕질 안 한 걸 후회했잖아. 이번 집회를 위해 튜닝된 응원봉들이 얼마나 밝고 다양하던지, 나도 하나 갖고 싶더라고. 응원봉이 없으니 현장에서 LED 촛불을 구매했는데 이걸로도 충분히 함께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어. 처음 갔던 날엔 국민의힘 당사로 행진하는 순서가 있어서 사람들과 시위 현장에서 출발해 한 시간 정도 걸었어. 추운 날씨에 얼어있던 몸을 일으켜서 가려니 걱정이 됐거든? 근데 리듬에 맞춰 구호를 외치고 K-pop을 부르며 움직이니까 오히려 흥이 나고 신나더라고. 덕분에 텐션이 올라와서 지치지 않고 끝까지 걸을 수 있었어.
승은: 정말… ‘흥이 나도 되나’ 싶으면서도 ‘이렇게라도 이겨내야지!’ 싶더라. 흥의 민족답게 시위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응원봉을 들고, K-pop을 개사하거나 추임새로 “탄핵!”을 붙여 노래 부른 건 기억에 많이 남아. 나는 가기 전부터 핫했던 ‘탄핵 플레이리스트’도 미리 듣고 갔었어. 민중가요를 잘 몰라서 걱정했거든. 예습 차원으로 듣고 갔더니 현장에서 무리 없이 따라 부를 수 있었어.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올린 게시글 댓글에 ‘◯◯◯ 의원실 일 잘한다’고 적혀있던데, 박근혜 탄핵 시위 때와는 또 다른 흐름임을 느낄 수 있었어. 더구나 윤수일과 로제의 〈아파트〉를 리믹스해서 부른 건,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나이대를 어우른다는 느낌을 주었어.
채영: 처음 갔던 날, 밤 9시쯤 합류했는데, 나는 야구를 좋아해서 응원봉 대신 우리 팀 응원 배트를 들고 갔어. 이미 몇 달 전에 야구 시즌이 끝나서 올해 응원 배트를 흔들 일이 더는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쓰일 줄이야…. 아무튼 부리나케 가느라 준비가 부족했지만, 현장에서 핫팩과 방석을 나눠주신 덕분에 추위를 견딜 수 있었어. 밤이 늦어서 낮부터 자리를 지키던 사람들이 점점 빠져나가고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현장에 고요한 분위기가 맴돌았고, 구호를 외치거나 시민 발언을 들을 때 더 집중해서 참여할 수 있었던 것 같아. 혼자 가서 멋쩍었던 것은 잠시뿐이었지. 함께 자리를 지키던 사람들을 보니 큰 목소리로 외치는 게 부끄럽지 않고 오히려 든든했어.
승은: 맞아. 혼자 가도 전혀 외롭지 않겠더라! 나는 국뽕 같은 거 없을 줄 알았는데, 국민이 가진 힘을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어.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던 14일, 우원식 국회의장이 “가 204표”라고 말하자마자 사람들이 다 같이 환호했던 그때의 감각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 그때 내 마음에 심겨졌던 건 ‘국민이 생각하는 상식이 아직은 통할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이었어. 그리고 우리가 이전의 역사로부터 연결되어 한 마음을 품을 수 있다는 것에도 감사했어. 국민 의견을 제대로 듣지 않던 정치인마저도 국민의 목소리를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어. 정치인을 불신하는 면이 있긴 하지만…. 그날만큼은 안도하는 마음으로 집에 돌아갈 수 있었던 것 같아.
평범한 청년들이 바라보는 정치와 내일
승은: 사실 뉴스를 보면 아직 탄핵소추안 발의와 가결은 시작에 불과했다고 생각해. 대통령 탄핵과 더불어 국가가 해결해야 할 문제도 많은 시점 같고. 다들 정치와 우리나라의 미래에 대해선 어떻게 느끼고 있어?
수지: 연말에 아빠랑 정치에 관해 얘기하면서,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을 겪은 60대 이상 어른들과 계엄령을 처음 겪는 우리 청년 세대 사이에 큰 시대적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 그때의 참혹한 일들을 직접 겪은 아빠 또래 어른들 중에는 이번 계엄령이 과거에 비해서 별것 아니라고 느끼거나 심지어 탄핵감조차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더라. 하지만 지금 청년들에게 민주주의와 자유는 공기처럼 당연한 거잖아. 그걸 빼앗으려는 시도에 느끼는 분노는 과거와 전혀 다른 결의 감정이 아닐까. 이번 일을 계기로 정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청년들이 많아진 것도 눈에 띄고. 아빠는 그런 우리 세대에 희망이 있다고 하셨어. 다양한 생각과 관점을 가진 우리가 새로운 정치를 만들고, 대한민국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갈 거라고 믿으시더라. 나도 그 말에 동의해. 우리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하지만 세상을 바꾸려면 큰 연대가 필요하잖아. 불필요한 권력 싸움이나 사사로운 이익 때문에 같은 과오를 반복하거나, 우리의 목소리가 분산되지 않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
채영: 시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서 지인들과 ‘우리 끝까지 해보자’고 연락을 주고받았던 게 생각나. 사실 그동안 대부분의 문제를 단편적으로 해석하고 매듭지어왔던 것 같아. 생존하기에 급급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그다지 오래 실감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이 현상도 전과 다를 것 없이 일시적으로 남을까 봐,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지워질까 봐 두려웠어. 하지만 오히려 새로운 장소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연대하고 존재를 나타내고 있는 걸 보고, 이게 오늘날 무너지지 않고 소망을 가진 청년들이 삶을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이구나 싶었어. 앞으로 청년들이 짧고 빠른 방식이 아닌, 꾸준하게 깊이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정치를 견지하는 태도를 가지게 된 것에 의미가 크다고 생각해.
승은: 박찬대 의원이 탄핵소추안 제안설명을 하고 있을 때, 뒤에서 응원봉을 들고 있던 20대로 추정되는 여성분이 친구에게 “이번 일이 있기 전까지는 정치인들 이름도 몰랐다”고 하더라고. 그 말이 계속 기억에 남아. 내 입장에서도 정치계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젊은 세대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다르고, 정치인들이 갖는 권력과 권위에 공감이 잘 안됐거든. 아직 우리나라에서 정치인은 ‘권력의 상징’으로만 느껴지는 것 같아. 솔직히 말하면 우리나라의 정치가 국민들의 삶과 목소리에서 멀어져있고, 정치인을 심판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느껴서 멀리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어. 감히 엄두 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지. 하지만 정치인들도 국민의 모습이 변화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면 해. MZ라는 말을 별로 안 좋아하지만, MZ와 그 이후 세대까지 아우르는 정치인이 되려면 더욱 유연하게 소통하고 다양한 사람을 포용해야 한다고 봐. 단순히 포퓰리즘적인 퍼포먼스만 추구하는 게 아니라, 국민을 위해 목소리 낼 수 있는 대변인이 많아졌으면 좋겠어. 성숙한 정치와 사회를 위해서는 지긋지긋한 양당 정치를 벗어나 더 신중하게 선택하고 투표하는 국민도 필요하겠지. 이번 사건과 집회를 통해 젊은이들이 정치를 내 것으로 여기고 참여하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국민을 두려워하는 정치인들이 많아지기를 바라. 국민이 함께 만든 과거가 현재를 살릴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싶어.
송채영
아동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어린이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공부했다. 전공 외에도 흥미로운 것이 많아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이번 겨울에 졸업한다. 동시에 취업 준비생으로 막 발을 내디뎌 긴장과 떨림이 많은 요즘, 주무기인 씩씩함으로 이 여정을 헤쳐나가고자 한다.
이승은
본지 독자위원. 사람을 사랑하기 어려워서 관찰하기를 습관처럼 하는 교육 콘텐츠 개발자 4년 차. 평소 읽고 쓰는 것을 즐기고 기록 남기기를 취미로 삼는 편이다. 읽기와 쓰기가 더 나은 삶을 만들어줄 거라고 믿는다. 2025년은 모쪼록 나와 주변을 더 넉넉히 사랑할 수 있길 바라고 있다.
황수지
오리너구리처럼 유머와 진지함이 공존하는 삶을 살며, 배우고 성장하는 것을 좋아한다. 태어나서 마주한 세상에는 마음에 드는 것들이 생각보다 적어서, 자연스럽게 대안적 삶과 상상력을 추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