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호 동교동 삼거리에서]

한강 작가의 자전소설 〈침묵〉(2000)에서는 여름 수박 맛이 화두가 되어, 아기를 낳지 않을 거라는 화자의 굳은 결심에 균열이 납니다. 빛으로 나온 생명은 저마다 신비하고 오묘한 근원을 갖는가 봅니다.
지난해부터 독자들에게 저출산·저출생 현상을 다뤄달라는 요청을 지속적으로 받았습니다. 이를 기독교 잡지만의 방식으로 다루기 위해 고민하는 과정이 좀 걸렸습니다. 이제야 생명을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생명과 관련한 지난 몇 해의 복상 글들을 보니, 동물권이나 생태 환경 등의 주제는 제법 다루었는데 사람의 탄생에 대해서는 다루지 못했더군요. 출산 장려 정책이나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사람의 탄생이 지닌 섭리를 곱씹는 일이 먼저라는 생각에 이번 커버스토리를 꾸리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누리도록, 그것도 넘치게 누리도록 하려는 것입니다”(요 10:10, 새한글성경)라고 하셨습니다. 대림절과 성탄절로 채워질 12월, 이 생명을 누리기 위해 생명의 관계성을 숙고하는 필자들 이야기가 독자분들의 한 날이라도 고요히 적시었으면 좋겠습니다.
“왜 그 새벽 나에게는, ‘내 아이’를 가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걸까. 본능처럼 나는 느꼈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이 세상을 떠돌아왔던 생명의 에너지가 내 몸속에 자리를 잡은 거라고. 그는-그녀는- ‘나’의 것이 아니라고. 그러자 기쁨이라기보다는 맑은 축복감이 정수리를 고요히 적셔왔다. 무릎을 꿇은 채 차가운 시냇물의 세례를 받은 것 같았다.”(한강, 〈침묵〉)
이범진 편집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