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호 커버스토리]
누군가는 제목을 보고 출산 예찬을 담은 아름다운 회심기를 기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글은 비출산에서 출산으로 나아가 구원받은 이야기가 아니다. 잘 어우러지지 않는 단어들로 조합된 이 어색한 제목은 1년 동안의 내 상태를 묘사한 것에 불과하다. 일상은 짧은 기간에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지만, 인생을 관통하는 질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기승전결로 정돈된 시간은 아니었지만, 켜켜이 쌓인 물음이 흐지부지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질문을 떠올리다
‘그리스도인은 꼭 아이를 낳아야 하나요?’ 이 질문은 처음부터 나의 고민은 아니었다. 당시 사역자도 아니었던 나에게 한 청년이 조심스레 던진 질문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상식적으로 당연히 그럴 필요 없는 거 아니냐고. 걱정 말고 평안히 가라는 취지의 답변이었지만, 내 간결한 대답이 답답한 마음을 풀어준 것 같지는 않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20대 초반 청년이 왜 이런 진지한 질문을 품게 되었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그의 고민이 출산에만 국한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교회가 제시하는 획일화된 삶의 양식이 불편해서 견딜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차라리 ‘아멘’으로 대충 믿는 척만 하면 편했을 텐데. 생명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 교회는 잔소리로 답해왔고, 사람들은 그곳을 떠나거나 질문에서 떠났다.
이 질문이 다시 나에게 화두가 된 것은 석사학위논문 주제를 정해야 할 때였다. 몇 년 사이 한국 출산율은 최저점을 연속으로 갱신했고, 우리 부부는 결혼한 지 이미 4년이 지났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며 임신을 미루고 있었다. 많은 부부가 겪고 있는 일종의 사회적 난임이었다. 내가 들었던 그 질문이 이제는 나의 일이 되고 있었다. 정부와 언론은 저출생에 대한 위기의식을 나날이 고조시키고, 여전히 많은 교회가 이에 화답하듯이 은연히 청년들을 정죄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생명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단지 낮아진 수치와 그로 인해 발생할 결과에 집착하고 있다. 저출생이 가져올 여파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저출생은 누구에게 심각한 문제인가? 저출생은 생명을 경시하는 청년들이 주도하는 현상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생명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회에 대한 반응이 아닌가? 성서는 이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하는가? 나의 논문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1)
질문을 풀어내다
비출산을 주제로 잡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나는 신약학 논문을 써야 했다. 성서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본문이 정말로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지에 대한 사료적 근거이다. 나의 주장을 앞세우기 이전에 본문을 경청하고 새로운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그래서 성서학 연구는 ‘현대사회에서 이렇게 실천해야 한다’는 식으로 당위적 주장을 내는 경우가 거의 없다. 나 또한 성서가 비출산을 옹호하느냐는 문제 이전에, 비출산에 담긴 의의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렇게 성서에서 비출산을 발견할 수 있을지 스스로 의심하며 본문을 뒤적거렸다. 그때 우연히 보게 된 구절이 누가복음 23:29이었다.
보라, 사람들이 말할 날들이 오기 때문이다. 복이 있다, 불임 여성들과 출산하지 않은 자궁들, 젖 먹여본 적 없는 가슴들이! (필자 사역)
이 구절을 떼어놓고 보면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불임 여성을 위로하는 예수의 말로 보인다. 하지만 예수는 예루살렘 함락을 앞둔 여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앞서 예수는 예루살렘에 있는 아이 가진 여자들이 끔찍하고 비참한 결말을 맞을 것이고(눅 21:23), 자신이 아닌 차라리 너희와 자녀들을 위해 울라고 경고했다(눅 23:28). 예수는 출산 여성을 저주하고 무자녀 여성을 축복함으로써 환난 가운데에서 일어날 수 있는 출산을 이중으로 제재한다. 예루살렘 여자들과 오늘날 청년의 삶과 정서는 분명히 겹치는 지점이 있다. 우리 또한 언제 종말을 맞이할지 모르는 위기의 시대,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는 무너진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비출산은 여성만의 주제는 아니기 때문에, 논문에는 고린도전서 7장에 나타난 바울의 공동체적 명령과 마태복음 19:12의 “하늘나라 때문에 스스로 성 기능에 장애가 있는 남자”가 된 경우를 추가로 다루었다.
세 본문을 통하여 내가 주장한 논지는 당대의 비출산이 로마제국에 대한 저항이었다는 점이다. 로마제국 또한 심각한 저출생 현상을 겪고 있었고, 로마 상류층은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대표적으로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인구 감소를 해결하기 위해 결혼과 출산을 강제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이러한 법률로는 간통을 처벌하는 ‘간통에 관한 율리아 법’(lex Iulia de adulteriis, 기원전 18년)과 결혼 및 출산을 장려하는 ‘파피아 포파이아 법’(lex Papia Poppaea, 기원후 9년)이 있다. 표면적으로 이 법들은 로마의 도덕적 권위와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가족 및 성적 질서를 재편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숨겨진 의도는 로마 상류층에게 주어진 사회적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있었다. 간통 처벌은 여성을 사회적으로 억압하고 제재하려는 것이었고, 출산 장려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로마 상류층의 정치적 의도에 비추어 보았을 때, 당대 그리스도인이 선택한 비출산은 제국의 노예를 더 이상 늘리지 않겠다는 저항적 의지 표명이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생존을 위한 출산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종말론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말은 한 시대를 끊는 불연속이며, 이는 지금의 세계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세상 통치자들에게는 심판과도 같은 것이다. 한편, 억압받는 자들에게 종말은 세상이 변할 수 있다는 유일한 희망이다. 세상이 뒤집혀야만 이제까지 당한 수치와 억울함을 풀 수 있는 사람은, 다가올 환난을 기다리지 않아도 이미 지옥 안에 있다. 예수는 그러한 사람에게 찾아오신다. 예수의 말과 삶은 종말에 일어날 통치와 질서를 미리 보여주었고, 이러한 삶의 양식에는 비출산 또한 포함된다.
예수와 바울이 말한 비출산은 제국에 대한 봉기에 그치지 않고, 생명을 지키기 위한 새로운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예수는 자신의 친족에게 상당히 매몰차게 대할 때가 많았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해서는 특별히 관심을 보이고 돌보았다. 바울 또한 종말론적 인식에 기반하여 결혼이나 이혼에 소극적이면서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의 확장을 위해 헌신했다. 성서는 출산을 포기하여 자신의 안정과 유익을 누리는 삶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경계를 넘어 죽어가는 생명을 돌보는 자리로 우리를 초대한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전쟁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선행과 구제에 쏟은 노력은 누군가가 선택한 출산 포기 위에 세워진 것이다.
성서에는 출산을 당위적으로 묘사한 본문과 비출산을 긍정하는 내용이 공존한다. 각 구절이 형성된 맥락과 층위가 다르기 때문에, 어떤 본문을 현실에 적용할지는 해석자의 선택에 달려있다. 다양하고 풍성한 말씀을 앞에 두고 절대적 윤리 지침을 항상 도출하고자 하는 것은, 해석자가 자기 입맛대로 본문을 취사선택하거나 조작하려는 태도일 수 있다. 성서 본문은 성서가 지닌 고유한 맥락 안에서 해석되어야 하고, 이를 망각하면 성서는 권력자에게 이용당한다. 최근 보수 교단을 중심으로 모인 대형 집회 조직위원회가 내놓은 기도제목들이 그 예이다. 이들은 비출산이 무조건 죄의 결과이고 회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성서는 반드시 그렇게만 해석되지 않는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오면, 성서는 출산의 당위성에 대해 무엇이라 명확히 답하지 않는다. 단지 생명을 살리는 선택을 하라는 원리를 말한다. 출산하더라도 자기 자식의 생명만 중요시한다면 성서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이다. 반면 비출산을 택하더라도 다른 생명을 사랑하는 길을 걷는다면 말씀의 본질을 실현하는 방식이 된다.
질문을 살아내다
논문을 한창 쓰던 와중에 아내가 임신했고, 논문 본심사를 받는 날에 아이가 태어났다. 예상보다 빨리 찾아온 아기를 보고 기쁘면서도 놀라웠다. 하지만 더 급작스레 맞이한 상황은, 아내가 복직하면서 주 양육자가 된 것이다. ‘육아는 꼭 여자가 해야 하나?’ 질문할 새도 없었다. 공부하려고 비워뒀던 시간이 한 생명으로 채워졌다. 비출산도 아니고, 직접 출산한 것도 아닌 어중간한 입장이 되었다. 내 알고리즘은 저출생과 비출산에서 육아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생명에 관한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미 비출산에 대한 답을 한번 내었지만, 이 답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요즘 육아는 정신을 놓으면 휩쓸려가는 공포 마케팅의 장이다. 무엇 하나라도 놓치면 큰일 날 것 같은 마음을 부모에게 불어넣는 광고와 영상이 판을 친다. 청소년이 겪는 획일화된 교육이 유아기까지 확대된 느낌이다. 부모들은 개월 수에 맞추어 이루어지는 정상 발달이 무엇인지 수시로 검색하고, 평균에 못 미치면 말도 못 하는 아이를 두고 노심초사하며 닦달한다. 요즘 부모들은 이전 세대보다 육아를 많이 공부한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아이의 행복을 위해 키우려고 하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전문가의 연구로 만들어진 최신 정보를 기준으로 아이를 키우는 일이 잘못인가?’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아무리 좋은 정보와 환경을 총동원해도, 부모의 욕심이 무너지지 않으면 아이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초보 아빠인 내가 전문가보다 구체적인 조언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 아이에게만큼은 내가 세상의 전부임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남자의 육아는 사람들로부터 걱정과 칭찬을 동시에 듣는다. 혼자 아이를 업고 커피라도 사러 나가면 어떻게든 오해받지 않을까 혼자 걱정하기도 한다. 아직은 아기가 어려서 티가 나지 않지만, 훗날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 아내만큼 내가 잘하지 못한 것 때문에 괴로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아빠 위주의 육아는 추천할 만하다. 육아 참여에 그치지 않고 내 육아를 주도적으로 하는 재미가 있다.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도 보람이 있다. 무엇보다 남자가 육아를 열심히 하면 그보다 과하게 칭찬받는다. 아직도 아빠의 육아는 엄마에 비해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 박수가 엄마들에게는 충분히 돌아가지 못했다는 사실은 유감스럽다.
성서에서 남자가 주 양육자로 등장하는 이야기도 있을까?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로 불리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보여주는 유명한 비유를 떠올려보자. 이 비유는 등장인물 입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다. 이 중 둘째 아들에게는 방탕하다는 낙인이 오랜 세월 과도하게 씌워졌다. 한국 사회와 교회가 규범에 어긋난 인물에게 혐오의 시선을 던지고 실패자로 낙인찍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비판을 무조건 피하자는 뜻이 아니라, 왜 이런 갈등이 생겼는지 먼저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사랑도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하며, 우리 역시 완전한 이해 가운데서 사랑받는다고 느낀다. 두 아들의 아버지는 아들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긍정한다. 이는 모성과 부성을 망라하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상징한다.
이 비유에서 어머니가 등장하지 않는 점도 눈에 띈다. 어머니가 부재한 상황에서 보이는 둘째 아들의 행동은 성급히 어른이 되고자 하는 모습으로 읽힐 수 있다. 육아의 목적은 독립 아닌가? 아버지가 생존 중일 때 자기 몫을 요구한 것은 독립을 희망한다는 표현일 수 있다. 그는 자아를 실현하고자 집을 떠났으나, 미성숙하여 실패하고 아버지를 떠올린다. 이는 아들이 아버지를 전적으로 버리지 않았고, 마음 깊이 아버지를 신뢰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만약 둘째 아들이 독립해서 성공을 이뤘다면, 우리는 그의 삶을 다르게 평가했을 것이다. 둘째 아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한 사람을 평가할 때 결과에만 집중하는지 혹은 과정과 내면을 보려 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드러난다. 부모에게 필요한 것은 억지로 하는 용서가 아니라, 부모의 기준을 강요하지 않는 존중이다.
아들 자격을 잃었다고 스스로 생각한 둘째 아들과 달리, 아버지는 아들을 자식으로서 받아들인다. 아이에게는 존재만으로 사람을 결속하는 힘이 있다. 아이가 없어도 가족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아이가 있으면 그를 둘러싼 사람들은 가족이 된다. 또한 인간은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아이다. 예수는 아버지의 정체성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로 있기를 원했다. 모든 사람과 생명은 귀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한다. 하지만 생명의 상호 존중은 각자 내면에 있는 아이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인생에 출산이라는 과업이 없더라도, 생명을 지키고 가꾸는 일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질문을 이어가다
생명이 이어지듯이 질문 또한 끊어지지 않고 계속된다. 질문은 곧 관심이다. 성서의 낯선 존재와 관념에 다가가는 일은 해석자의 지평을 넓힌다. 성서는 사회에서 외면받던 사람들 이야기로 넘쳐난다. 그 안에는 온갖 소수자들이 숨을 쉬고 있다. 성서를 두고 질문하지 않는 것은 성서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성서는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목숨은 붙어있지만 생명이 꺼져가는 한국 사회에서 말씀이 새로운 답과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는 앞으로 글과 삶으로 몸부림치며 답하고자 한다.
1) 최찬욱, 〈신약성서와 비출산(非出産)〉(석사학위, 연세대학교 대학원, 2024). 전체 원문은 학술연구정보서비스(RISS)에서 열람할 수 있다.
최찬욱
학부에서 생명과학, 대학원에서 신학과 신약학을 전공했다. 시간 중 대부분을 육아에 쏟으며, 함께하는교회 예수마을 청소년마당에서 사역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