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호 무브먼트 투게더]
모이기 힘써도 흩어지면 불편하다
“아니, 글쎄. 지난번에 7천 명이 넘게 모였는데, 비가 와버려서 많이들 돌아갔다니까요. 자리가 없어서요.”
“뭐? 7천?”
“네. 어휴, 다음 집회는 2만 명 예상된대요. 말도 마세요.”
졸업한 제자를 오랜만에 만났다. 유명 찬양팀의 간사가 되었다기에 밥이나 사줄 생각이었다. 우리의 사역 이야기는 끝을 모른 채 이어졌고, 계속 흥미로웠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놀라웠다.
“아니, 젊은 애들이 비를 맞으면서 그걸 기다린다고?”
“네. 심지어 영상으로만 보는 곳에라도 들어가려고 해요.”
말을 잇지를 못했다. 다음 세대 위기라니 뭐니 난리라는데, 정작 어딘가에선 다섯 시간 집회를 견디고, 자리가 없어서 못 들어가는 실정이라니. 장년 세대가 그토록 구현해내려 애쓰는 ‘2023 애즈베리 부흥’이 지금 제도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셈인가. 어째서 그 소식을 나는 알지 못했던가. 정신이 멍해졌다.
“그 친구들 왜 거기 있는 거 같아?”
니즈를 파악하고 전략을 찾기에 바쁜 캠퍼스 간사다운 질문이었다.
“글쎄요. 지속적이진 않지만, 어떤 경험이나 자극을 찾는 것도 같고.”
“흠. 너희는 지속적이지 않은데 사람이 모이고, 우리는 지속적인데 사람이 잘 들어오지 않으니…. 대표님께 협업 제안 좀. 어때?”
“어… 제가 아직 신입이라….”(웃음)
난처해하는 그에게 계속 새로운 제안을 걸어보다가,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키득거렸다.
7천 명이 다 뭔가. 사실 선교단체에 스무 명이 들어와도 ‘이 정도면 됐다’ 하고, 가르칠 형편이 안 되어 돌려보내고 싶은 심정이기는 하다. 따라서 협업 제안은 농담이었지만, 궁금증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어디에서 어떤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가.
이런 상황에서 지속적 공동체가 아닌 콘서트식 집회를 찾는 청년들 모습을 한탄한다면, 제도 유지하는 데 온 에너지를 기울이고 싶은 자들의 방어기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벤트성 예배를 찾아다니는 젊은이들에게 있는 동기가 공허감이든 열망이든 간에, 부흥으로 가는 전조 혹은 그 무엇이든 간에, 분명한 것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보는 캠퍼스 현장과 확실히 다르다는 것. 캠퍼스에서 청년들은 숨어 지낸다.
문득, 숨지 않아도 괜찮은 곳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찬양 집회란, 그런 공간인지도 몰랐다. 대중에게 인정받을 만한 음악을 구현하고, 매력적인 이들이 인도하는 예배 속에서 안도하는 것도 같았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옳고도 멋진 삶이라고, 내 마음이 지시하는 그것이 맞다고 말이다. 나는 이렇게 받은 은혜를 착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를 맞으며 기다릴 만한 더 즐거운 유흥은 많기 때문이다.
착각이란, 잘 모였으니 흩어져서도 잘 살 수 있으리라는, 우리 같은 사역자들이 안주하기 쉬운 생각에서 비롯된다. 일상에서 신앙인으로서 느끼는 빈번한 실패감이 그들을 다시 예배하는 자리로 불러 모으면 그만인가? 아무래도 이상하다.
아무리 ‘빛과 소금’처럼 살아가려 해도, 그리스도인이란 캠퍼스에서 여전히 비상식적이면서도 부끄러운 이름이다. 뛰어난 학업 성적과 준수한 외모, 매력적 성격과 원만한 대인 관계 전부를 갖고 있는 대학생이 아니고서야 ‘빛과 소금’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게 되겠는가, 청년들은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전도 환경은 바꿔주지 않으면서 신앙 공동체가 한 개인에게 거는 기대는 너무 높은 듯하다.
그리스도로 인해 변화된 이가 복음의 산증인이 돼서 삶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의 진정성을 깨닫게 하는 것. 그리하여서 다시 복음이 전해지는 그 방향은, 내가 대학생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구현하기가 쉽지 않은 목표다.
그렇다면 캠퍼스에 온 청년들에게 적합한 선교의 목표란 무엇일까? 오래도록 고민해왔다.
먼저, 나는 이 친구들이 복음을 알지 못한다고 가정한 채로 활동을 시작한다. 복음의 총체성이나 그리스도 구속 사역이 포괄하는 회복의 구체성도 거의 알지 못한다고 가정한다. 간사가 할 일이 너무 많다고, 모태신앙을 가진 친구들이 자라온 가정과 지내온 교회에 책임을 묻고 싶었던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앎이란 청년 시기에 형성되는 게 적절하기 때문이다. 막 성인이 된 때에 필요한 지식을 갖추도록 이끄는 일이 내 본분이라는 마음을 품고, 놀라지 않는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창세기 1장 1절부터.
그리고, 이 친구들은 무엇보다 자신의 존재를 향한 관심이 지대하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는 일(신앙 습관이나 종교 모임을 다시 세운다는 뜻이 아니다)부터, 성숙으로 가는 과정을 제안하는 것은 앞선 과업보다 더 예술적인 감각이 필요한 일이다. 솔직히 말해서 청년들은 가족도, 친구도, 세상도,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쏟을 틈이 없다. 바른 방향을 이어간다면 관심을 확장하게 될 테지만 아직은 아니다.
오히려 두 가지 상황에 대해 환영하고 기뻐한다. 복음의 총체성을 알지 못하는 것도,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것도 위험하게 보지 않는다. 예수님도 딱 이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고, 기르셨다. 제자로 살아가기에 충분하다는 마음을 품고 청년들을 만난다.
신앙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
제임스 파울러는, 신앙이 일평생 여섯 번에 걸쳐 질적 변화를 겪으며 단계적으로 성장한다는 신앙발달이론을 제시했다.1) 그는 제3단계 청소년기와, 성인기로 진입하며 4단계로 나아가는 변화를 중요하게 기술한다. 청소년기 신앙은 “종합적-관습적 신앙”이다. 논리적 사고가 발달하면서 대부분의 신학 개념이 이해되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사람들의 시선과 기대에도 민감해져서, 이것이 신앙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주된 요인으로 작용한다. 청소년기에 신앙은 점점 무르익는 듯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동조의 단계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깊은 반성이나 비판 없이 소속 집단에 의존하는 신앙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제4단계 청년기에는 신앙의 거듭남이 이루어진다. 소속 집단에 대한 암묵적 헌신으로 신앙을 유지하기가 힘든 시기다. 스스로 검토하고 동의할 때만 신앙 정체성이 유지된다. 성인이 된 자아는 학습된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하려 한다. 경계를 세우고 관계할 사람을 채택하게 된다. 많은 사람이 자신만의 신앙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해서 청년기에 신앙을 떠난다. 4단계로 나아가기에 적합한 시기는 청년기지만, 많은 사람이 30-40대가 될 때까지 3단계 신앙에 머물러있다는 점도 숙고해볼 만한 주제다.
교회를 떠나지는 못하는 장년층이 교회를 더 적극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신앙 방식에만 머물러있는 현상은 꽤 흔하게 볼 수 있다. 5단계 결합적 신앙, 6단계 보편적 신앙까지 나아가는 사람은 드물다. 이런 유의 사람들이 드물게만 보이는 것도 3단계에서 4단계로 잘 넘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3단계에서 4단계로 전이되기가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교수 방법을 지적할 수 있다.2) 신앙 교육이 주입식으로 이루어질 경우에 발생하는 문제다. 주입식 교육은 개인 고민이나 갈등과는 분리된 채로 비참여적 방식으로 진행된다. 결국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은 신앙 이야기는 청년들에게 들리지 않는다. 고민과 갈등을 수용하지 않고 부정적 요소로 받아들이는 기독교 문화에서는, 현재 자신과 맞부딪히는 문제(세계관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몸부림)에 대한 대안을 얻기가 힘들다. 따라서 다른 기관이나 비신앙 공동체를 통해 자신의 경계를 정하기로 결심하기도 한다.
캠퍼스 현장에 필요한 복음
“졸업하신 분들에게 캠퍼스 상황을 전달해 드리려고 해. 지금 캠퍼스 선교 현장의 생태계가 어떤 거 같아?”
동아리방에서 급히 노트북을 두드리며 소그룹 모임을 기다리는 2-3학년 학생들에게 물었다. 부정적인 키워드부터. 고도화된 개인주의, 기독교에 대한 냉소, 망설임 없는 배제. 내가 느낀 그대로였다.
“이것들이 선교를 위한 기회로 작용할 순 없을까?”
여기서 의외의 답이 등장했다.
“예배 형식이 다양해진 거요. 이게 정말 좋은 것 같아요.”
제도 바깥에서도 예배할 수 있다는 인식이 넓어진 것이 곧 기회라는 말이었다.
“대학생들이 진리와 상식에 대해 더 엄밀해진 게, 우리에겐 이점 아닐까요?”
오, 좋은 지적이었다.
“너희 열심히 공부하게 계속 질문을 받아야겠네!”
“학과 생활에 정이 없달까요. 위선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정직하게 자신을 인정한다면 더 찾게 되겠죠. 진솔한 관계와 공동체를요.”
긴장감으로 관계를 이어가는 친구들이 예전보다 더 많아졌다. 자기 얘기가 어디서 어떻게 돌아다닐지 몰라서 입단속하고 허풍을 떨거나 나대지 않으려고 특히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 조별 과제에서도 ‘빌런’으로 찍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관계를 맺을 때 지나치게 적은 리스크를 감당하려는 문화가 되어 찍고 찍히는 일이 더 빈번해졌다. 신앙이 있든 없든, 살아남기에 지친 청년들이 안전한 공동체를 찾아 들어온다.
이쯤 되면 위기보다 기회가 훨씬 크지 않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다. 기독교 공동체는 정이 넘치고 관계를 중시하는 곳이라는 슬로건이 잘 통해야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안전한 공동체로 택하기에는, 학교에서 ‘많이 특이한 곳’이라는 입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고많은 동아리 중에 기독교 동아리에 들어가다니. “너 참 신기하다”는 말을 들어도 괜찮아야 한다. 이렇게 바뀐 것은 전적으로 환경 탓이다. 매번 새롭게 악영향을 끼치니 성질만 내다가 다른 대안을 찾아보게 된다.
복음이 나를 어떻게 형성해왔는지 돌아보았다. 내가 20대일 때 복음으로 가장 달라진 것은 무엇이었나. 직업, 재정 관념, 성격, 습관, 우선순위… 심지어 인상?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큰 것은 내가 나 때문에 헤매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헤매더라도 어디에 기대어 다시 서야 할지를 알게 되었다. 인생관이나 신앙의 색깔과 방향은 계속 달라질 테고 지금 붙잡고 있는 것도 이 시기에 적절한 답일 뿐이겠지만, 적어도 나를 지키는 방법은 알고 있다. 그래서 학생들이 회의와 불신을 보여도 매번 질문할 용기가 난다. “자, 얘기해보자. 대체 왜 안 믿는 걸까?”
그곳에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존재가 아닐 것이다. 또한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나, 천사들이나, 두뇌 용량이 좀 더 큰 유인원이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 완전히 인간일 것이다. 니체라면 이를 싫어할 것이다. 니체는 심지어 지상의 인류를 가리켜 “인간적, 너무나 인간적”이라고 했다. 그곳에 슈퍼맨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 변화될” 것이되 반인이나 슈퍼맨이나 비인간이 아니라 완벽히 인간적인 무언가로 변화될 것이다.3)
단단한 인간성을 가진 예수의 삶과 인격, 그리고 우리는 그분과 같아지는 여정 중에 있다는 가톨릭이 말하는 종말론 비전이 대학생들에게 필요하다. 복음전도도, 공동체를 이루는 삶도, 선교단체 리더가 되거나 모임에 참여하는 이유도 모두, 이 비전 아래 놓인다. 우리는 종국에 예수님과 같아질 테고, 부활 이전의 세상에서 우리의 육체는 한계가 많을지언정 우리가 내리는 선택의 중심은 그리스도와 같은 것으로 변화되어 가리라.
물론 선교단체는 그것을 폭넓고 체계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청년들은 지금 자신이 무엇을 위해, 어디로 성숙해가야 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그 과정에 복음이 하는 일을 스스로 깨닫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복음을 수호할 필요가 없다. 광장에서 복음을 외칠 필요도 없다. 우리가 복음을 지켜내는 게 아니라 복음이 우리를 지킨다. 우리가 복음을 확장하는 게 아니라 복음이 우리를 확장한다.
성령충만이 예수님을 오히려 참인간이게 했듯이, 우리는 내주하시고 통치하시며 본이 되시는 삼위 하나님을 따라 참인간됨을 계발하는 방향이면 충분하다. 어느 모로 보나, 예수님 모습을 닮아있는 한 사람이 되는 일로 세상 가운데서 복음의 진위가 가려질 것이다.
배우고 선교하지 않는다, 선교하며 배운다
청년들로 하여금 이 변화의 여정을 ‘시작’하도록 하는 게 결코 사역자들의 능력 여하에 달려있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의 방향을 결정하는 자들이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일이 있다. 복음에 대한 숙고와 선포는 선교의 ‘현장’, 곧 총체적으로 선교적인 환경에서 이루어진다. 이 현장을 학생들과 이어주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쉽게 말하면, 고난 없는 환경에선 복음이 치열할 수 없고 단단한 인격의 예수를 따라가볼 기회가 없다.
배제와 차별보다는 포용과 환대가 더 어렵다. 사람을 포기하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것이 더 어렵다. 힘 있는 자들과 어울리는 것보다는 힘없는 자를 고려하는 게 더 어렵다. 자원을 풍족히 사용하는 것보다는 절제하고 나누는 게 더 어렵다. 현장이란, 보다 어려운 일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길어봐야 4년여 시간이다. 내게 주어진 것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서 말씀을 실천하도록 하는 일, 그것으로 대학생들은 복음을 배운다. 십자가와 부활이 나에게, 그리고 세상에 하는 일을 배운다.
복음의 총체성은 목표라기보다는 모든 배움의 배경이다. 사역자는 우리의 한계와 마주치면서, 성령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을 주목해서 보는 현장을 제공하고 연결해야 한다. 이 사역에 성공과 실패가 없는 것은 현장을 이루는 일이 당장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이 하실 법한 일을 하는 것일 뿐이다.4) 이때 우리는 작은 예수로 지어져간다. 이들이 졸업한 후에 삶이 하던 일을 습관처럼 하되, 자유로운 주되심 속에서 한다면 더 바랄 게 없다.
거창할 것 없이 나와 다른 인격들을 평등하게 대하며 화목하되, ‘소금’을 두고 그리해야 한다면 이는 충분히 어려운 과제다.5) 선배 리더가 후배를 위해 돈을 아끼면서 다소 무리가 되는 선을 행하는 것은 누구도 하지 않는 일이다. 평소 만날 수 없는 이들에 대한 소식을 듣고 애통하고 위로하기를 배운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다. 부족하지 않아 보이는 이들이 부족하다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우리는 마침내 선명히 보게 될 그날을 기다린다.6)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은 여러 세계를 걸쳐서 살피며 공부해야 할 신학이 많아진다면,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교되고 있는 셈이다.
신학을 마음의 습관으로 익힌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특정 정보를 습득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보다는 무언가를 몸으로 익히는 것, 혹은 요령을 터득하는 것과 유사할 것입니다. 신학을 마음의 습관으로 익히는 과정은 신앙의 모든 신비에 ‘거하게 되어’, 신앙의 눈으로 모든 상황에 담긴 깊은 의미를 파악하게 되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 의미를 느끼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삶, 하나님의 생명과 활동의 빛 아래 세상을 읽는 일이 거의 제2의 본성이 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7)
이 습관은 평생에 걸쳐 일어난다. 캠퍼스 현장에서 함께하는 아래의 친구들이 내 동료이자 나를 선교하는 이들인 까닭이다. 이들과만 매주 8시간은 붙어서 기도하고 선교에 대해 떠들며 말씀을 연구하고, 연구한 그대로 살아보기 위해 애쓰고 있다.
가면을 벗고 나를 드러내는 연습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 2021학번 이수현
- 복음이 내 얘기로 들리거나 전해진 현장은 어디였는가?
친구들과 학과 생활을 하는 것이 더 즐거워서 하나님을 떠났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나를 유능하고 좋은 사람으로 포장하며 살았다. 그러나 채울 수 없는 공허감이 들었고, 결국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IVF를 찾았다. 기도 모임, 연합 예배, 원투원 시간, 리더 모임, 소그룹, 개인 묵상… 모든 것에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메시지가 들려왔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리더 팀북으로 함께 읽은 헨리 나우웬의 《영성 수업》(두란노)이다.
‘우리 각자 안에는 ‘너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내적인 음성이 있다. 당신이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주장하기 바란다. 당신은 하등 무익한 이런저런 추구에 빠질 필요가 없다. 조종하는 세상의 피해자가 되거나 어떤 종류의 피해자가 되거나 어떤 종류의 중독에 갇힐 필요도 없다. 원하기만 하면 당신은 참된 내적 자유를 찾아 지금이라도 손을 내밀 수 있다.’
이 부분을 같이 나눌 때 간사님이 설명을 덧붙이셨다. “하나님께 사랑받기 위해서는 어떠한 자격도 필요가 없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의심스럽고 기뻤던 것 같다. 나는 평생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냥 사랑을 주신다는 이야기가 내게 정말로 기쁜 소식이었다. 가면을 벗고 연약한 나를 공동체원들과 하나님 앞에서 드러내는 연습을 시작하게 된 것 같다.
- 캠퍼스 속에서 복음이란 무엇인가?
청년들은 대학 사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우호적인 친구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고, 유능함도 갖추기 위해 학업에 충실하며 취업하기 위한 경쟁력을 쌓아야 한다. 그러나 관계의 날씨는 변덕스럽고, 경쟁은 만족감을 안겨주지 못한다. 열심히 달려가도, 삶의 수면 아래에는 공허와 불안, 분노가 일렁인다. 복음은 우리의 내면을 수면 위로 이끌어내어 진실한 햇살을 비춰준다.
우리의 가치는 친구 관계나 외모, 학점, 스펙에 달려있지 않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서 있는 그대로 충만히 존재할 수 있다. 죄악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세상이 손상되었지만, 예수께서는 사랑의 희생으로 회복을 약속하셨다. 우리는 그것을 값없는 선물로 받았다. 스스로를 치열하게 증명해야 하는 청년들에게 존재의 진정한 가치를 알려주는 것이 캠퍼스 안에서 들려야 하는 복음이다.
“복음은 존재에 대한 용납이다”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 2020학번 박서현
- 복음이 내 얘기로 들리거나 전해진 현장은 어디였는가?
대학 생활에서의 복음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용납이었다. 스무 살 처음 대학생이 되었을 때, 선교단체에 들어와 무수히 많은 선배에게 많은 사랑과 환대를 받았다. 인생을 살며, 연인과 가족 말고는 이런 사랑을 받은 적이 없던 내게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코로나로 떨어져있던 시간, 리더 언니 오빠들은 바울이 교회에 편지를 보냈듯이 전화와 카톡으로 나의 안부와 의견을 끊임없이 물었다. 모임을 위해 시간을 조정하고, 콘텐츠를 준비하는 등, 온라인으로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관심과 사랑이 나에게는 닿았다.
나는 나에 대해 무지했지만,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리더 언니와 오빠들이 있어 나를 이해할 수 있었고, 서로를 사랑하는 모습에서 예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타인을 이웃으로 보게 되었고, 예수를 따르는 것은 교회에서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깨졌다. 서로를 사랑한다는 이상적인 모습이 말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 눈앞에 그려졌다. 그 복음은 나를 매료시켰고, 이 운동으로 나를 휩쓸었다.
- 캠퍼스 속에서 복음이란 무엇인가?
결국 내가 캠퍼스에서 아직 복음이 ‘복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용납이 먼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친구들은 자신에 대한 인정을 학업과 미래, 친구 등으로 채운다. 그들의 시간은 그것을 위한 시간으로 채워져있고, 대화 주제 또한 학업, 진로, 관계에 대한 고민이 주를 이룬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찾고 그 안에서 안정을 얻고자 하지만 불안해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사람을 발견하고, 내가 경험했던 사랑을 그들과 함께 나누는 일이다. 이러한 용납도 있을 수 있다고, 이러한 관계, 우정도 있을 수 있다며 그들을 삼위일체의 사랑 안으로 깊숙이 초대하는 것이다. 보통은 나 자신을 솔직히 드러낸다. 나는 네가 좋고 너와 함께하고 싶다고, 나는 이러한 사람이라고 솔직히 드러냄으로써 시작한다. 그럴 때 서툴고 어렵지만, 예수님이 맺으셨던 여러 관계가 시작된다. 그러한 관계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간다.
1) 제임스 파울러, 《신앙의 발달단계》(한국장로교출판사)
2) 박노권(목원대학교), KOCW 모두를 위한 열린 강좌, 〈종교심리학 8주차 “제임스 파울러의 신앙발달이론”〉(2013년 1학기).
3) 존 파인버그 외, 《천국에 대한 네 가지 견해》(IVP), 256쪽. 제4장 ‘가톨릭 관점’(피터 크리프트 글).
4)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쓴 《하나님의 선교》(IVP)로부터 영향을 받은 생각이다.
5)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너희는 무엇으로 그것을 짜게 하겠느냐? 너희는 너희 가운데 소금을 쳐 두어서, 서로 화목하게 지내어라. (막 9:50, 이하 새번역)
6)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고전 13:12)
7) 마크 A. 매킨토시, 《신앙의 논리》(비아), 30쪽.
박순영
스물한 살에 회심하고 한국기독학생회 IVF 간사가 되어 6년은 서울에서, 5년은 원주에서 캠퍼스 사역 중이다. 학생선교운동 말고도 육아, 문학, 여성주의, 여행에 관심이 많다. 봄내평화 시민센터 소속 회복적 서클 진행자로도 활동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