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호 커버스토리] 김용균 재판 유족 대리인 박다혜 변호사

ⓒ복음과상황 정민호<br>
ⓒ복음과상황 정민호

2018년 발생한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 사고는 스물네 살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 김용균 씨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한 사건이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발전 설비 운영과 유지 및 보수를 담당하는 하청업체인 한국발전기술의 직원이었던 故 김용균 씨는 발전소 컨베이어벨트를 점검하는 운전원이었으나 입사한 지 3개월 만에 사망했다. 참혹한 사고 현장이 알려지면서 사회적 공분이 일었다. 이후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되고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2022년 2월 1심 법원은 원청업체인 한국서부발전에 사고 책임이 있다고 인정했으나 원청 대표에게는 무죄판결을 내렸다. 2심 재판은 올해 2월에 판결 선고가 예정되어있다.

김용균 재판에서 피해자 대리인을 맡고 있는 박다혜 변호사는 7년째 민주노총 법률원(법무법인 여는)에서 일하는 노동 변호사다. 박 변호사는 2017년도부터 본지를 구독해온 독자이자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서 기독교학 입문 과정을 밟고 있는 기독교인이다. 그런 그에게 ‘안전한 일터’ 너머 노동자가 무사한 사회는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 들었다.

- ‘안전사회’라는 주제로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대뜸 ‘이걸 과연 사람들이 읽겠느냐’고 했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듯한 故 김용균 사망사고 이야기를 교회 안에서 꺼냈을 때, ‘한 번도 못 들어봤다.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자세히 설명하면 너무 안타깝다고 이해하시지만, 아무리 언론에서 화제가 되어도 다수의 그리스도인에게 노동자 이야기는 관심을 끌지 못한다고 느꼈다. 뭐 눈에 뭐만 보인다고 유독 내가 그런 기사를 많이 보는 걸 수도 있다. 내가 더 마음을 다해 설명해야 하는 부분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왜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교회에서 노동자의 이야기는 별로 주목되지 않는지, 왜 이웃의 범주에 노동자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지 안타깝다. 그 간극 때문에 과연 이걸 읽을까 싶었다. 물론 복상 독자들은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들보다 사회를 둘러보는 분들이겠지만.

- 김용균 재판, 삼성직업병 관련 소송 등에서 산재 피해자와 유가족을 대리해왔고, 노동 안전과 관련해 계속 목소리를 내왔다. 신앙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는지 궁금했다.

노동은 내게 온 맘 다하고 싶은 분야다. 법률원에 온 이후 해고, 임금, 산업재해, 차별. 노조파괴, 직장 내 성희롱, 노동조합의 단체교섭 및 파업 등의 쟁의행위, 집회 때 발생하는 형사사건을 맡아왔고, 노동을 둘러싼 일련의 소송과 관련 연구 및 자문도 하고 있다. 교회에서는 내가 이런 일을 한다는 것에 놀라고 일적으로 만나는 분들은 내가 교회를 다닌다는 것에 놀라워하지만, 일이 한 번도 부대끼거나 과제로 여겨진 적이 없었다. 오히려 교회가 항상 과제이고 숙제였지.(웃음) 예전에는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운동에 교회가 역할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교회와 노동운동, 사회운동의 결이 서로 다르고 때로는 원수지간처럼 싸우지 않나. 한국교회를 두고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게 내 문제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한국교회라고 통칭되는 집단에 속해있다고 느끼지 않아서다. 어디까지가 내가 속하는 느슨한 공동체이고, 어디까지를 내가 몸담은 한국교회로 감각하며 살 건가 했을 때 복상 정도가 그나마 바운더리 아닐까? 독자들이 이 사건에 대해 몰랐어도, 알게 되면 공감하고 함께 아파할 거라고 느낀다. 평소 너무 일에 몰입하다 보니, 사실 이 정도도 많이 애쓴 거였다.

- 변호사로서 ‘곁’이 되는 일들을 하면서 어려운 점이 있다면.

흔히 변호사 일은 의뢰인과 거리두기를 잘해야 오래 한다고 하는데, 나는 거리두기를 잘 못 한다. 공익변호사나 노동변호사가 아니어도 변호사는 누군가의 싸움이나 일생일대의 분쟁을 들여다보는 일이기 때문에 스트레스 지수가 높은 직업이다. 몰입해서 일하되 감정적으로 거리두기를 잘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서면을 쓸 때도 울면서 쓸 때가 많은데, 이렇게 해서는 이 일을 오래 하지 못하겠구나 싶을 때도 있다.

故 김용균 사망사고처럼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을 잃은 유족이 사건을 위임하는 경우, 힘들어하는 유족 곁에서 이 사람의 흔적을 쫓아가다 보면 심정적으로 힘들 때가 있다. 자살 사건도 메모나 일기 같은 걸 보면서 이 사람의 심정을 유추하고, 같이 일한 동료들에게 증언해달라고 요청하고, 소견서 하나라도 받으려면 당사자의 마음으로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많다.

&nbsp;인터뷰는 1월 5일 김용균 재단 사무실에서 진행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인터뷰는 1월 5일 김용균 재단 사무실에서 진행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 김용균 사건을 진행하면서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나.

회사 측 변호사가 유족들에게 모욕적인 말을 많이 했다. 컨베이어벨트 점검구에 그렇게 가까이 가서 일하라고 시킨 적이 없는데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서 죽었다고. 처음에는 용균 씨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에게 법정 증인 심문할 때 나가 계시는 게 좋겠다고 얘기했는데 당신은 끝까지 이걸 보겠다고 하셨다. 매번 비슷한 모욕을 듣지만, 그때마다 상처가 될 거다.

용균 씨는 컨베이어벨트에 문제가 있으면 사진이나 영상을 찍어 카카오톡으로 보고해야 했다. 남긴 영상을 보면 칠흑같이 깜깜해서 설비가 잘 안 보이는데, 점검구에 몸을 넣어 휴대폰 불빛으로 비춰보며 일해야 했다. 사고 후 동료들이 계속 용균 씨를 찾고자 담당구역을 돌았는데, 너무 어두워서 한 서너 시간을 헤매다가 발견했다.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시신이 수습되기도 전에 회사는 옆 컨베이어벨트를 돌렸다. 장례식장에 회사 측 사람들이 와서 유족에게 한 첫말도 그렇게 가까이에서 일하라고 시키지 않았는데 시키지 않은 일을 하다가 죽었다는 거였다. 정확히 확인해서 한 말도 아니었고 무조건 피해자 탓을 하는데, 그 주장이 지금의 변론까지 이어졌다. 사고 직후 대통령도 장관도 사과하고, 서부발전도 사과문을 유족이 아닌 언론에 냈지만 어쨌든 고개 숙이고 책임지겠다고 했다. 그런데 재판 과정에서는 고인에게 죄송하다는 얘기는 한 문장만 있을 뿐, 책임 이야기는 싹 사라졌다. 계속해서 피해자 탓을 하면서 무용한 죽음으로 만드는데, 김미숙 어머니는 그 얘기가 상처가 되셨을 거다.

- 노동조합과 유족이 사고 직후부터 진상조사를 요구하며 투쟁해왔다.

유족이 사건 이후 제대로 진상조사를 하고 싶다, 그리고 그 진상조사를 회사나 정부에게 맡겨놓지 않겠다, 노조와 노동자들이 추천한 전문가들이 같이 참여하는 조사위원회를 꾸려 비정규직의 안전 문제를 포함한 구조적인 문제까지 제대로 짚고 싶다는 의사가 분명했다.

특히 어머니인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은 이 사건 이후 활동가가 되셨다. 어머니가 사건의 진상조사부터 산업안전보건법(이하 ‘산안법’) 개정, 중대재해처벌등에관한법률(이하 ‘중대법’) 제정 등을 위해 여러 번 단식 농성도 하셨는데, 그런 극단의 싸움을 하지 않고서는 이 문제가 제자리를 찾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중대재해는 계속 발생하는데 경황이 없는 유족들을 지원해줄 사람이 전혀 없고, 내 가족의 죽음이 의미가 없지 않으려면 이후에 개선되는 것들이 보여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담보되지 않는다. 그래서 매번 유족들이 바닥으로 내려가서 투쟁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국회에서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논의가 진행되던 시기 노동법률단체 기자회견에 참가한 모습. (사진: 인터뷰이 제공)
국회에서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논의가 진행되던 시기 노동법률단체 기자회견에 참가한 모습. (사진: 인터뷰이 제공)

- 이 사건의 본질을 짚는다면?

일터가 위험했을 때 그 위험이 누구에게 전가되는지 보여주는 사건이다. 공공기관인 서부발전(원청)은 하청업체와 도급계약을 맺고 하청은 하청 노동자와 근로계약을 맺는데, 이때 하청 노동자는 원청 소속의 정규직 노동자와 계약상 지위와 임금만 다른 게 아니라 직면하는 ‘위험의 정도’가 달라진다. 일터가 위험하면 비정규직은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커진다는 거다. 원청이 직접 관리하고 더 꼼꼼히 봐도 부족한데 원청이 고용한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인력 투입이나 설비 개선에 있어 모르쇠로 임하면 평소에도 위험도가 올라가지 않겠나. 원청이 하청 노동자가 담당하는 설비를 소유 및 운영하고 작업 속도와 작업량, 인력을 몇 명 투입할지 등을 모두 결정하고 있음에도 중간에 하청업체를 끼워 간접고용을 유지하면서 권한과 이윤은 갖되 책임은 지지 않을 수 있는 외관을 만들어냈다. 발전소 현장이 워낙 위험해서 이전에도 비슷한 사고가 발생했는데 노동부와 법원이 경미한 사건으로 처리했고, 계속 개선 요구들이 있었지만 거듭 묵살됐다.

이 사건의 더 큰 문제는 이게 민간 기업이 아니라 국가가 운영하는 공공기관에서 일어난 사고라는 사실이다. 사고 직후 책임자들이 고개 숙였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건 현장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위험한 일을 상시적으로 하는 비정규직 처우가 얼마나 개선되었는지다. 그런데 기대하고 요구했던 만큼 진전되지 않았다.

- 그 이후 또 한 번의 사고가 있었다.

노동조합이 투쟁해서 2인 1조 요구가 받아들여졌는데, 한 명이 설비에 끼었을 때 다른 사람이 라인을 바로 정지시킬 수 있었기에 다치는 수준으로 끝났다. 이전에 그런 조치가 있었으면 용균 씨가 죽지 않았으리라는 게 확인된다. 김미숙 어머니도 우리 아들은 죽었지만 그 이후 있었던 조치 때문에 누군가 살았으니 정말 다행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재판에서 회사 측 변호사는 컨베이어벨트는 애초에 위험하지 않은 설비여서 2인 1조도 방호장치도 필요 없지만 노조가 요구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실시했다고 주장했다. CCTV도 목격자도 없는데 왜 이 사람이 일하다 죽었다고 단정 짓느냐고도 했다. 회사가 CCTV를 안 달았고 2인 1조를 안 했으니까 목격자가 없는 건데, 유족과 동료들은 억장이 무너진다. 공공기관이기 때문에 사후 조치를 위해 국가 예산도 투입했고 사고 직후 자기들이 사과하고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로도 인정받았는데 형사책임을 묻는 절차에서는 전혀 다른 얘기를 하는 거다.

산재 사건에서 피해자 탓을 하는 건 너무나 전형적이지만 이 사건은 유독 회사 측 변호가 치열하다. 이렇게까지 피해자를 모욕하고 이렇게까지도 피고인을 변호할 수 있구나 놀랄 정도다. 중대법 제정 전 발생한 사건이라 이 사건에 중대법이 적용되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은 로펌이 중대재해 사건을 이만큼이나 잘 대응한다는 것을 기업에게 보여주는 일종의 선전물이기 때문인 것 같다. 기업에서 이전에는 안전보건과 관련해 돈을 쓰지 않았지만 중대법이 생겨 비로소 관심을 갖고 돈을 쓰고 각 로펌도 중대재해 대응 센터며 엄청나게 선전을 많이 했다. 자본이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그 이후에도 책임을 피하기 위해 이만큼의 노력을 할 수 있다는 걸 법정에서 보고 있다.

- 안전장치 마련보다는 책임을 면하기 위한 노력에 더 많은 돈을 투자하는?

500원짜리 안전장치를 하지 않아서 노동자가 사망한 사건도 봤는데, 한 푼이라도 아낄 수 있으면 아끼는 식이다. 설령 죽지 않았더라도 한국처럼 사회안전망이 없는 상황에서 일하다가 다치고 병 든다는 건 사실상 생계 수단이 사라지는 건데, 이 사람의 삶을 하찮게 여기는 거다. 그것이 우리의 기술 수준에 비해 재해 사망자 비율이 굉장히 높은 근본 원인이라고 본다. 산안법에 기반해 원청에 부과하는 벌금액의 평균은 400~500만 원대다. 사회적으로 주목받았던 김용균 사건조차 벌금이 2천만 원에 불과했다. 그리고 산재 사건의 10건 중 9건의 결론은 집행유예 아니면 벌금형이다. 징역형이 내려지는 정도가 3%에 못 미치는데, 그조차도 몇 개월에 불과하다. 단적으로 법원이 이 사안의 중대성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보여주는 수치다.

- 전체 산업재해 사망사고 중에 하청 사망사고가 40% 수준을 차지하고, 하도급이 관행화된 건설(54%), 조선(73%)에서 하청 근로자 사망사고가 다발하고 있다.

그래서 노동 안전의 키는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있다고 보는 측도 있다. 통상적으로 한 사업장에서 하청 노동자가 훨씬 더 많이 죽는다. 한전 같은 대규모 공공기관이나 대기업이 산재 ‘무재해’를 얘기할 수 있는 건 죽은 이들이 하청 노동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죽음은 원청의 산재로 잡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故 김용균 사망사고가 그 전형이다. 발전소라는 위험한 일터에서 가장 숙련되지 않은 사람, 청년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라는 가장 약자가 죽은 사건.

- 중대법의 필요성이 대두돼 제정됐다.

기존 산안법은 소위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만을 보호해서 배달 및 택배 노동자들 같은 특수형태 고용직(특고) 노동자, 용균 씨 같은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이에 해당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부는 산안법을 개정하면서 보호 대상을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서 노무를 제공하는 자로 확대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 공언한 만큼 법을 만들지는 못해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이라 불린다. 반면 중대법은 보호 대상이 노무를 제공하는 모든 ‘종사자’로, 특고 노동자나 하청 노동자도 동등하게 포함하고 있다. 또한 경영 책임자를 콕 집어서 이러이러한 안전·보건을 확보할 특정한 의무가 있다고 부여한다. 현장에 없어서, 현장을 잘 몰라서라는 기존 변명이 통하지 않게 됐다. 사실 기업이 현장 노동자들의 노무를 제공받아 이윤을 창출하면서 이들의 안전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중대법의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측도 있지만 50인 미만 사업장 적용이 2024년부터이고, 무엇보다 법 시행을 지난해부터 했는데 벌써 실효성을 평하는 것은 굉장히 이르다. 아직 기소돼서 판결받은 사건이 한 건도 없고, 기소된 것도 여섯 건 정도에 불과하다. 판결과 그와 관련한 법원의 해석들이 쌓여야 법 제정이 실제로 현장에서 어떤 의미인지 파악되고 그에 맞는 규범이 정착될 거로 생각한다.

ⓒ복음과상황 정민호<br>
ⓒ복음과상황 정민호

- 현장에서는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나.

정부가 아닌 사업주와 노동자가 현장 안전을 위한 ‘주체’가 되는 게 필요하다. 사업주가 산재가 발생했을 때 지게 되는 부담은 형사처벌 벌금이나 과태료, 근로감독에 의해 발생하는 안전 조치 및 작업 중지로 인한 비용에서 발생한다. 지금까지는 재해가 발생해도 대부분 400~500만 원 수준의 벌금이나 집행유예에 따른 부담, 그리고 중대법이 생기고 조금 올라가긴 했지만 얼마 안 되는 정도의 합의금만 내면 됐었다. 이 정도의 비용마저 하청 노동자가 손가락과 다리 잘리는 수준 정도로는 발생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에, 합리적인 사업주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중대재해가 발생한 라인만 멈추는 게 아니라 현장에 있는 기계에도 위험 요소가 있을 수 있으니 멈추고 감독하게 한다면? 중대재해가 발생하기 전에도 위험이 발견되면 작업을 멈추고 무조건 조치를 먼저 취해야 한다면? 사업주 입장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선제적으로 조치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길 것이다.

이때 중요한 건 노조의 역할이다. 안전 조치들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상시적으로 감독할 수 있는 건 결국 현장에 있는 노동자들이기 때문이다. 근로감독은 지금보다 늘리긴 해야겠지만 근로감독관이 모든 현장에 지키고 있을 수는 없다. 결국 상시적으로 안전에 가장 큰 이해관계가 있는 자들이 감시자가 되어서, 안전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작업할 수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어떤가. 지금 맡아서 진행하고 있는 사건에서도 노조가 산재가 발생했던 위험한 설비에 조치가 필요하다고 하자 회사는 나중에 조치할 테니 일단 가동하라고 했다. 그러자 노조 간부들이 작업 중지를 했는데, 회사는 업무방해라면서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를 했다. 이 사건도 노조가 어느 정도 조직력이 있고 설비나 작업에 대한 내용을 잘 파악하고 있어서 위험을 인지하고 작업을 멈출 수 있었던 거다. 안전하지 않아서 작업을 멈춘 것만으로 민형사상 책임을 지거나 관련 분쟁에 휩싸일 수 있다면 누구든 문제를 제기하기가 굉장히 어렵지 않겠나.

- 관련해서 최근 노란봉투법 제정(노조법 2, 3조 개정)이 언급되고 있다. 파업에 대한 손해배상과 가압류를 금지하고, 원청이 실질적으로 사용자 책임을 갖게 하자는 등의 내용이다.

노란봉투법 제정을 요구하는 취지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아까 사례에서 언급된 것처럼 안전하지 않아서 작업 거부를 하거나 파업을 한다고 했을 때 너무나 쉽게 민사 손해배상 청구를 하거나 가압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제한하자는 취지다. 이는 보통 가장 선두에 선 노동조합 임원 간부들 재산을 향하는데, 한마디로 열심히 목소리를 내면 이렇게 된다는 걸 보여주는 거다. 또 다른 하나는 진짜 사장이 교섭에 나서게 하자는 거다. 원청이 하청 노동자와 계약한 적 없다고 하청 노조와의 교섭을 거부하고, 그래서 노조가 파업하면 ‘불법 파업’이 되는데 지금 노조법은 원청과의 교섭을 기본적으로 법에서 정하고 있지 않다고 통상 해석한다. 불법 파업을 하면 손배·가압류가 따라오고, 합법 파업이 되긴 너무나 어렵고 ‘불법 파업’이 되기 무척 쉬운 구조에서 진짜 책임 있는 사람과 교섭하게 하자, 손배·가압류를 제한하자는 취지다. 직접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교섭 요구에 자연스럽게 응하는 사용자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노동자들이 단체교섭을 하고 단체행동을 하는 건 헌법상 권리인데, 지금 현실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조를 한다고 했을 때 딱 머리에 떠오르는 절차들이 있고 이게 얼마나 험난한지 알기 때문에 나라면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노조법이 개정되면 특고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노조로 조직돼서 무언가 해보겠다고 마음먹는 일이 조금은 쉬워질 거다.

- 몇 년이 걸려 마침내 승소해도 그동안 노동자들의 일상은 많이 힘들어지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법은 절대 약자들의 수단이 아니다. 그 시간을 버텨낼 힘을 가진 이에게 소송은 너무 좋은 도구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정말 피 말리는 싸움이다. 그럼에도 진짜 힘없는 사람들이 소송을 많이 한다. 가진 게 없어 법의 힘이라도 빌리거나 혹은 법으로 공격당해 방어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얼마 전 국가가 쌍용차 파업 노동자들과 노조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파기환송되었는데, 파업이 2009년도 일이니까 이 사안이 해결되는데 10년이 더 넘게 걸린 거다. 그동안 노동자들은 해고는 물론이고 국가폭력과 국가가 제기한 소송으로 많은 가정이 무너졌고, 경제적으로 힘들었으며, 그 과정에서 목숨을 끊은 이들도 있었다. 몇 년이 걸려 마침내 승소해도 그걸 정말 이겼다고 말할 수 있는지 번민할 때가 많다.

- 노조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안 좋다.

노동 혐오 혹은 노조 혐오가 많이 보이는 것 같다. 가령 비정규직 청소 노동자들, 누가 봐도 저임금 노동자이면서 시혜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시급 440원을 올려달라고 하면 시민들 분위기가 비교적 부드럽다. 경비 노동자들이 에어컨 좀 달아달라고 부탁하면 입주민들이 십시일반 모아서 돕는 미담도 있다. 그런데 에어컨 달아달라는 이야기를 노조를 조직해서 교섭 요구안으로 내밀면? 참을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약자가 일터의 공동체를 이루고 조직으로 뭉쳤을 때, 더 이상 시혜의 대상이 아닌 권리의 주체로서 무시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직감하는 게 아닐까.

물론 노조가 노동자의 언어가 잘 전달되도록 세심하게 노력했는지에 대한 평가와 고민도 필요하다. 노동 안전이 모두의 안전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 잘 설득하지 못했다는 생각도 든다. 지난해 광주 화정동에서 신축 공사하던 아파트가 붕괴했을 때 현장 노동자뿐 아니라 시민들도 피해를 입었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이 일어난 지하철 화장실도 누구나 갈 수 있는 공공장소였고, 피해자가 지나가는 다른 시민이었을 수도 있었다. 화학 공장에서 누출 사고가 일어나도 역시 노동자뿐 아니라 주민들과 환경까지 영향을 받고, 지하철 지하 공간에서 노동자들은 라돈이라는 폐암 유발 물질들로 산재 피해를 당하지만 이곳은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곳이기도 하다. 일터만의 문제가 아니다. 노동자의 삶과 시민의 삶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사람들이 내몰려 떨어지는 위험한 절벽이 있을 때, 그 밑에서 응급처치를 하는 사람도 있고 절벽 위에서 울타리를 치는 사람도 있다. 교회는 절벽 아래로 떨어진 사람들, 산재 피해와 부당 해고를 당한 이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데까지는 같이한다. 그런데 이들이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게 울타리, 즉 제도를 바꾸자고 하면 머뭇거리는 한 겹의 장벽이 있다고 느낀다. 낯설어서인지, 이 땅의 제도나 법이 우리를 구원해주지 않는다고 여겨서인지 모르겠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고, 이 모든 게 과정일 뿐이며 여러 실패의 반복일 수도 있다. 그런데 사회변혁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제도 개선을 말하면 자꾸 ‘이 세상에는 원래 소망이 없다’라 하는 사람이 있다. 오늘날 교회가 뭘 얼마나 열심히 해봤다고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교회에서 가장 듣기 싫은 얘기 중 하나다.

사람들이 떨어지는 절벽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이겠지만, 어쨌든 지금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에게 주신 지혜와 모든 자원을 동원해 사람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울타리를 세워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너무나 쉽게 ‘이 땅은 소망이 없다’고 하면서 믿는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 친절하고 행복하게 예배하고  말씀 묵상하자고 한다.

삶이 예배라고 많이들 말하는데, 삶을 어떻게 예배로 드릴 건지 우리가 정말 아주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나? 손쉽게 소망이 없다거나 이런 활동들이 궁극적인 해결이 아니라고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의 많은 실패들을 딛고 여러 투쟁과 수고 끝에 하나님이 절벽을 없애주실 거라는 소망을 갖고, 그 소망을 위해 정말 다양하게 실천해봤으면 좋겠다. 우리는 더 큰 진리를 이야기하고 큰 꿈을 꾸는 사람들인데, 우리의 실천은 왜 점점 더 작아지고 있는 걸까.

진행 김다혜 기자 daaekim@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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