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호 봄봄]
그때 나는 우선 도청 앞 분위기를 살펴보려고 밖으로 나왔다. 사제관을 나와 성당 앞 철문에 막 이르렀을 때다. 헬기가 기수를 광주공원 쪽으로 향해 가면서 광주천 불로동 다리쯤의 상공에서 불빛이 50센티미터에서 거의 1미터 정도로 쭉 뻗으면서 ‘드드득 드드득 드드득’ 세 번이나 갈기는 기총사격 소리가 들렸다. 혼비백산한 나는 반사적으로 담벽에 바싹 붙어서서 헬기를 응시하였다.3)
미국 침례교회 파송으로 광주 양림동에서 거주하던 피터슨 목사(Arnold A. Peterson)는 “발포는 5월 20일 오후부터 빈번하게 일어났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집 지붕에 있는 발코니에서 … 도시 상공을 날아다니면서 거리의 시민들에게 총을 쏘는 헬리콥터의 사진을 몇 장 찍었다.”4) 피터슨 목사가 찍은 사진엔 총구에서 번쩍이는 불빛이 찍혀있다. 발포 행위가 자위권 발동이었다는 전두환의 변명은 거짓말이다. 조비오 신부 증언과 피터슨 목사 사진으로 사탄 전두환의 갈라진 혀를 확인할 수 있다.
천주교회는 윤공희 대주교와 조비오 신부, 김성룡 신부 등을 5·18 현장을 목격하고 수습위에 참여시키면서 시민들의 희생을 막으려 했다. 특히 조비오 신부는 광주 천주교회를 대표해 시민들과 계엄군 사이를 중재하며, 시민들의 죽음을 막으려 애썼다. 시민군들을 직접 만나며 총기를 회수해 계엄군들에게 과도한 진압 작전을 펼칠 명분을 주지 않으려 했다. 동시에 마지막까지 목숨 걸고 항쟁하는 시민군들을 향한 존경과 애정, 미안함을 잃지 않았다. 조비오 신부는 5월 26일 밤 계림동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면서 신도들에게 이렇게 강론했다.
오늘 밤 광주 시민들이 또다시 비참한 상황을 맞게 될지 모른다. 아벨의 무고한 피로 인하여 죄인은 하느님의 징벌을 받고 광야를 헤매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 국민의 세금으로 양성된 군인들이 무고한 시민을 죽인 동족상잔의 비극은 비참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영문을 모르고 죽어간 시민들의 목숨과 불의에 항거한 젊은이들의 피는 광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를 도탄에서 구할 수 있는 의로운 피가 될 것이다. 의인의 억울하고 애통한 죽음과 그 피는 하늘에 사무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염원을 꼭 들어주실 것이다.5)
하ᄂᆞ님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죽은 자에 관하여 물으신다. 하ᄂᆞ님은 죽은 자들의 호소를 들으시고 살아있는 우리에게 죽은 자에 관하여 물으신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 4:10) 살아있는 사람이 외면과 무지로 듣지 못하는 소리를, 하ᄂᆞ님은 들으신다.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 11:4) 억울하게 죽은 자 아벨의 음성을 들으시고, 가인과 가인의 후예인 우리들에게 물으신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 4:9)
5·18 당시 신앙인으로서 시민군이 되거나, 목회자 개인 자격으로 수습위에 참여한 목사들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 개신교회는 당시 상황을 해석하지 못했지 싶다. 이른바 ‘복음주의’ 신학의 자리에 선 목회자들은 정치적 중립을 기계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판단했지 싶다.
1980년 5월 계엄군이 광주시민들에게 총을 쐈다. 아스팔트 위에선 앉아쏴, 고층 빌딩에선 조준 사격으로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총을 쐈다. 총 맞아 쓰러진 사람을 부축한 이를 향해서도 조준 사격을 했다. 당시 발포에 대해 전두환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자위권을 발동한 것이라 변명했다. 국제법상 자위권(自衛權, self-defence in international law)이란 외국 군대가 불법 침입했을 때 자국민을 지키기 위해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다. 전두환은 계엄군의 폭력에 저항하는 시민들을 불법 침입한 외국 군대로 다룬 것이다. 휴전선에서 가장 먼 반도의 남쪽, 남해와 서해로 둘러싸인 남도의 거점 도시로 외국 군대가 침입해 쳐들어왔다는 말인가. 외국 군대가 쳐들어오지 않았는데도 군대가 자위권을 행사했다면, 광주 75만 시민들이 외국 군대라는 게 전두환의 주장인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