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7호 내 인생의 한 구절]

엄마가 이상했다. 며칠간 스르르 내 방에 들어와서는 멍하니 침대에 앉았다 나가기를 반복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고 물으면 그냥 네 방이 좋아서, 아들 공부하는 모습이 멋있어서, 라고 답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궁색한 변명도 한두 번이지 분명 뭔가가 있었다. 엄마의 이상행동을 감지한 지 닷새쯤 되던 날, 참지 못하고 물었다.

“엄마, 응가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지 말고, 속 시원히 말 좀 해봐! 뭔 일 있는 거지?”

또 이상한 변명을 대려던 엄마는 순간 변비라도 걸린 듯 이를 악물었다. 오늘은 기필코 엄마의 뚫어뻥이 되리라 작심한 나는 계속 말해보라고 펌프질해댔다. 얼마나 물어뜯었던지 손톱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엄마의 열 손가락이 허벅지 위에서 무언가를 할퀼 듯한 모양으로 오그라들었다. 찰랑거렸던 엄마의 바지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부터, 엄마가 하는 말… 잘 들어. 놀라지 말고…. 사실 네겐… 여동생이 한 명, 있었어. 지금, 다섯 살이야. 너랑은 띠동갑이구나, 그런데…”

한 단어, 또 한 단어 토해내는 엄마의 입 모양에 시선이 쏠렸다. 어린 시절 엄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에 쫑긋 귀를 세웠던 이후로 얼마 만인가. 시간이 흐르자 절뚝거렸던 엄마의 말이 과거를 향해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지금껏 엄마가 들려준 어떤 이야기보다 길고 복잡하며 기괴했다. 10년 가까운 세월이 농축된 이야기에 나는 쓰디쓴 진액을 들이켠 것처럼 머릿속이 얼얼해졌다.

“엄마, 지금 왜 〈은실이〉 이야기를 하는 거야? 요즘 드라마에 너무 빠진 거 아니야?”

당시 엄마가 즐겨봤던 SBS 드라마 〈은실이〉는 평균 시청률이 30%에 달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공교롭게도 얼마 전 주인공 은실이가 사생아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생모가 은실이를 생부 집에 버리다시피 하고 도망간 회차가 방영된 터였다. 엄마는 아버지가 주말에만 집에 오기 시작한 때를 기억하냐고 물었다. 초등학교 2-3학년 때인가 아버지가 지방 출장으로 집에 자주 못 온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설명도 엄마에게 들었던 것 같다. 엄마는 그때부터 아버지가 두 집 살림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럭비선수 출신이자 대기업 건설회사 현장소장이었던 아버지. 그는 내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화물 트럭처럼 그저 앞만 보며 폭주하는 괴물이었다. 그가 무용담이라고 들려주는 이야기는 대부분 불법과 폭력, 부도덕으로 얼룩진 역사였다. 군대에서 두 번이나 탈영했고, 상사건 부하건 마음에 안 들면 두들겨 팼으며, 쌓여가는 교통 범칙금을 내지 않고 끝까지 버티다 특별사면으로 땡잡았다는 식의 내용이었다. 그는 언제나 세상 모든 사람을 향해 분노를 쏟았다. 딱 한 사람, 나만 예외였고, 내 앞에서만 천사가 되었다. 나는 그가 과연 악마의 탈을 쓴 천사인지, 천사의 탈을 쓴 악마인지 알 수 없어 늘 불안했다. 제발 내 앞에서 악마가 되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면서.

그는 씀씀이가 헤펐는데 유독 옷과 차에 집착했다. 그의 방에는 한 번 입고 버린 옷더미가 한가득이었다. 전부 자기 체형에 맞게 직접 수선한 옷이라 다른 이에게 줄 수도 없었다. (옷만 보면 지긋지긋하다던 엄마의 말처럼 어린 내게도 결코 유쾌한 기억이 아니었다. 지난해까지 내가 14년간 패션MD로 일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이상야릇하다.) 그는 패션쇼라도 하듯 자가용도 자주 갈아 치웠다. 다른 아이들은 멀리서도 한눈에 자기 아버지 차를 귀신같이 찾아냈는데 나는 눈앞에 있어도 확신할 수 없었다. 심하면 일주일 만에도 바뀌는 차도, 수시로 변하는 얼굴도 뭐가 진짜인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그런 아버지였으니 두 집 살림을 하면서 새파랗게 젊은 여인과 얼마나 흥청망청 살았겠는가. 아버지는 명퇴 이후 퇴직금은 물론 집까지 다 날리며 빈털터리가 되었다. 그러자 젊은 여인은 다섯 살 된 아이를 버려둔 채 자기 살길을 찾아 도망가버렸다. 아마 초혼이라 속이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잘살고 있지 않을까? 벌이도 없이 어린 딸과 단둘이 남겨진 아버지는 염치 불고하고 엄마에게 도움을 청했다. 자기가 다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고, 불쌍한 아이를 봐서라도 합치자고.

‘뭐! 지방 출장이 아니라 딴 집 출장이었다고? 드라마가 아니고 진짜로 내게 은실이 같은 동생이 있다고?’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나는 왜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을까. 아이에게 부모는 우주와도 같은 존재라는데, 그만큼 아버지가 내게 절대적이었기 때문이었을까. 10년 만에, 아니 난생처음으로 엄마의 말문이 열리자 봉인되어있던 잔인한 현실이 기지개를 켜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원래 우리 집에는 냉기가 가득했다. 언제나 냉전 상태였던 부모님을 보며 나는 어린 나이에 사랑의 반대말이 무관심이라는 것을 자연스레 알아버렸다. 오죽하면 부모님이 말다툼이라도 했으면 싶었을까. 적막은 꼬마를 지르밟는 거인의 발이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구조상 거실 하나에 방 두 개였지만, 우리 가족에겐 거실이 없었다. 거실은 온 가족이 모이는 소통의 공간이니까. 제 기능을 한 적 없는 거실 대신 북극 같은 방 하나, 남극 같은 방 하나만이 존재했다. 매일 나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잔인한 질문을 마주하는 심정으로 엄마의 방과 아버지의 방 사이에 서서 얼어붙었다.

‘우리 집에는 왜 행복이 없을까?’

다섯 살 꼬맹이였던 내가 삶에 던진 첫 질문이었다.

 

“엄마는 그동안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던 거야?”

기가 차도 정도껏이어야지. 화를 내고 싶지도 않았다. 엄마는 각별했던 부자 관계가 깨지는 걸 원치 않았단다.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순수한 마음에 상처가 나지 않기를 바랐단다. 장남인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와 상극이었단다. 할아버지에게 한 번도 칭찬이나 인정을 받아보지 못한 아버지는 뼈에 사무치는 결핍으로 비뚤어진 길 걷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결핍을 대물림하지 않으려고 시시포스처럼 끊임없이 본성을 밀쳐내며 내게 조건 없는 칭찬과 인정을 쏟아부었다. 나를 절대적으로 지지해주는 아버지를 내가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런 나를 보며 엄마는 아버지의 비행을 두둔한 것이었다.

“현중아, 미안해. 더는 숨길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어. 엄마는 네 마음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원하는 대로 엄마도 따를게.”

“만약에 아버지의 부탁을 거절한다면 그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거야?”

“아마도… 고아원에 보내야 하지 않을까?”

“그건 안 돼. 그 아이가 무슨 죄야. 하지만 나도 엄마의 마음이 중요해. 엄마가 나 때문에 원하지도 않는 삶을 사는 건 싫어. 어떻게 하면 엄마 마음이 가장 편하겠어?”

엄마는 이미 마음을 정한 것 같았다. 당시 천주교 신자였던 엄마는 한 달 전부터 이 사건을 두고 성경을 보며 기도해왔단다. 유독 한 구절이 가슴을 후벼 파서 이것이 신의 뜻이 아닐까 생각했단다. 엄마가 가톨릭 성서를 펼쳐 읽어주었던 마태오복음서 구절이 떠올라 개신교 성경으로 다시 찾아보니 같은 말씀이 있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태복음 18:5, 개역한글)

엄마는 말씀이 믿어졌고, 어린아이를 영접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성경에는 홍해가 두 쪽으로 갈라진 사건,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사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고도 남은 사건 등 무수한 기적이 나오지만, 나는 엄마의 고백을 통해 비로소 눈앞에 펼쳐진 기적을 목격했다. 그동안 나는 엄마를 따라 습관적으로 성당에 다녔지만, 그날 처음 신이라는 존재가 살아있음을 느꼈다.

외아들로 자란 데다 부모님의 냉전으로 늘 외로웠던 나는 형제가 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엄마에게 동생을 낳아달라고 졸랐던 적도 있는데, 엄마는 “너 하나만 집중해서 잘 키우고 싶어”라며 철부지인 내게 꽤나 진중한 답변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어느 날 내게 여동생이 생겼고, 이제는 한 식구가 되어 살게 된 것이었다. 예수님을 환대하는 마음으로 엄마와 나는 풍선 장식을 사 와 집안 곳곳을 꾸몄고, 선물을 준비해 동생과의 첫 만남을 준비했다. 가장 예쁘고 귀여울 나이, 다섯 살 동생은 어떤 아이일지 몹시 궁금했다.

“띵똥!” 벨이 울리고 아버지의 두툼한 손을 잡은 조그마한 아이가 집으로 들어왔다. 동화책에서 봤던 아기 공주처럼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와락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 다리 뒤에 숨어버린 동생에겐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지금 다섯 살인 우리 막내딸과 동갑내기였던 당시 동생의 모습을 다시 떠올려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기 공주가 엄마에게 버림받고 아버지를 따라 낯선 집에 들어서는 심정이 어땠을까? 엄마 품이 한창 필요할 동생의 눈앞에는 낯선 여자가 새엄마라는 이름으로, 낯선 남자가 오빠라는 이름으로 서있었다.

 

엄마의 용서로 아버지는 다시 한 집 살림을 시작했다. 지극히 이성적인 지식인으로서 “신이 어디 있노?”라고 말했던 할아버지도 “우리 집에 기적이 일어났다!”라며 기뻐했다.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를 모시고 성당에 가서 감사 기도를 드렸다. 할아버지는 동생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줬고, 엄마는 호적에 올려서 동생을 진짜 가족으로 맞이했다. 냉기가 가득했던 우리 집에 꼬마 천사가 온기를 가득 싣고 찾아왔다. 온 세상이 눈부시게 아름답고 모든 것이 찬란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설거지와 집 안 청소는 물론, 자격증 취득을 위해 도서관에 다니며 공부를 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지금껏 소파와 한 몸이 되어 하루 종일 TV에 시선을 고정하던 아버지 모습에 익숙했던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동생은 자다가 코피가 자주 나긴 했지만, 걱정했던 것보단 수월하게 적응해가는 듯 보였다. 엄마가 동생을 목욕시킬 때 동생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집 안 가득 울려 퍼질 때면 모든 게 문제없이 잘 돌아가고 있다고 느꼈으니까.

한두 달쯤 지났을 무렵, 문득 우리 집에 깃든 행복이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불안감이 올라왔다. 그리고 그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동생은 아버지가 집에 없을 때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막내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집에만 오면 뜬금없이 서럽게 울면서 졸지에 엄마와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다섯 살 아이의 생존 본능이었을까. 영악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동생을 보며 완전히 이해했다. 아버지는 동생 편에 서서 이 불쌍하고 어린것을 왜 잘 돌봐주지 않느냐고 화를 냈다. 아직도 “너는 오빠답지 못하다”라고 했던 아버지의 아버지답지 못한 말을 생생히 기억한다. 동생의 행동은 점점 투정을 넘어 메소드 연기처럼 보였고, 오해와 갈등이 잦아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온기는 사라졌고 익숙했던 냉기가 다시 살아났다. 드라마 같은 현실이 소금기를 잔뜩 머금은 밀물이 되어 나의 상처 난 속살을 적셔댔다.

내 나이만큼 비정상이 정상의 자리를 대체했던 시간이 17년. 이제 겨우 제자리를 찾아가기 위해 새로운 1년을 보내던 중이었는데, 관성의 바람이 순식간에 혁명의 불씨를 꺼뜨렸다. 하루는 아버지가 뜬금없이 백화점에서 나와 동생의 잠옷을 사 온 적이 있었다. 엄마는 이를 예사롭지 않게 느꼈다. 호환 마마보다 무섭다는 여자의 촉이 발동한 엄마는 영수증을 들고 아버지가 잠옷을 산 매장을 찾아갔다. 탐문 수사 결과, 엄마는 아버지가 젊은 여인과 함께 매장에 왔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발뺌하려던 아버지를 추궁한 엄마는 마침내 자백을 받아냈다. 동생의 생모가 아이가 보고 싶다며 아버지에게 연락했고, 뭐라도 해주고 싶어 잠옷을 사서 보냈다는 이야기였다.

엄마는 또 한 번 용서한 것도 모자라 동생의 생모를 직접 만나기까지 했다. 엄마의 증언에 따르면, 그 자리에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난 동생의 생모는 쌍꺼풀 수술을 한 상태였다. 이런 철부지에게 엄마는 딱 한 가지를 당부했다. 아이가 보고 싶으면 만나도 좋은데 반드시 엄마를 통해서만 연락하고 만나야 한다는 것. 드라마 대사가 따로 없었다. 그 후로 몇 개월이 지났고 동생을 환대하며 맞이한 지 반년쯤 지난 어느 날. 저녁에 학원을 마치고 집에 왔는데 동생이 보이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 엄마에게 동생이 어디 있냐고 물었다. 엄마는 나라를 잃은 듯한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아이고, 또 시작이네! 굳게 닫힌 엄마의 말문을 열기 위해 나는 뭐든 다 수용할 자세가 되어있다고 호소했다.

“아버지가 엄마 몰래 또 그 여자를 만났어. 엄마도 참을 만큼 참았어. 아버지한테 당장 동생 데리고 그 여자랑 같이 살라고 해버렸어!”

이제는 내 말문이 막혔다. 그래, 엄마 말이 맞아. 엄마의 한계는 진작에 넘어섰던 거지. 나는 엄마에게 당장 아버지와 이혼하라고 말했다. 엄마는 내가 ‘결손가정’에서 자랐다는 소리를 듣지 않게 해주려고 그동안 아버지와 이혼하지 않고 참아왔단다. 내가 결혼할 때까지는 참아볼 테니 기다려달란다.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어디냐고, 할 말이 있으니 빨리 집에 오라고 말했다.

 

밤늦게 아버지가 집에 왔다. 나는 엄마와 아버지에게 거실 소파에 앉으라고 했다. 나에게 온전한 거실이란 없는 것일까. 그토록 소통이 갈급했던 어린 시절, 거실 없는 집에서 자란 내가 이제는 거실에서 부모님에게 이혼하라며 소통하고 있었다. 우발적인 감정으로 저지른 일이 아니었다. 엄마가 그랬듯 나도 한 달 동안 숙고해왔던 것을 말해야 할 적절한 때라고 생각했다.

“이제 우리 각자의 길로 갔으면 좋겠어요. 두 분 이혼하세요. 저 때문에 억지로 참으며 희생하지 마세요. 그건 저를 위하는 게 아니에요. 각자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그러니 당장 이혼하세요.”

부모님은 충격을 받은 듯 말이 없었다. 늘 순종하는 ‘착한’ 아들이자 사춘기도 있는 듯 없는 듯 지나간 ‘모범생’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곤 믿기 힘들어서였을까. 엄마, 아버지! 이제부터 그 누구도 탓하지 말고 각자 알아서 행복해지는 겁니다!

나의 단호한 태도에 부모님은 별말 없이 그대로 이혼했다. 나는 엄마와, 동생은 아버지와 살기로 했다. (애초에 아버지가 동생을 보육원에 보낼 정도로 비정한 사람이 아니었단 걸 알았다면 어땠을까? 아버지는 어찌 됐든 동생을 끝까지 책임지려고 노력했고, 지금도 노력한다.) 엄마는 그 길로 신앙생활을 접고 냉담했다. 신의 뜻을 거역했다는 죄책감과 아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뒤범벅되어 엄마를 지독히 괴롭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엄마는 엄마로서, 신자로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엄마는 내게 종교와 다름없었다. 낮에는 서울에서 오산까지 왕복 4시간 거리를 오가며 기간제 교사로 일했고, 밤에는 집에서 과외를 하며 엄마는 한시도 허투루 사는 법이 없었다. 일이 있어 밥을 해줄 수 없을 때는 항상 유기농 식단으로 도시락을 싸놓고 손편지를 써놓았다. 나는 언제나 “엄마는 아들을 믿어. 사랑해, 아들!”로 끝나는 엄마의 손편지를 읽으며 온기와 부담이 가득 담긴, 맛있지만 소화가 잘 안 되는 도시락을 싹싹 긁어먹었다.

 

미세한 틈조차 보이지 않는 완벽한 슈퍼우먼인 동시에, 유일한 희망인 아들이 무너지면 곧바로 삶을 포기할 것만 같은 눈빛을 가진 연약한 여인. 그런 엄마 앞에서 나는 그녀의 자존심을 위해 존재하는 마리오네트가 되어버렸다. 10년 전, 건강하던 엄마가 갑자기 난소암으로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나의 꿈은 ‘아들 하나 바라보고 사는 엄마의 자랑스러운 아들 하나가 되는 것’이었음을.

그땐 성경 말씀 한 절을 살아내려고 발버둥 쳤던 엄마의 선택이 자충수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 말씀 한 절은 우리 가정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신의 한 수’가 아니었나 싶다. 인간의 눈에는 실패한 것처럼 보였지만, 말씀대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려던 서툰 마음이 하나의 거룩한 밀알이 되었다. 결국, 우리 가족은 모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했다. 진흙탕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비루한 인간의 삶일지라도 하나님의 선택에는 결코 실패란 없다.

김현중
필명, ‘이학기 반장’. 늘 출마한 반장 선거에서 2학기에만 당선되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한 남자. 세일즈 전문가였다가 인생 2학기를 맞아 글 쓰는 사람이 된 두 아이의 아빠. 모든 가정이 행복해지길 바라는 몽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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