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호 그 사람의 설교 노트]
2024년 5월 2일 목요일 한국YWCA연합회 월례아침기도회에서 했던 설교(본문: 시편 55:12-17; 마가복음 15:33-37)를 수정하여 싣습니다.
저는 성서신학자이면서 기독여민회라는 기독 여성운동 단체에서도 오랫동안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난 활동을 돌아볼 때 제가 함께할 수 있는 것만으로 참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습니다. 여러 기독 여성 단체들과 여성주의 예배를 준비하거나 동참한 경험입니다. 그중에서도 5월이면 꼭 생각나는 여성주의 예배가 있습니다. 바로 강남역 여성혐오범죄 추모예배입니다. 올해로 8년째 드리는 이 예배는 여기 계시는 YWCA 외에도 여러 신학교의 여학우회들, 다양한 모임과 크고 작은 단체들이 함께 준비합니다. 강남역 여성혐오범죄를 기억하는 이 예배를 통해 우리 여성 그리스도인들은 젠더 폭력 희생자들을 애도하며 젠더 간 불평등에 근거한 일상적 폭력이 근절되길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시는 대로, 2016년 5월 17일 강남역 근처 술집의 화장실에서 한 남성이 여성을 흉기로 여러 차례 찔러 살해했습니다. 범인은 경찰에게 “평소 여자들에게 무시를 많이 당해왔는데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고 합니다. 정신질환자의 일탈 행위로 보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도 왜 범인이 여섯 명의 남자를 그냥 보내고서야 한 여성에게 살인을 저질렀는지를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평등한 문화여서 여자가 남자를 무시하는 것이 남자가 남자를 무시하는 것보다 새삼 기분 나쁜 일이 아니라면 범인이 그런 분노를 느꼈을까요? 그래서 이 사건은 여성혐오범죄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누구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는 데 당시 많은 여성이 경악을 금치 못했고,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희생자를 애도하고 여성혐오범죄에 분노하는 목소리를 담은 ‘포스트잇’ 추모의 물결이 이어졌습니다. 2030 여성들에게 페미니스트가 된 계기가 무엇이냐 물으면 가장 많이 나오는 답이 바로 이 강남역 여성혐오범죄 사건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강남역 여성혐오범죄는 젠더 폭력의 문제를 새롭게 우리 사회에 인식시킨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강남역 여성혐오범죄 사건이 우리의 인식을 새롭게 한 후에도 불행히 우리 사회에서 젠더 폭력 사건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희생자를 더 기억하고 애도해야 젠더 폭력은 근절될 수 있을까요? 만일 우리의 동료 여성들이 폭력에 희생되는 날마다 모여서 추모예배를 드려야 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날을 탄식과 애도로 보내야 할까요?
이 질문을 저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던져본 날이 있었습니다. 바로 1년 6개월 전, 신당역 살인 사건이 일어난 때였습니다. 2022년 9월 14일, 지하철 2호선 신당역에서 근무하던 한 여성이 오랫동안 자신을 스토킹했던 전 동료 직원에게 살해당한 사건이었는데, 많이들 기억하시지요. 사건 직후, 강남역 예배를 준비하던 그룹에 속한 몇몇 활동가들이 9월 23일 신당역 앞에서 피해자 추모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제가 활동하는 기독여민회 후배들이 시편 6편의 가사로 특송을 시작하며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다윗의 이 탄원이 오늘날 생명을 위협받는 여성들, 젠더 폭력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의 탄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탄원시, 아니 탄원의 노래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희생을 더 마주해야 하나, 라는 절망을 대변해 주었습니다.
아시는 대로 탄식시, 또는 탄원시라 불리는 시편 6편을 보시면 제일 앞에 ‘다윗의 시’라는 표제가 있습니다. 이 표제는 작자도 연대도 알 수 없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불러오던 노래들이 나중에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다윗의 생애와 관련되어 새롭게 해석되었다고 하는 후대 역사를 반영합니다. 그래서 다윗의 시라고 적혀있는 대부분의 시편은 성별과 상관없이 고통과 억압 속에 있는 누구라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하나님께 토로하는 노래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일찍이 폭력에 희생된 여성들의 경험에 비추어 탄식 시편을 읽자고 제안한 여성신학자가 있었습니다. 울리케 바일(Ulrike Bail)이라는 이름의 독일 구약성서학자입니다. 이 학자는 앞서 기독여민회 후배들이 특송으로 부르기도 했던 바로 그 시편, 시편 6편을 사무엘하 13장에서 다말이 자신의 이복 오빠인 암논에게 강간당하고 내쳐진 상황에서 부른 것으로 상상해보자고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아울러 울리케 바일은 우리가 오늘 함께 읽은 시편 55편도 동료나 연인처럼 가까운 사람들의 폭력에 희생당하는 여성의 목소리로 읽어보자고 제안합니다. 그녀의 제안을 따라 시편 55편의 내용을 저와 함께 살펴보시겠습니다.
먼저 1-5절에서 화자는 하나님께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달라고, 간구하는 나에게서 제발 숨지 마시고 답해달라고 호소하면서, 마음의 괴로움을 넘어 죽음의 위협과 공포에 압도당한 자신의 상황을 토로합니다. 3절을 보면 화자의 고통은 그녀를 압제하는 원수와 악인 때문인데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나에게 얹어놓고 나를 향해 분노하고 나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6-8절에서 화자는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벗어나는 공상을 하고 있습니다. “비둘기처럼 날개라도 있으면 멀리멀리 날아가 아무도 없는 광야에 보금자리를 지을 텐데!” 그녀가 일상에서 어울려 사는 사람이 주는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오히려 사람 없는 광야가 자신에게 불어닥치는 폭풍과 광풍을 피할 은신처가 된다고 말할까요?
9-11절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그녀가 실제로 살며 고통을 겪고 있는 곳, 성안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게 됩니다. 그녀를 괴롭히는 적들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그녀가 살아가는 공간을 헤집고 있고, 그 성에는 고통, 억압, 속임수가 판쳤다고 합니다. 고대사회에서 ‘성’ 또는 도시는 ‘성벽’의 건설과 수비를 통해 주민들을 보호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시편 55편의 여성 화자가 사는 도시와 성벽은 이 화자를 위해 전혀 그 역할을 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적들이 활개 치며 통제권을 휘두르는 억압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12절에서 화자를 고통 속에 빠뜨린 구체적인 가해자가 드러납니다. 자신을 책망하는 자가 차라리 진짜 원수였다면, 차라리 나를 미워서 그러는 거라고 했으면 어디로 도망가서 숨어있기라도 했겠다고 말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신당역 살인 사건의 가해자는 희생된 여성의 입사 동기였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13절의 탄식을 저는 신당역 피해자의 외침으로 번역해 읽고 싶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자가 바로 내 동료이고 한 직장에서 일해야 하는 가장 가까운 지인이라니!” 게다가 신당역 사건 가해자의 말을 빌리면 그는 ‘피해자가 미워서가 아니라 그녀와 사귀고 싶어서, 연인이 되고 싶어서’ 스토킹했다고 합니다. 12절에 나오는 것처럼 가해자들은 ‘상대를 대하여 자기만을 높이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사랑을 운운하더라도 실상은 타자의 세계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자신의 세계만 절대적으로 여기는 자들입니다.
‘관심이 있어서’ ‘사랑해서’라는 식의 가해자 중심의 언어에 주목할 때 9절 끝에 나오는 화자의 기도가 정말 절절합니다. “주여 그들을 멸하소서. 그들의 혀를 잘라버리소서.” 21절에 나오는 것처럼 가해자들의 언어는 버터보다 부드럽고 기름보다 매끄러워 주변 사람들을 쉽게 속여 넘깁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가해자들은 상대를 살상하려는 전쟁을 벌이고 있어서 당장이라도 상대를 베어버릴 수 있게 ‘칼’을 뽑아 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의 안전을 지킬 책임자들은 말속에 숨긴 속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거듭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당역 사건을 보면 반성하고 있다는 가해자의 말만 듣고 당국은 구속 시기를 놓쳤고, 가해자는 이미 퇴사했는데도 서울교통공사 직원들은 가해자의 번드르르한 말에 속아 피해자의 근무 동선을 알려줄 정도로 무신경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너무도 참혹했습니다. 이 점에서 폭력에 희생되는 것은 피해자 한 사람만이 아니고, 우리가 사는 도시 전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공동체가 모든 주민이 안전하게 사는 공간이어야 하는데, 도시의 안전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책임을 다하지 않거나 무신경하면 이런 폭력은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14절을 보면 과거형으로 적혀있지만 사실 우리가 함께 있던 공간이 원래는 이랬어야 한다는 당위를 보여줍니다. ‘같이’ 평등하게 상호 이해 속에 의논하면서 일하고, 공동체 속 다른 구성원들과도 함께 공적인 공간을 향유했어야 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자들이 있습니다. 20절에 따르면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 화목해야 하는 가까운 이들에게 폭력을 휘두름으로써 서로에게 신의를 지키기로 한 사회적 ‘약속’을 깨는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신앙 안에서 공동체를 평화롭게 유지하기 위한 모든 사회적 약속은 그들이 믿는 한 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약속, 곧 ‘언약’ 관계 안에서 명령됩니다.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속에서 사회 구성원 간의 약속도 신실하게 지켜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사회적 약속이 방기되고 위반될 때 당연히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소환되며, 그 하나님께서 보응해주시길 기대하고 호소하는 것이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 내용이었습니다. 바로 이 신앙에 근거해서 오늘 시편의 화자는 반복해서 공동체 속 행악자들을 처벌해 주시기를,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시기를 요청합니다. 15절에서는 사방에서 악독을 저지르는 자들이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파멸하기를 구하고, 19절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억압하는 자들을 낮춰주시길 기도합니다. 23절에서는 그들이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해주시고 그들이 수명의 절반도 못 살고 죽기를 구합니다.
16-17절에서 보듯 화자는 이처럼 저녁과 아침, 정오, 때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탄식하며 부르짖습니다. 이렇게 화자는 하나님께서 억눌린 자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구원하신다는 신뢰를 놓지 않습니다. 18절에서도 화자는 대적하는 자가 아무리 많아도 그들과의 싸움에서 자신의 생명을 구해주시고 평안하게 해주실 하나님에 향한 믿음을 놓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목도하는 젠더 폭력의 현실은 어떤가요? 신당역 사건을 비롯해 젠더 폭력으로 생명을 잃고 있는 여성들의 현실을 볼 때 이 화자의 희망을 우리의 상황에 대입하는 게 너무도 순진하거나, 덧없게 느껴지시지는 않나요?
22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참 좋은 말씀이지요? 이 문장만 보면 우리에게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께 가진 희망을 지키라고 권면하는 말로 들립니다. 그러나 울리케 바일을 비롯한 여러 학자는 이 말씀을 화자의 말이 아니라 적대자가 하는 말, 가해자가 하는 조롱의 말로 봐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하나님이 너를 붙드시니 네가 의롭다면 너는 무사하겠지?’라고 비웃는 목소리라는 말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지극한 신뢰가 비웃음의 대상이 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희망을 비웃는 듯 젠더 폭력 희생자들이 계속해서 나올 때, 사회가 한 치도 변하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해자들은 살아남고 의미 있는 삶을 이어갔어야 할 아까운 생명들이 제 수명의 반의반도 살지 못하고 죽어갈 때, 의로우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께 호소하는 일을 이제 그만두어야 할까요? 하나님께 의지하는 믿음이 덧없어 보여서, 그런 우리의 신뢰마저 비웃고 있는 가해자들과 그들을 비호하는 이 세계에 낙담하여 우리의 호소를 그만두어야 할까요?
만일 비웃음과 조롱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호소하기를 멈춘다면, 우리는 다시금 행악자의 ‘미끄러운’ 언어에 속아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22절의 조롱이 보여주듯 가해자들은 악과 폭력을 저지르는 자신들의 죄악을 다시 우리들의 의로움에 관한 문제로 둔갑시키고 비난의 화살을 우리 쪽으로 돌려놓으려 합니다. 3절에서 본 것처럼 그들의 죄악을 우리에게 돌리고 그들이 파기한 언약의 문제를, 우리가 끈기 있는가, 흔들리는가의 문제로 돌려놓으려 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삶의 원칙, 하나님과 공동체 사이의 언약을 깨뜨리고 더럽힌 자들은 피해 여성들이 아니라 폭력을 자행하는 바로 그들임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하나님께 고발하는 동시에, 그 고발을 들으시고 그들을 꺾으실 정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젠더 폭력에 희생당한 자들의 목소리로 시편 55편을 다시 읽으면서 우리는 그들이 희생당했다는 것을 슬퍼하고 탄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낼 수는 없습니다. 시편 55편은 그들의 손에 희생당해 영원히 침묵당한 누군가가 살아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간절히 붙잡았을 하나님에 대한 희망과 신뢰로 다시금 우리를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신당역 살인 사건의 피해자는 가해자의 폭력에 생명을 잃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화장실에 있는 비상벨을 눌러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경찰이 그 자리에서 가해자를 검거할 수 있었습니다. 이 희생자의 마지막 순간은 고통받는 사람의 호소에 응답하고 끝까지 정의를 실현해달라고 남은 우리를 향해 외치는 고함이면서,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마지막까지 놓치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울리케 바일은 우리에게 탄식 시편을 새롭게 읽는 방법을 가르쳐주면서 탄식이 저항과 다르지 않다고, 애도와 저항은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독일어로 탄식과 애도를 뜻하는 클라게(Klage)에서 바로 저항과 고발을 뜻하는 안클라게(Anklage)가 나온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누군가는 애도하고 추모하는 일이 무슨 힘이 있느냐 묻습니다. 또 누군가는 피해자 편에서 같이 운다고 죽은 이가 살아 돌아오느냐고 비웃습니다. 그러나 젠더 폭력 없는 세상이 오기까지 이 사회를 바꿔내려는 연대와 저항을 멈추지 않는 한, 우리의 탄식은, 우리의 애도는 결코 무력하지 않습니다.
경애하는 여러분! 우리는 로마제국의 폭력에 희생당한 한 의로운 사람 예수의 죽음을 기리며 그의 삶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가 꿈꾼 정의로운 세상,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이 땅에서 펼쳐가려 애쓰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예수는 군인들의 폭력에 마지막 숨을 빼앗기는 순간까지,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순간까지, 그 처절한 외로움의 순간에조차 그것을 하나님께 호소하며 외쳤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을 향해 외치는 이 아이러니한 신뢰의 외침, 예수가 외친 마지막 호소의 말은 시편 22편이라는 또 다른 탄식시의 한 구절이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우리는 의로우신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그 순간에조차 그것을 의로우신 하나님께 호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행악자들의 악을 고발하며 부르짖는 한, 우리는 희생자들을 양산하는 사회의 불의함에 체념하지도, 타협하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현실에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때야말로, 의인의 요동함을 허락지 않으시고 행악자들의 악을 갚아주시는 의로우신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다시금 점검하고 회복해야 하는 순간임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끝까지 부르짖는 사람만이 부활의 희망을 선취할 수 있습니다.
애도의 동지들이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애도가 저항의 시작입니다. 반복되는 희생 속에서 우리의 기도가 무력하게 느껴질 때 주님께 대한 신뢰를 다시금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무고한 자를 버리지 않으시고 희생당한 자들의 억울함을 신원하시는 정의로우신 분이십니다. 희생당하는 약자들과 공감하며 그들 편에 서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저항하는 애도인들로 꿋꿋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 아까운 생명들이 제 아름다움을 맘껏 펼치지 못하고 스러지는 것을 목도하고 애도하는 시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애도하고 추모하는 것만으로 무슨 힘이 있을까 무기력해지려는 그 순간에 희생자들이 마지막까지 꿈꾸고 호소한 안전하고 정의로운 공동체에 대한 희망을 다시금 붙드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행악자들의 조롱에 흔들리는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굳게 붙잡아주소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도 끝난 듯 보였을 때 의로운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희망으로 당신에 대한 신뢰를 놓지 않았던 빈 무덤의 여인들처럼 우리 믿음의 선배들을 기억하며 새로운 희망을 힘차게 일구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혜진
신약성서학자로 이화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기독여민회 연구위원장, 한국퀴어신학아카데미 대외협력위원장, 차별과혐오없는평등세상을바라는그리스도인네트워크(평등세상)의 연구분과장으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