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6호 이한주의 책갈피]
진실로 회개하면서도 하느님께 용서받지 못할 그런 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으로도 감당하지 못할 그런 큰 죄를 인간은 결코 범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초월할 수 있는 그런 죄가 가능하겠습니까?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상》, 115쪽)
진실한 회개와 무한한 사랑을 전하는 조시마 장로에게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진실한 회개는 어떻게 하는지,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하면 인간의 책임은 어디에 있는지, 회개가 하나님의 사랑을 불러오는지, 하나님의 사랑이 회개로 이끄는지, 여인은 묻지 않는다. 말없이 땅에 엎드려 절을 할 뿐이다. 인간은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할 수 없다는 말에 밑줄 그으며 그녀에게 새로운 삶이 펼쳐지길 기대했다.

1999년 4월, 콜럼바인 고등학교 교내에서 총기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이 학교 학생이던 딜런과 에릭은 총기를 난사해 친구 12명과 교사 1명을 살해하고 그들도 자살했다. 이 사건은 미국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고 〈타임〉지는 가해자 2명과 희생자 13명의 사진을 ‘이웃집 괴물’이란 헤드라인과 함께 표지에 실었다. 자살한 가해자 중 한 명인 딜런 클리볼드의 어머니 수 클리볼드는 17년 뒤 이 사건과 아들을 회고하며 책을 썼다. 이 책에서 가해자의 어머니는 사건 직후에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를 전한다.
마을에 임시 조문소가 세워졌다. 대충 깎은 나무십자가 열다섯 개가 세워졌다. 딜런과 에릭을 포함해 죽은 사람 한 사람당 하나씩이었다. 딜런과 에릭의 십자가는 바로 쪼개져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어떤 교회에서 자기네 땅에 기념식수 열다섯 그루를 둥그런 모양으로 심었는데, 이 가운데 두 개가 쓰러지는 것을 경찰도 교회 사람들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딜런과 에릭을 애도하거나 기념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은 물론 이해했다. 그렇지만 억제되지 않은 분노의 폭발에 우리는 두려움을 느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반비, 155쪽)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열린책들)에 나오는 조시마 장로는 러시아정교회 신앙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한 여인이 조시마 장로를 찾아와 죄를 고백한다. 그녀는 자신을 학대하던 남편이 병들어 눕자 그가 건강을 회복하면 다시 괴롭힘당할 것이란 두려움에 ‘어떤 일’을 했다. (아마 병든 남편이 죽음에 이르도록 방조했던 것 같다.) 죄책감에 시달리며 자신의 영혼을 용서해달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조시마 장로는 이렇게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