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호 질문의 시간: ‘사이’에서 묻다]
(하나님을 믿느냐는 물음을 받을 때)
열 번 가운데서 적어도 다섯 번은 ‘아니다’라는 대답이 나와야 합니다.
‘아니다’가 ‘예’만큼 중요하거나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니다’라는 대답은 그 사람이 인간임을 입증합니다.
인간이라면 당연하게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그 대답이 정말 ‘예’라면,
그것은 고백과 눈물 그리고 커다란 웃음으로 목이 메는 그런 ‘예’일 수밖에 없습니다.
― 프레드릭 비크너
그리스도교가 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바는 ‘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아니오’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닌 친구들은 대개 ‘순수하게 하나님을 믿었던 어린 시절’을 지나는 것 같다. 나에게는 그런 기억이 없다. 어린 시절에도 나는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나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가 늘 낯설고 이상했다. 다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곤 한다는 수련회에서도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 지신’ 주님께 울며 기도하는 친구들을 멀뚱히 보며 ‘저 애는 왜 울지? 착한 사람(예수)이 죽어서 불쌍해서 우는 건가?’ ‘그 사람이 2천 년 전에 죽은 것 때문에 내 죄가 없어진다고? 저 사람들은 그렇게 이상한 말을 어떻게 믿지?’ 생각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니까 그 친구들은 ‘예’로 신앙 여정을 시작했던 것 같다. 순수하게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성경과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렇게. 그러나 나는 신앙의 여정을 ‘아니오’로 시작했다. 이후로도 숱한, 처음보다 훨씬 더 강렬한 ‘아니오’들이 있었다. 아마 친구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 시작이 무엇이었는지가 그리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예’로 시작하든 ‘아니오’로 시작하든, 우리는 반드시 ‘아니오’의 시간을 지나게 되고 만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는 “시험당하지 않은 그리스도는 만날 가치가 없다”는 데일 앨리슨의 말을 더 생각해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의 아버지는 군인이었다. 그는 늘 빳빳이 다려진 제복을 입고 출근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어지간해서는 흐트러지지 않는 단정한 몸가짐을, 자기보다 큰 무언가를 위해,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는 삶을 존경했다. 그 또한 아버지처럼 끝까지 명예로운 군인으로, 가정적인 남편이자 아버지로 살고 싶었다.
그렇게 그는 정해진 수순처럼 사관학교에 입학했고, 한 여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하지만 신혼의 단꿈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배우자가 결혼 전부터 다른 남자를 함께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용서하려 했고, 어떻게든 결혼 생활을 지켜보려 했지만, 외도는 반복되었다. 결국 이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깨어졌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렇게 첫 번째 이혼을 했다.
한동안은 일에 몰두하며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결혼 실패의 아픔이 잦아들 때쯤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배 속에서부터 교회에 다닌 모태신앙인이라고 했다.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녀가 교회에 다닌다는 게 어쩐지 좋았다. 하나님이라는 보이지 않는 신 앞에 자신을 늘 비추어보는 사람이니 외도를 저지르는 일은 없지 않을까 어렴풋하게 생각했던 것도 같다. 잔잔한 연애 끝에 그는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자신을 닮은 아이가 태어났고, 때로는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가 곁에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는 평범한 나날들이 흘러갔다.
그녀와 결혼을 하면서 그도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한 선택이었다. 장인 장모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으니 효심도 한몫을 한 것이었겠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 가능한 한 도우려 애쓰는 성품 탓에, 교회에서 이런저런 봉사의 직책도 맡게 되었다. 성실하고 선량하고 정의로운 그는 교회에서도 인정받고 사랑받았다. 그렇게 집사가 되었고, 안수집사가 되었고, 장로 후보자가 되었다. 교회 안팎에서 신망이 있는, 가장 많은 찬성표를 받은 그가 장로가 되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그런데 장로 투표까지 다 이루어진 시점에 문제가 생겼다. 그의 이혼 전력이 문제로 불거졌다. 최종적으로 장로는 교회 생활은 물론 가정생활에도 모범이 되어야 하므로 장로 자리에 부적격하다는 결정이 떨어졌다.
장로 후보가 된 것을 온 교회가 아는 마당에 일이 그렇게 되자 교회에서 수군수군 뒷말이 오가기 시작했다. 그의 결혼 생활이 삐걱대기 시작한 때도 그즈음이었다. 장로였던 장인어른도 내심 그 사건이 수치스러웠던지 그를 대하는 태도가 전 같지 않았다. 교회에 나가는 것이 점점 불편해졌고, 아내는 그것을 못마땅해하면서 관계의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부부 사이는 점점 더 나빠졌다. 처가와 부인에게 자랑스러운 남편이 되기는커녕 부끄러운 존재가 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괴감이 들었다. 지루하게 고통스러운 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 아내가 이혼을 요구해왔다. 자신이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이 이 헤어짐이라고 생각한 그는 그 결정을 받아들였다. 두 번의 이혼은 군대에서의 진급에도 영향을 줄 터였다. 그는 자의 반 타의 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군에도 제대 신청을 했다. 그렇게 두 번째 이혼을 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아니 더는 나갈 수가 없었다. 교회에서 자연스레 밀려났다는 게 더 정확한 설명일지도 모르겠다. 교회를 향한 원망 같은 것은 없었다. 쓰라리긴 하지만 교회의 결정도 이해했다. 그러나 종종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죄에 대한, 구원에 대한 질문이 불쑥불쑥 솟았다. 교회를 나오고 나서 오히려 그의 질문은 더욱 깊어졌다. 그런 진지한 질문에 대화 상대가 되어준 것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영화였다.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노아〉, 존 패트릭 샌리의 〈다우트〉, 코헨 형제의 〈시리어스 맨〉 같은 영화들을 보며 그런 문제들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곤 했다. 하나님은 정말 어떤 분일까. 하나님의 뜻이라는 건 뭘까. 그분이 그렇게 선하시다는데 세상에는 왜 이렇게 악이 넘쳐날까… 하나님은 정말 나도 사랑하실까? 어쩌면 그분도… 나를 부끄러워하실까? 결론이 쉽게 나지 않고, 물음표만 커지는 시간이 이어졌다.
질문들이 결국 그를 어디로 이끌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아는 이야기는 그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 선택을 했다는 것뿐이다. 그가 퇴직연금을 퇴직금으로 전환해 그 돈까지 모두 이혼하며 아내에게 주었다는 사실은 이후에야 알려졌다. 그는 마지막 남은 작은 전세금까지 전 아내와 아이들에게 돌린 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사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아니오’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모든 ‘아니오’들을 지나면 결국 누구나 ‘예’에 다다르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 인생은 그렇게 정해진 각본 같은 것이 아니다. (성긴 우리 눈으로 보기에) 어떤 사람은 ‘아니오’에서 인생을 마친다. 또 어떤 사람은 ‘예’에서. 어디에서 마쳤는지에 따라 그의 최종 향방이 정해지는 걸까? 하나님은 우리 인생 전체 중 유독 생의 그 마지막 부분에 관심을 집중하실까?
분명 한때 뜨겁게 기독교 신앙을 고백했지만 여러 이유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있다. 열정적으로 교회에 헌신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10년 후, 20년 후 어느 날 그가 교회를 떠났다는 소식을 듣기도 한다. 이런 문제에 성급히 알 수도 없는 답을 내놓으려 하기 전에, 나는 그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그런 일이 심심찮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싶다. 그런 일들은 분명 일어난다.
어쩌면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그것이 우리를 혼란스럽게도, 고통스럽게도 하기에 우리는 우리의 ‘아니오’들을 외면하고 싶어 한다. 모든 ‘아니오’의 결말이 ‘예’로 정해져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아니오’를 좀 더 편한 마음으로 대면할 수도 있을 테다. 그러나 정해진 결론은 없다. 게다가 종종 이 ‘아니오’들은 너무 강력해 보인다. 어떤 강력한 ‘아니오’들은 모든 ‘예’를 삼켜버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무시무시한 ‘아니오’를 모두 갖다 버리거나, 번연히 있는 ‘아니오’를 감추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모든 위험에도 불구하고, 비크너의 말마따나 ‘아니오’는 ‘예’만큼 중요하거나 어떤 경우에는 ‘더 중요’하다. 그것이 ‘그가 사람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아니오’는 필연적이다. 신앙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아니오’라고 말해야만 한다는 강박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조급해하지 않아도 발을 땅에 붙이고 신앙의 여정을 걷다 보면, ‘아니오’의 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 아니, 우리의 하루를 잘 들여다보면 어쩌면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일은 일어난다. 실은 하나님과의 신앙 여정이 정말로 거룩하신 그분과 우리가 맺는 관계의 여정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다. ‘예’만으로 이루어진 관계는 있을 수 없으니 말이다. 혹 그런 것이 있다면 쇼윈도 부부같이 껍데기뿐인 관계이거나, 사랑의 관계가 아닌 굴종의 관계, 주인에게 종속된 노예의 관계일 것이다.
성서에서 ‘예’와 ‘아니오’의 관계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책 중 하나는 욥기다. 다들 알다시피 갖은 고통을 견디다 못한 욥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한다. ‘내가 태어난 날이 차라리 사라져 버렸더라면… 아예, 그 날이 밝지도 않았더라면’ 하면서. 친구들은 ‘미련한 사람은 자기의 분노 때문에 죽는다’면서 ‘부디 잘 들으라’며 욥을 꾸짖는다. 그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옹호도 잊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하시며… 땅에 비를 내리시며 밭에 물을 주시는 분이시다. 낮은 사람을 높이시고, 슬퍼하는 사람에게 구원을 보장해 주신다’라면서. 긴 대화가 이어지고 하나님이 이 모두를 향한 최종 평가를 내린다.
주께서는 욥에게 말씀을 마치신 다음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분노한 것은, 너희가 나를 두고 말을 할 때에,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욥 42:7).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고 냉소하는 혹은 악을 쓰기도 했던 욥을 향한 하나님의 최종 평가는 ‘욥이 옳게 말했다’였고, 하나님을 향해 온통 아름다운 미사여구를 쏟아내었던, 그러니까 ‘예’로만 점철되어있던 친구들에게 하나님은 ‘어리석게 말했다’ 일침을 놓으셨다. 하나님은 욥의 ‘아니오’까지를 ‘옳다’고 하셨다. 아니, ‘예’만을 말한 친구들을 꾸짖으시고 하나님 앞에 정직한 ‘아니오’를 말한 (그리고 그 끝에 ‘예’에 다다른) 욥을 옳다 하셨다.
‘하나님은 높은 곳뿐 아니라 깊은 곳에도 계신 것 같습니다.’ 그것이 그분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말, 즉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었다가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말의 부분적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지옥에도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옥에 있을 때 거기서도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프레드릭 비크너, 《A Crazy, Holy Grace》(《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
그분은 지옥에도 계신다. 가장 높은 곳뿐 아니라 가장 깊은 곳까지도 하나님이 찾아가신다. 비크너의 이 문장은 내게 하나님이 우리의 ‘아니오’까지를 끌어안으신다는 거룩한 선언으로 들린다.
결국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니오’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이것이 모든 ‘아니오’들을 지나면 누구나 ‘예’에 다다르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아니오’들과 정직하게 마주해야 한다. 그것이 실은 그 모든 고통스러운 ‘아니오’들까지도 품으시는 그분을 향한 믿음의 행동이다.
이토록 눈물겹고, 비통하고, 절망적이고, 치열하고 고통스러운, 그러나 정직한 ‘아니오’들 끝에 혹 우리가 ‘예’라고 응답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것은 “고백과 눈물 그리고 커다란 웃음으로 목이 메는 그런 ‘예’일 수밖에 없다.”
정다운
낮에는 회사에 다니고 밤에는 번역을 한다. 서로 다른 두 언어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에 관심이 있다.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십자가》 《신학자의 기도》 《기억하라, 네가 누구인지를》 《오라, 주님의 식탁으로》 등을 옮겼다. 팟캐스트 〈슬기로운 독서생활〉에 참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