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호 나의 최애들]

아주 조금 살기. 그건 사실은 몸이 약하기 때문에 생겨난 궁여지책이긴 하지만, 꼭 그것만은 아니다. 그건 일종의 철학인데 설명하려면 조금 복잡하니까, 그냥 힘센 세계의 권력에 항의하는 나름의 여성주의적 방식이라고 말해두자. 세계의 폭력에 힘이 아니라 연약함으로 응수하는 방식.

세계와의 접점을 줄이고, 삶을 아껴서 조금씩만 살기. 자신의 내적인 우주를 확보하고, 세계 안에선 가능한 한 덜 살기. 영혼에게 많은 이니셔티브를 넘겨주기. 그건 나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는 내 내면의 자아의 프로그램을 작동시키는 기술이다.

그 프로그램을 작동시키기 위해서 밥을 많이 먹을 필요는 없다. 영혼은 별로 배고파하지 않으니까. 그 대신 다른 양식(糧食)이 필요하지. 지식? 오, 천만에. 지식은 그 다른 양식을 떠먹기 위한 숟가락 정도는 된다. 그 다른 양식이 무엇인지 나는 당신에게 가르쳐줄 수 없거나, 가르쳐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 양식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또는 먹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미 알고 있을 것이고, 당신이 그 양식을 먹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또는 먹기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아무리 가르쳐줘 봐야 콧방귀도 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세계가 시키는 대로 살아도 너무나 행복한 사람일 터이므로.

― 《거품 아래로 깊이》, 208-209쪽.

세계가 시키는 대로 살면 행복하지 않았던 나에게 이 존재론적 고백은 정확히 앞으로의 혹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가리키는 지표가 되었다. 그리고 깨달은 한 가지. 이토록 세계의 폭력에 예민하고, 영혼에게 자기 삶의 주도권을 맡긴 이야말로 운동의 최전선에 용기 있게 설 수 있구나. 그리고 이어 또 한 가지. 이토록 존재의 의미를 궁구하는 사람이야말로 ‘말’의 거짓에 한 치의 양보도 할 수 없는 거구나. ‘안티조선운동’이라는 언론 운동은 결국 말과 글의 전쟁이었으니까.

세계의 거짓은 무엇보다도 ‘말’의 거짓이었다. 박종철은 탁, 하고 치니까, 억, 하고 죽었고, 사람들은 총에 맞아 죽었는데, 죽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그들은 ‘말’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었다. ‘말’은 존재의 근거이다. ‘말’의 파탄은, 곧 존재의 파탄이다. 거짓말이 삶의 원리로 통용되는 세계에는 더 이상 비전이 없다. … ‘말’의 문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나날의 삶의 의미를 규명하는 최종적 매체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성요한의 시각은 지금도 여전히 옳다. 언젠가 인류는 훨씬 더 세련된 초언어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미 어느 정도 그런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여전히 ‘말’은 존재의 의미를 규명하는 거의 유일한 매체로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정치가들의 ‘정보 뭉치’ 앞에 나의 나비를, 힘없고 연약한 내적 원리를, 그 원리를 표현하는, 그들의 매체와 같지만 완전히 다른 매체를, ‘다른 말’을, 시적 언어를 내세웠다. 그렇게 하면서 내가 믿었던 것은, 내가 원하는 삶의 원리는 훨씬 더 근원적이고 깊은, 시간적 상대성을 뛰어넘는, ‘의미의 생산자’인 우주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었다.

― 《거품 아래로 깊이》, 326-328쪽.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고 믿는 서준식과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시각이 옳다고 믿는 김정란이라…. 폭력적 구조의 벽에 부딪히는 지점부터는 어쩔 수 없이 ‘입’이 아닌 ‘근육’으로 현실의 어둠을 뚫고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서준식은 홀연히 사라졌고, ‘말’로 싸우던 김정란의 ‘입’은 오늘도 살아있는데. 이 현재 진행 중인 결말이 말해주는 오늘의 현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래도 어쨌든,

사랑을 위한 싸움

싸움이 흥하던 시절, 키보드가 배틀에 사용되던 그때, 변화를 위해 싸우는 이들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지, 싸움은 무엇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지 본질을 묻는 ‘감수성’을 소유했던 건 시인 김정란이었다. 물론 흔하게는 가톨릭 영성가 헨리 나우웬도 있었고, 궁극적으로는 복음서의 예수님도 있었지만, 역시나 내게 핵심 문제는 한국적 맥락에서 무엇보다 여성 정체성 안에서 운동과 영혼의 공존 방식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김정란의 ‘말’에 살짝 줄을 서 그가 쓴 한국어 단어들에 골몰하고, 그가 끝내 감각해내고야 마는 폭력의 세계의 실체를 내면화했던 이유다.

사람들을 차가운 바닥에 신문지 한 장 깔고 앉아있게 만드는 비정한 성난 얼굴이 아니라, 폭력에 사랑과 시적 언어로 응수하는 나비의 날갯짓처럼 가벼운 자태를 김정란에게서 배웠다. 당시 탐독하던 잡지 〈복음과상황〉에 실린 그의 인터뷰를 보면서도 다시 확신했다. 내가 어떤 변화를 위해 싸운다면 그 싸움의 자태는 어떠해야 하는지.

본지 2000년 11월호에 실린 김정란 시인 인터뷰. ⓒ복음과상황 정민호
본지 2000년 11월호에 실린 김정란 시인 인터뷰. ⓒ복음과상황 정민호

2000년대 전후한 시기에 ‘안티조선운동’이라는 전설 같은 운동이 있었다. 여기서 전설이라 함은 우리가 흔히 ‘레전드’라 칭하는 느낌의 ‘전설’은 아니고, 〈전설의 고향〉 할 때 ‘전설’에 가깝다. 이 아득한 ‘전설의 운동’은 언론학을 공부하고, 〈인물과사상〉을 정기구독하며, 당대 진보 지식인들을 아이돌 따라다니듯 좋아했던 내가 거부할 이유가 1도 없는 운동이었다.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조선일보〉를 구독했던 우리 집도 이때를 전후해 구독 신문을 바꾸었다. 한 거대 언론을 향해 ‘안티’를 표방한 운동이 나름 거센 반향을 일으키며 사회 의제를 만들어냈다. 사회는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싸우자’는 분위기였다. 얼씨구나, 내 세상이다. 나도 늘 싸우고 싶었으므로. 세상이 온통 불의하고 부조리하다고 느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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