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호 송지훈이 만난 활동가]
대전에서 담임목회도 하면서 지역의 투쟁 현장에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세월호, 이태원 참사 유가족을 위해 늘 발 벗고 나서는 사람. 하지만 막상 만나면 한참(?) 어린 제게 늘 멋쩍은 미소로 인사해주시는 전남식 목사님의 이야기를 언젠가 한번 듣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모든 것이 서울과 수도권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 나라에서 지역에서의 운동을 더 많이 소개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목사님이 담임으로 있는 꿈이있는교회(대전 노은동)로 향했습니다.
-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대전 노은동에 있는 꿈이있는교회 담임목사 전남식입니다. 성서대전에서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 어떤 신앙생활을 해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 때부터 교회를 다닌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이북 출신인데요. 의주라는 곳에 계시다가 한국전쟁 당시에 남하하셔서 대전에 정착하셨습니다. 어린 시절에 듣기로는 의주에 있는 한 교회에서 거기 젊은 사람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셨는데요. 자금책 담당이셨다고 합니다. 대전에 오신 이후에는 대전역 근처 장로교회를 다니셨고 모든 가족이 그 교회를 함께 다녔습니다.
- 목사로 살겠다는 결심은 어떻게 하게 되셨나요?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사고로 돌아가신 후 집이 어려워졌어요. 아버지도 몸이 약하셨고요. 그래서 1년 반 정도 떠돌이 생활을 했는데 저희의 이런 어려운 모습을 큰아버지께서 보시고 저와 여동생을 데려가셨어요. 사실 큰아버지께서도 형편이 좋지 않으셨는데도요. 그래서 이후로는 큰아버지 댁 근처 작은 교회를 다녔어요. 중학교 때 청소년부 수련회를 따라갔는데 저희 때는 그런 거 많이 했잖아요. 막 서원하고 헌신시키고.(웃음) 어린 마음이지만 당시 저는 나름 진지하게 고민했어요. 이 동네에서 자라면서 교회 어르신들이 많이 아껴주셨거든요. 그래서 목사가 되어 이 동네로 다시 돌아와 목회하겠다는 꿈을 꿨습니다.
- 대전에서 목회까지 하게 된 것이 굉장히 자연스러운 선택이었겠네요.
그렇죠. 그런데 아무래도 형편이 어렵다 보니 계속 신학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니던 교회가 침례교단이라 신학교도 한국침례신학대학교로 갔는데요. 당시 한참 문익환 목사님께서 방북하셔서 시끄럽던 시기였어요. 학교에서도 시위가 많았는데요. 담임목사님이 학교에서 절대 데모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현장에서 학생처장이 찍은 사진이 담임목사님께 들어간 거예요. 그래서 개교회에서 나오게 됐죠. 또 제가 워낙 숫기가 없어서 남들 앞에서 설교는 절대 못 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목회 말고 교수를 하는 방법은 없을까 하면서 신학교를 다녔습니다. 기숙사 살면서 새벽기도 설교를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하는데 죽을 맛이었죠. 아무튼 여차여차해서 나중에 영국 유학도 다녀오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어릴 때 다짐이 생각났어요. 내가 어린 시절 하나님과 약속했던 그 동네만 떠올랐어요. 그 동네가 효동인데요. 그렇게 어릴 때 살던 동네에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 성서대전은 어떻게 출범되었나요? 성서대전에서 만난 분들과의 첫 인연도 궁금하고요.
목회를 시작하고 나서 되게 외로웠어요. 생각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는 게 정말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교회 목사님들을 찾아가기도 하고 전화도 하면서 작은 교회들이 함께 모여서 지역사회를 위해 뭔가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다 거절하시더라고요. 그러다가 어느 날 구교형 목사님(현 성서한국 이사장)께 메일이 왔어요. 대전에서 성서대전을 함께 시작해보면 어떻겠냐고요. 그러면서 배덕만 교수님(현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학술부원장)과 배용하 대표님(현 대장간), 김신일 목사님(마당교회) 등과 함께 성서대전을 조직하게 됐습니다. 그게 벌써 11년 전이네요. 그러고 나서 이듬해에 바로 성서대전 지역대회를 했습니다.
- 혹시라도 잘 모르는 분을 위해 성서대전을 간단히 소개해주세요.
처음 성서대전을 시작했을 때 함께하겠다는 분들이 꽤 많았습니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성서대전이 세월호 편에 서는 모습을 보면서 함께하던 교회들이 많이 떨어져 나갔어요. 그 이후로도 성서대전은 해고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고함기도회를 꾸준히 했고요. 최근에는 보문산 개발 반대를 위한 고함기도회를 여러 단위와 함께 드리고 있습니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분들과도 계속 연대했는데요. 최근에는 유가족분들을 응원하기 위해 공연을 기획했다가 장소 대관을 대전시에서 거절하면서 언론 보도도 좀 나오고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외 여러 현장이 있는데 아무래도 지역은 이런 활동을 꾸준히 하는 종교인이 점점 줄어가고 있어서 저희 성서대전에 연대 요청이 정말 많이 옵니다. 모든 곳을 다 갈 수는 없겠지만, 힘이 닿는 대로 최대한 참여하려고 해요.
- 말씀해주신 대로 저도 대전에 올 때마다 느낀 것은 성서대전의 연대 폭이 상당히 넓다는 것이었는데요. 지역에서 개신교 단체가 다양하게 연대 활동을 펼치는 것은 무척 의미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활동을 하다 보면 함께하는 분들이 대다수 불신자이거나 무신론자들이거든요. 그런데도 왜 굳이 개신교의 목소리를 원하시는지가 늘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원했던 것은 자신들의 아픔이나 필요를 같이 외쳐주는 사람들인 것 같아요. 교회가 마땅히 서있어야 할 자리는 바로 그분들 곁을 지켜주는 곳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연대의 자리들에 저희를 끼워주는 것도 되게 고마운 일 아닌가요?(웃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분들과도 많은 연대를 하고 계시는데요. 어떤 활동들을 이어오셨나요?
특별한 건 없어요. 그냥 그분들과 함께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피케팅을 하고 있고요. 그리고 작년 1주기 때 우리 교회에 분향소를 만들고 유가족 대표 측에 조심스럽게 사진을 부탁드렸습니다. 주신 사진을 받아 현수막에 인쇄해서 교회 입구에 부착하고 성도들께 포스트잇에 추모의 글을 남겨달라고 했어요. 유가족분들 중에서 세 분 정도 오셨는데요. 그중 한 분이 자신은 교회학교 봉사도 하고 그렇게 교회를 열심히 다녔는데 막상 딸이 이태원에서 목숨을 잃은 후에 교인들이 이상한 이야기를 많이 하니까 그동안 교회에 다닐 수 없으셨대요. 참사 이후 그날이 처음 다시 드렸던 예배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아까 말씀드렸던 유가족분들을 응원하기 위한 공연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 목회와 사회참여를 병행하는 것이 쉽지 않으셨을 줄로 압니다.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나서 바로 유가족분들을 초청했어요. 첫 번째 초청 행사 때는 교인들이 별말씀 안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두 번째, 세 번째 할 때는 반발이 심했습니다. 당시 대형교회 목사들 중심으로 세월호를 정치적으로 만들고, 이제 그만하자, 침묵하자는 이야기들이 많았잖아요. 교인들도 그 영향을 당연히 받았던 거죠. 원래 제가 처음에는 공동 목회를 했는데요. 세월호 이후 교회가 두 팀으로 갈라졌어요. 그래서 결국 제가 분립을 하고 지금까지 이곳 노은동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 그럼에도 이 운동을 이어가시는 목사님의 마음이 궁금합니다.
저는 사실 목회에 크게 욕심이 없는 사람이에요. 저는 교회 안에 있는 분들뿐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까지도 우리 목회의 영역에 속한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저희 교인들에게는 1년에 딱 두 번 저와 개인적으로 밥 먹는 것만 하면 여러분의 할 일을 다 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교회 안에도 더 어려운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들에게 더 집중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우리 교회에는 건축이니 뭐니 하면서 헌금 강요 때문에 상처받고 떠나서 여기까지 오신 분들이 많거든요. 그런 분들은 교회가 좀 아쉬워도 헌금 많이 내라고 하지 않고 조용하게 목회하는 것에 동조해주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교인분들께 늘 고마운 마음입니다.
- 수도권 편중은 갈수록 심해지고, 수도권 외 지역에서는 산업, 교육,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역에서 꽤 오랫동안 터전을 닦아오시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으셨나요?
제가 이제 50대 중반인데요. 65세가 정년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은퇴가 얼마 안 남았잖아요. 제가 이 교회를 떠나면 그 이후에 과연 교회가 유지될까 싶은 게 솔직한 고민입니다. 성서대전의 목사님들과 종종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도 대전에 약자들 편에 서는 안정된 교회가 최소 몇 개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요. 그리고 대전은 도시 자체가 사람들이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는 곳이 아니거든요. 직업 때문에 오셨다가 떠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계속 떠나시기도 하고 새로 들어오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후배들이 최대한 안정적으로 교회와 성서대전 활동을 이어줄 수 있으면 합니다. 성서대전과 함께할 수 있는 교회가 몇 개만 더 생기면 좋겠습니다.
- 복음과상황도 이번 3월호가 벌써 400호를 맞이했고, 제가 몸담은 성서한국도 내년이면 20주년이 됩니다. 20-30년 전에는 복음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역동하던 시기였는데요. 이제 이 운동도 꽤 역사가 쌓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복음주의 운동이 더 확산되고 진보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복음주의 운동이 언제까지 복음주의로 남을 수 있을까요? 이제는 복음주의 운동이라는 말 자체를 넘어서야 하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냥 사회의 약자들이 있으면 그곳이 어디든 교회가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컬 운동을 자꾸 구분하지 말고 함께 손잡고 나아가야죠. 사회 곳곳에 스며드는 운동이 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 올해 성서대전은 어떤 계획들이 있는지요?
보문산 개발 반대 투쟁은 올해도 계속되고요. 앞으로는 기후, 환경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자리에 더 많이 참여할 것 같습니다. 세월호와 이태원 유가족분들과의 연대도 당연히 계속됩니다. 그리고 대전 기윤실과 목정평(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NCCK(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함께 후쿠시마 오염수 방출 반대를 위한 걷는 기도회를 합니다. 매월 셋째 주 주일 오후에 대전역과 중구청 쪽을 1시간 정도 걸으며 함께 구호도 외치고 기도도 할 예정입니다.
- 한국교회 성도들과 복상 독자분들에게 마지막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 자체가 예수님처럼 살겠다고 결단하고 따르기로 한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한 동네도 나사렛이었고, 갈릴리라는 촌 동네에서 촌부들과 함께하시면서 같이 음식을 나누고 친구가 되셨잖아요.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복상 독자분들이 자신들의 교회에서 더 많은 목소리를 내주시면 좋겠어요. 목사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다 따르지 마시고 어떤 이슈에 대해 신학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목사들에게 묻고 따져보면서 치열하게 소통해가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복상 400호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복상이라는 월간지가 내는 목소리가 그래도 한국교회를 깨워주고 도전해주는 것 같아요. 지금도 여전히 복상을 읽으면서 사람들과 나눌 때, 복상 독자가 정말 다양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00호까지 그렇게 달려오셨던 것처럼 500호가 될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큰 비중으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월간지가 되면 좋겠습니다.
진행 송지훈 성서한국 사무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