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호 무브먼트 투게더] 2023 성서한국 대회를 준비하며
수련회에 몇 명이 참석하는지가 중요한가?
인생에서 처음 경험했던 수련회는 중학생 때였습니다. 친구들과 낯선 경험의 장소로 떠나는 데서 오는 설렘, 시골 분교의 칠흑 같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기억, 저녁 예배 시간에 예수님 분장을 한 선생님이 십자가 모형을 들고 채찍 맞는 연기를 하실 때 꺼이꺼이 울던 기억까지…. 그 이후로 꽤 오랫동안 “나 그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처음 만난 것 같아”라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지만 사실 지금은 그저 가물가물하게만 당시를 떠올립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임팩트가 컸던 수련회는 대학교 신입생 때 갔던 선교단체 전국수련회였습니다. 선배들에 의해 끌려간(?) 수련회는 4박 5일 내내 비가 왔습니다. 가져간 옷은 첫날 다 젖었고, 좁은 텐트에 끼어 자느라 계속 피곤했습니다. 하지만 1만 명에 가까운 인원이 다 같이 찬양을 부르고 뜨겁게 기도하는 모습에 저는 왠지 모를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 제 20대의 모든 여름 한 중앙에는 수련회가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졸업 이후 선교단체 간사로 지원하게 된 것도 수련회가 좋아서였는지도 모르겠네요.
선교단체 간사가 된 이후에도 수련회는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학생들을 도우며 그들의 에너지를 함께 받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수련회에서 경험하는 업무는 무엇이든 다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련회가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습니다. 제가 일했던 선교단체는 전국의 거의 모든 대학에서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여름수련회 등록이 시작되면 전국의 캠퍼스와 각 지구의 수련회 등록 상황을 한눈에 통계로 볼 수 있게 간사들에게 띄워줍니다. 그리고 등록자 수를 내림차순으로 정렬하면 위에서부터 가장 많이 수련회에 등록한 대학들부터 다시 정렬됩니다.
여기에서부터 캠퍼스 간사들의 희비가 엇갈리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담당하는 캠퍼스의 등록 순위가 높을수록 아무래도 뿌듯할 수밖에 없지요. 여기엔 아주 큰 맹점이 있습니다. 규모가 큰 캠퍼스일수록 동아리 참여 인원도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간사들은 큰 캠퍼스를 맡아 사역하기를 은근히 (또는 대놓고) 바라게 됩니다. 저 또한 젊은 간사 시절 그런 바람을 마음속에 품었습니다. 자연스레 따라오는 크고 작은 질투심도 마찬가지이고요.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솔직히 그 시절 저도 그랬습니다.
사실 운동(movement)과 선교에 있어서 양적 성장과 확장은 중요한 목표 중 하나입니다. 저 역시 이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국 개신교에서 사역과 선교에 대한 평가의 80% 이상은 양적 수치를 통해서만 측정되는 것 같습니다. 교회든 선교단체든 청년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거의 이런 식으로 대화가 흘러갑니다. “청년 사역 많이 힘드시죠?” “거기는 요즘 얼마나 모여요?” 이런 환경에서 수련회는 이런 양적 평가를 하기 더없이 좋은 도구입니다. 물론 구령의 열정으로 동원에 힘쓰는 순수한 사역자들을 깎아내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수련회를 왜 해야 하는지 성찰하고자 한다면 이런 점들을 외면해서도 안 됩니다.

세 번의 전국대회와 재정 적자
수련회에 대한 저의 고민은 선교단체를 사임하고 성서한국으로 이직한 이후에 더 심화되었습니다. 사회선교 운동에 있어서 저는 초보적인 수준이었지만 선교단체 수련회 실무 경험을 인정받고 전국대회를 주 업무로 삼아 성서한국에 올 수 있었습니다. 성서한국에서 대회를 치르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일했던 선교단체는 규모가 커서 간사 수백 명이 스태프로 참여하기 때문에 진행에 커다란 차질이 빚어질 일이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서한국은 사실상 사무국 인원들이 대부분의 실무를 해야 해서 진행이 쉽지 않았습니다. 시행착오도 많았지요.
그런데도 대회 업무가 즐거웠던 것은 대회를 만들어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적인 참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2015년 대회부터 2017년, 2019년까지 세 차례 대회의 기획과 진행에 참여했는데요. 처음에 저는 프로그램과 강사진에 공을 많이 들였던 것 같습니다. 멀리서만 봐왔던 선생님들이 먼 논산까지 오셔서 대회장을 누비시는 모습이 뿌듯했습니다. 전체 주제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누가 봐도 오고 싶게 만드는 대회가 되길 원했습니다. 집회의 메신저, 찬양팀도 저는 모두 좋았습니다.
하지만 대회를 마치고 보니 재정적으로는 적자가 적지 않게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2015년에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가 유행하였습니다. 당시에는 대회를 못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메르스 때문이었다고 단정하긴 어렵겠지만 어쨌든 여러 요인 때문에 결과적으로 대회 동원이 예년에 비해 떨어지긴 했습니다. 막상 이런 결과를 받게 되니 사무국의 대회 실무자로서 좀 타격을 받았습니다. 특히 적자가 난 부분 때문에 크게 위축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성서한국에서의 첫 번째 대회를 치르고 나서 실무적으로는 어느 정도 성장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안에 남들이 모르는 매너리즘 같은 것이 발동하기도 했습니다. 대회가 어떻게 되든 적자만 안 나면 좋겠다는 마음과 매일 다투었습니다. 공교롭게도 2017년 대회는 2015년 대회보다 더 동원이 안 되었고, 적자의 폭은 더 커졌습니다. 두 대회를 마치고 나서 제 안에서는 쓰라린 마음이 더 커졌습니다. 그렇다고 대회가 실패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참석하신 분들이 주신 좋은 피드백도 많았습니다. 성서한국 대회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흔들린 적은 없었습니다. 그걸 너무 잘 아는데도 제 마음 한구석은 대회에 대해 늘 씁쓸함이 있었습니다.
2019년 대회는 전체 규모를 줄이고 서울로 장소를 잡았습니다. 영화로 따지면 제작비를 줄여 손익분기점을 낮게 잡은 것이지요. 현실적인 예산 집행을 한 덕에 재정 적자는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정도 규모와 계획이라면 적자 없이 안정적으로 대회를 치러낼 수 있겠구나.’ 여러 성과와 아쉬움이 있었음에도 어느 순간 이런 생각에 가장 많이 매달리고 있었습니다. 실무자가 빠질 수 있는 함정 같은 것 아니었을까요? 대회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고 사무국 담당자로서 역할 수행은 나름대로 성과를 이루어낸 것이 분명합니다만, 돌이켜보니 기계적으로 일을 진행했던 측면이 있었습니다.
대형 수련회의 시대는 정말 끝났을까?
그리고 그다음 해에 코로나가 찾아왔습니다. 수백 명이 모여서 숙박과 식사를 하면서 대회를 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시기였습니다. 성서한국 대회도 강제 휴업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팬데믹의 시간 속에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정말 많은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핸디캡은 교회의 기존 패러다임과 중심을 뿌리째 흔들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누려왔던 일상과 모임, 예배, 공동체의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강제로(?) 성찰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팬데믹의 시간 동안 대회를 못 하게 되면서 저도 생각의 전환을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이래저래 들어왔던 온갖 이야기들까지 다 펼쳐놓고 곱씹어 보았습니다. 찾아보니 재작년 이맘때 대회를 개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답답한 마음에 제가 SNS에 ‘반헛소리’를 이렇게 했더라고요.
사람들이 저를 만나면 전국대회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종종 물으십니다. 그래서 좀 생각을 해봤는데 몇 가지 생각이 춤을 춥니다.
1. 코로나가 여전한데 무슨 소리?
2. 그래도 내년이면 뭐라도 해볼 수 있지 않겠어?
3. 근데 비대면이 편해지고 줌에 길든 사람들이 굳이 돈과 시간, 에너지를 들여서 이런 수련회에 오겠어?
4. 비대면에 질린 사람들의 니즈가 폭발해서 오히려 수요가 급증하는 거 아님??
5. (갑자기) 대형 집회의 시대는 끝났다던데!!
6. 전국대회는 대형 아닌데?
7. 돈 있어?
8. 없어.
9. 참가비용도 비싼 주제에 왜 돈 없음?
10. 백신 맞으면 10% 할인해주고 선제적 검사 받아서 음성 나온 사람은 20% 할인해줄까??
11. 돈 없다며?
12. …그럼 그냥 온라인으로 해.
13. 온라인 지겹지도 않냐? 그리고 온라인으로 할 거면 당장도 할 수 있지.
14. 아 몰라. 하면 안 되는 이유가 더 많은 것 같네.
15. 그래도 필요한 사람들은 있지 않나?
16. 내 주위는 안 그런 거 같던데?? ㅋㅋㅋㅋ
17. 주변머리도 없는 게 주위에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
(2021년 6월 24일)
지금 다시 보니까 답이 나온 질문도 있었습니다. 재정 압박이 여전히 남아있는 저의 자아가 보이시죠? 작년부터 추세를 보니까 확실히 4번 질문은 당분간 유효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참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는 대형 수련회의 시대는 끝난 것 아니냐는 말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지적이라 생각합니다. 확실히 이제는 같은 고민과 생각을 나누는 장으로서의 소그룹 모임을 사람들이 더 선호하고 있습니다. 일상적 차원을 생각할 때 바람직한 방향인 것 같습니다. 다만 ‘대형 수련회의 시대는 끝났다’라는 말이 맥락과 실체 없이 활용되고 소비되는 것에는 갸웃하게 됩니다. 어떤 명제가 이유가 불분명한 채 레토릭으로 구사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분들의 냉소도 이해가 됩니다.
무엇보다 현재 교회들은 갈수록 자체 수련회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특히 수련회 기획과 진행이 자체적으로 가능한 규모가 큰 교회일수록 그런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아주 가끔 야속한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대형 교회의 요즘 사역 패턴을 보자면 자연스러운(혹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2박 이상의 전통적인 형태의 수련회를 할 수 있는 교회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중소형 교회들은 여름이나 겨울의 성수기에 비싼 숙소 비용 등을 감수하면서까지 무리하지 않고 오히려 날씨가 더 좋은 봄이나 가을의 주말을 이용하여 1박 2일 혹은 당일로 수련회, 야유회 등으로 대체하는 추세인 것 같습니다. 틀에 얽매이지 않는 현명한 목회자분들과 교회들이 늘어가는 것 같아서 좋아 보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성서한국 대회도 개최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겠죠. 위의 제 넋두리 중 15번, 필요한 사람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게는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2019년 대회 때 자원봉사자 형제 한 명과 제가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지방에 있는 모 대학에 다니는 친구였는데 대회에 참가하러 혼자 온 청년이었습니다. 당시 주강사 백소영 교수님께서는 페미니즘을 기반으로 강의를 해주셨는데요. 그 청년이 저에게 조심히 물었습니다. 전체 집회 메시지인데 편향적인 주제인 것 같다고요. 대화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 청년과 서로 존중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청년은 지역에 살면서 개교회나 속한 공동체에서 좀처럼 나누지 못한 고민이 많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청년, 교인들이 여전히 많이 있습니다. 답답한 마음과 고민을 안고 살다가 성서한국 대회에 와서 숨통이 그나마 좀 트였다고 이야기하는 청년이 적지 않습니다. 저도 수도권에 살고 있다 보니 무감각할 때가 있지만, 교육과 공유의 기회가 상대적으로 열악한 비수도권 지역에서 사는 청년일수록 박탈감을 더 크게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안 그래도 모든 것이 수도권에 치중된 나라인데 신앙적인 차원에서도 이런 불공평에 직면하게 되는 청년들과 교인들이 안타깝습니다. 거기에 믿고 갈 만한 좋은 수련회를 찾는 작은 교회의 청년과 교인들, 그리고 수많은 가나안 신앙인까지 생각한다면 성서한국 대회와 같은 장이 더욱 필요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번 대회를 위한 기획위원회 회의에서 한 분이 이렇게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성서한국 대회에 여러 번 참여했는데 다른 어떤 것보다 대회장에서 사람들과 가졌던 대화와 만남의 경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크게 공감이 되었습니다. 대화가 가장 중요하다?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낯선 관점일 수도 있고, 그리 와닿지 않는 필요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제 인생의 무수한 수련회의 기억 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것은 시설이나 프로그램, 메시지 내용이나 탁월한 강의, 주제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용히 누워 하늘의 별을 보던 야외의 밤공기, 옆 사람과 손을 잡고 하던 기도의 순간들, 친구와 밤새워 이야기할 때의 뭉클한 기분 같은 것들이 바로 제 수련회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2023 성서한국 대회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저는 이번 성서한국 대회가 정말로 필요한 사람들에게 조심스럽지만 진솔하고 안전한 대화의 장이 되기를, 치열하지만 정의로운 토론과 논쟁이 일어나는 장이 되기를, 무엇보다 따뜻하고 그리운 만남의 장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본에 충실했을 때, 우리 운동의 목표와 역동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입니다. 녹음이 푸르게 짙을 7월의 캠퍼스에 시원한 그늘과 테이블, 의자, 그리고 향이 좋은 커피를 준비해 놓겠습니다. 성서한국 대회가 깊고 즐거운 대화와 소통의 장이 될 수 있도록 많은 기도와 관심, 후원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송지훈
성서한국 사무국장. 2023 성서한국 대회 기획총괄. 본지 2020년 9월호에 인터뷰가 실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