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호 현대신학의 모험]

그리스도교는 교회를 비롯한 여러 공동체를 만들어냈으며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들의 상호관계 가운데 존재하면서 전개되어왔다. … 이러한 상호관계에서 교회는 거의 항상 중심적 위치와 역할을 감당해왔다. … 하지만 17-18세기 이후의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좁은 의미의 교회사 연구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 ; 근대에 더욱 현저해진 세속화 혹은 비그리스도교화 현상과 함께, 교회와는 무관한 그리스도교적 집단이나 단체들이 성립되었다. ;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교 복합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로 변화한 셈이다. (미즈가키 와타루(水垣渉), ‘그리스도교 복합체와 교회’, 〈일본의 신학〉 제33호 중에서)

실천신학의 쇄신으로부터 신학의 ‘주체와 장소’로

지난 호(2022년 11월)에서는 현대신학의 향방을 논하는 두 번째 축으로 ‘이론과 실천’을 다루면서, 신학을 구성하는 여러 분야의 상호 관련성에 대한 전체적 물음을 고찰했고, 신학 연구의 왕관으로 존재해야 할 ‘실천신학’을 쇄신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라고 확인했다. 이 과제와 씨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신학 동향을 살피고 동시에 신학 혹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논구하는 것이 전제된다. 이번에는 신학과 그리스도교를 재고하기 위해 제3의 축 ‘주체와 장소’(主体と場)에 주목하고자 한다. 새롭게 다루려는 세 번째 축은 지금까지 고찰한 두 축이 양극적이었던 점과 비교할 때 성격을 달리한다. 즉 ‘이론과 실천’이 지닌 양극성과 달리 ‘주체와 장소’는 오히려 긴밀하게 결합되는 표리 관계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주체는 ‘신학의 주체’를 의미하며 주체의 문제란 곧 “신학의 주체는 누구”인지, 혹은 “누가 신학자”인지, 더 나아가 “신학은 누구의 것”인지 하는 문제이다. 장소는 ‘신학의 장소’를 의미하며 장소에 대한 물음이란 “신학이 성립되는 장소는 어디에 있는가” “신학의 영위는 어디서 가능할 수 있는가”, 그곳은 “신학교인가? 교회인가?” 그도 아니라면 “다양한 그리스도교적 그룹인가?”와 같은 질문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 두 가지 물음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두 물음으로 나아가기 전에 해방신학 계통과 과학기술신학 계통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그리스도교 동향을 확인해두고자 한다. 서두의 인용문을 쓴 미즈가키 와타루(1935-, 교토 대학 명예교수)는 현대 그리스도교를 ‘그리스도교 복합체’로 표현한다. 세속화가 진행된 사회에서 교회뿐 아니라 그와는 독립된 별개 그리스도교적 집단이나 단체가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연동되어있는 복합체, 즉 ‘복잡한 네트워크’로서 그리스도교를 말한다. 여기서 ‘그리스도교적인 것’의 복합체라 함은 다원적 혹은 다형적 방식으로 분산되어 중심과 주변이 애매해진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신학이나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대한 물음에 답하기가 쉽지 않다. 이 질문에 응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신학의 ‘주체와 장소’ 관점에서 접근해보고자 한다.

신학의 주체는 누구인가? 누가 신학자인가?

‘주체’에 관한 물음부터 시작해보고 싶다. 신학의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 이 물음에 우선은 ‘신학자’라고 답할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소개한 ‘그리스도교 복합체’의 현실에서 과연 누가 신학자인 것일까? 대학 신학과나 교단 신학교에서 공부한 뒤, 신학석사 혹은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대학이나 신학교에서 교육 및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신학자인 것일까? 물론 이들도 신학자이다. 문제는 ‘신학의 주체’로서 신학자를 대학 신학과나 신학교 관계자로만 한정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이어진다는 점이다. 논의를 진전하기 위해 위르겐 몰트만이 쓴 《신학의 방법과 형식: 나의 신학 여정》(Erfahrungen theologischen Denkens)1)을 참고해보고 싶다.

몰트만이 전개한 논의의 특징은, 신학적 사고를 그리스도교와 상황 사이에 존재하는 양극 구조 혹은 양극단의 해석학적 순환에서 포착했다는 점이다. 이 경우 그리스도교의 초점은 성서 텍스트에 맞춰지고 그리스도교 신학은 동시에 “성서에 입각”하고 “문맥상 연관이 있어야” 한다(41쪽). 그리스도교 복합체에서 성서는 규범적 위치를 차지하며, ‘신학적 문맥’(상황)은 ‘신학적 실존’(주체)의 경험을 통해 신학적 사고로 매개된다. 즉 ‘텍스트 해석과 가족, 이웃, 일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상호 간 교제 경험의 해석학적 순환’(30쪽)이야말로 신학이 성립되는 장소가 된다. 이는 틸리히가 《조직신학》(제1권)에서 ‘신학적 순환’으로 표현한 것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신학이 자주 빠져드는 문제점은 ‘성서 텍스트’(그에 대한 해석을 포함)와 ‘상황’ 양쪽에서 모두 인정된다. 예를 들어 성서해석(신학)의 주체를 둘러싸고 개신교 정통주의와 경건주의 사이에서 쟁점이 되었던 ‘재생자의 신학’을 들 수 있다. 신학자이기 때문에 재생의 경험이 필요한가 아닌가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정통주의는 신학이 도그마에 대한 객관적 학문이라는 점에서 학문적 절차를 올바르게 따지면 재생의 경험이 없는 비재생자라도 신학을 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반해 경건주의는 재생의 경험을 가진 재생자만이 신학자일 수 있다고 답했다. 몰트만은 정통주의 혹은 학술적 신학이 빠질 위험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학술적 신학과 대중을 향한 신학, 두 갈래의 신학은 서로 관계를 맺고, 서로를 의식하며, 서로를 통해 배워야 한다. 학술적 신학은 민중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기반을 잃어버린다. 교회가 없으면 신학은 대학의 학문 분야로 존재할 수 없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종교학에 흡수되어 사라지고 말 것이다. (36쪽)

‘신학의 종교학화’라는 동향은 실제로 근대 이후 현재도 진행되고 있으며, 신학은 고유한 기반을 찾기 위해 고민 중이다. 긴장과 위험은 정통주의만이 아니라 경건주의 쪽에도 존재한다. 경건주의적 재생자의 신학이 결국 ‘경건한 스스로를 향한 퇴각, 자신을 확인하는 비밀 집회 속으로의 퇴각’(40쪽)이 될 경우 표면화된다.

공적 사회기관으로부터의 퇴각은 분명 그리스도교적 동일성을, 말하자면 순수하게 유지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리스도교적인 것의 적합성을 희생한다. (40-41쪽)

학술적 신학은 교회나 민중과의 관계를 상실할 때 신학 고유의 기반을 상실하며 그리스도교적 자기동일성은 위기에 빠진다. 즉, 성서 텍스트 해석의 극단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에 반해 경건주의가 세속적 사상이나 타 종교와의 상호 절충 장소인 공공 세계에서 비밀 집회로 퇴각하게 되면, 상황에 대한 적합성이 희생된다. 즉 상황의 극단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상 그리스도교 고유한 기반에 대한 관여(혹은 관여하는 결단)를 전제하여 구체적으로는 성서 텍스트와 실존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특정한 교파적 입장에 갇히지 않고 공공 세계에 열린 태도를 잃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신학자’로 불리기에 적합하다는 말이다. 신학은 특별한 교육이나 학식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며, 특정 교파에 의한 공인이 신학자를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몰트만은 루터의 아래 언급(WA41, 11)을 인용하면서 그 사실을 명확히 한다.

모든 사람이 신학자라는 말은 어떤 그리스도인이든 모두 신학자임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인일 수 있듯이 모든 사람은 신학자라고 불릴 수 있다. (37쪽)

‘만인사제’(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라는 종교개혁적 테제는 모든 신앙인에게 열려있는 공통의 신학을 요구한다. 그것은 남성들에 의해 결정된 전통 신학이나 유럽의 신학 논리가 공고히 해온 지배력을 뛰어넘을 수밖에 없다. 세속적 공공 세계(상황)로의 관련성을 생각해볼 때, 신학적 사고를 신앙인과 신앙 공동체에 한정할 수는 없다. 몰트만이 위에서 계속 문제 삼았던 점은 신학에서 무신론자가 지닌 의미, 즉 ‘무신론자의 신학’(Atheistic Theology)이다.

무신론과 불신앙에 대한 결단을 근거 삼아 무언가를 생각하는 어떤 불신앙인조차도 한 사람의 신학자가 아닐까? 신과 신을 향한 신앙에 대해 어떤 반대를 하는 무신론자들은 누구를 혹은 무엇을 거부하는지를 늘 매우 자세히 인식하고 있으며 여러 근거를 가지고 있다. ; 근대의 종교 비판은 그들의 반(反)신학에서도 여전히 신학적이다. (41쪽)

앞에서 말한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기반에 대한 관여(혹은 관여하는 결단)를 전제하여 구체적으로는 성서 텍스트와 실존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때, ‘무신론자의 신학’이 성립된다는 것은 결코 자명한 일이라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아래 몰트만의 말을 들으면 무시할 수 없는 진리를 향한 결정적 계기(真理契機, 진리계기)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버림받은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신의 현재를 인식하는 사람은, 극복한 사람으로서 자신 안에 반항적(反抗的) 무신론을 지니고 있다. (43쪽)

그리스도교 신학은 예수를 위한 신학이며 그리스도에서 소박한 유신론과 그에 대응하는 무신론 사이의 양자택일을 뛰어넘는다. ; 그리스도교 신학자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뿐 아니라 신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될 수 있어야 한다. (44쪽)

적어도 그리스도교 신학의 시선은 무신론자에게도 열려있어야 하며, 무신론자의 말이 가진 ‘진리를 향한 계기’에 귀 기울이는 자세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현대신학의 향방’에 진지한 관심을 둔 사람은 모두가 “신학자가 될” 가능성을 지닌 셈이다. “누가 신학자인가?” 하는 물음에는 가능한 한 다양한 사람들을 신학자의 자리에 초대한다고 대답해야 하지 않을까?

신학의 장소는 어디인가? 신학하기는 어디서 가능한가?

다음으로 신학이 일어나고 성립되는 자리, 터, 즉 ‘장소’(Places)의 문제를 고찰하고자 한다. 앞서 언급한 ‘상황’이라는 말에서 상상할 수 있듯이 신학의 장소는 교회든 신학교든, 공간을 미리 특정(한정)하여 제약할 수는 없다. 신학의 주체가 “삶을 지탱해주는 지식”(29쪽)을 찾아낼 수 있는 곳은 모두 신학의 장소가 될 수 있다. 몰트만은 《신학의 방법과 형식: 나의 신학 여정》에서 인생 여정을 되돌아보며 자신의 ‘신학적 실존’(자신의 신학), 교회, 대학을 순서대로 열거하면서 ‘신학의 장소’를 성찰하고 있다. 그의 인생 여정은 종파를 넘어 신의 모든 백성에게, 그리고 공공성 혹은 ‘다원종교적 사회의 세속성’(44쪽)을 넘어 최종적으로는 “삼위일체의 ‘넓은 공간’”(내 발을 뻗을 넓은 곳)으로 나아간다.2) 신학의 장소에 대한 물음에는 한정된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끝없이 펼쳐나가는 장소, 즉 “어디든, 어디서나”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대답만으로는 너무나 막연할 수 있기에 구체적 고찰을 위해 지난 호에서 언급한 실천신학과 관련한 장소이론을 참조해보고자 한다.

다루고자 하는 내용은, 풀커슨(Mary M. Fulkerson)이 쓴 《구원의 장소 ― 세속적 교회를 위한 신학》(Places of Redemption: Theology for a Worldly Church, 2007)이다. 풀커슨은 구리바야시 테루오가 “뛰어난 분석력과 함께 장래가 기대되는 사람”이라고 평가한 페미니스트 신학자이다(《구리바야시 테루오 셀렉션 2 ― 미국 현대신학의 항해도》). 현재는 미국 듀크 대학 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 등을 가르치고 있다. 위 책은 저자가 미국연합감리교회(UMC)의 선한 사마리아인 교회(Good Samaritan church)에서 ‘참여관찰’ 방식으로 4년간(1996-1999) 실시한 현장조사에 근거하여 새롭게 구상한 실천신학의 가능성을 논한 내용이다. 우선 현장조사와 실천신학의 결합을 주목해볼 수 있는데, 현재의 실천신학 영역에서 새로운 시도에 속한다. 지난 호에서도 지적했듯이 실천신학은 ‘신학 연구의 왕관’이라 불리면서도 툭하면 성서 등 권위 있는 문헌이나 교리를 교회 생활의 여러 측면에 적용하는 수준의 신학, 이른바 ‘응용신학’ 정도로 치부되어왔다. 이에 반해 풀커슨의 실천신학은 실천 개념 확장과 신학적 사색의 관계를 재검토할 것을 요구한다. 실천신학에서 거론되는 ‘실천’은 물론 ‘그리스도교적 실천’을 의미하지만, 흔히 폐쇄적 이미지로 전락하기 쉬운 ‘교회 안’ 실천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 필요와 조건’(신체성, 사회적 관계성, 언어 사용 등)에 따라 집단적으로 만들어지고 공유된 실천을 의미한다. 교회는 상황 안의 장소로 받아들여지지만, 교회라는 곳은 동시에 세상 사람들의 공동체이고, 거기서는 특별한 응답을 요구하는 문제가 발견된다. 신학적 사고는 이 작업을 요구하는 ‘문제 = 상처(wounds)’를 자신의 과제로 자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러한 논의는 포스트모던의 장소이론을 분석 기초로 삼으며, 방법론으로는 장소를 기술하기 위한 문화인류학적 혹은 에스노그라피(ethnography, 민족지)적 현장조사를 포함한다.

이러한 구상에 따라 풀커슨은 ‘선한 사마리아인 교회’를 장소로 삼아 현장조사를 실시했고, 거기서 실천신학을 새롭게 형성해갔다. 내용을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일단 선한 사마리아인 교회라는 장소는 미국 사회의 세속성 틀로 규정된 특성을 지닌다. 즉, 미국 사회의 여러 모순, 특히 소수자의 현실이 교회라는 곳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존재한다. (여기서 소수자란 인종이나 성의 다양성 속에서 차별과 억압을 받으며 사회적으로 이질적인 존재로 취급되는 사람들, 타자 혹은 이방인, 주변인으로 대우받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현실을 파헤치고 분석하는 일, 즉 상황을 주시하고 신학적으로 반성해가는 일은 실천신학 여러 과제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풀커슨의 구상은, 선한 사마리아인 교회를 ‘인간으로서 삶이 파괴된 사람들’, 즉 ‘상처입은 사람들’로 새롭게 읽어내는 시도이다. 여기서 말하는 ‘상처’는 특별한 방법을 통한 응답, 즉 보상이나 구제(redress)를 요구하는 일을 쉽게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교회라는 장소는 다음 두 가지 특성으로 그려진다. 우선 교회는 이 세상의 사회적·정치적 억압구조의 연장선상으로 규정되어, 세상과 마찬가지로 상처받은 사람이 자주 무시되고 배제된다. 일본이나 한국의 교회는 어떤 모습인가? 풀커슨은 이 특성을 “잊어버림 혹은 염두조차 없음”(obliviousness)과 “기피”(aversive reactions)라는 말로 표현한다. 마이너리티(소수자)는 분명 그 장소에 있음에도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된다. 이른바 ‘투명인간 취급’을 하며 “보고 있지만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듣고 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처럼 마음에 두는 것조차 하지 않는 모습은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자동 반사적이다. 말하자면 이질적인 사람이나 타자를 직면했을 때 느끼는 위화감이나 어색함, 불편함은 거북스러움이 담긴 말과 행동으로 드러낸다. 이를 더욱 뚜렷이 의식하면 공공연한 기피로 나타난다. 신학적 사고는 이러한 장소를 규정하는 상황의 구조를 그려내는 작업으로 시작해, 그것을 신학적으로 분석하고, 이 장소가 지녀야 할 본모습으로 변혁해나가는 논리를 탐구한다. 풀커슨은 무시와 배제에 대하여, 그 반대쪽 극단에 위치하는 장소의 본모습을 ‘드러남이 공유된 공간’ ‘드러남의 장소’(aplace to appear)라고 명명한다. ‘드러남’(appearance)이란 ‘신경 쓰지 않는 것’ ‘기피’에 의해 망각되고 배제된 타자들이 ‘새롭게 발견되고’ ‘승인되며’ 그와 동시에 이 타자들을 통해 또 다른 사람들이 다시 승인되는 장소라는 제2의 특성을 지닌다. 이 특성은 한나 아렌트가 공공성의 특징 중 하나로 꼽았던 ‘드러남의 공간’, 즉 내가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고 다른 사람이 나에게 나타나는 ‘공적 공간 = 공적 영역’(Public Realm)에 대응하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잊어버림” “염두조차 없음” “기피”가 발생시킬 상처를 보상하고 ‘드러남의 공간(장소)’으로 전환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이 실천신학의 물음인 셈이다.

풀커슨이 추구한 실천신학의 포인트는 위와 같은 관점과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작업이 ‘응용신학’에 머물지 않았음은 명백하다. ‘드러남의 장소’의 모델이 될 만한 것을 성서에서 찾아보면, 크로산(John D. Crossan)이 예수의 종교 운동에서 발견한 ‘열린 식탁’(open table)을 들 수 있다. 모든 인간, 특히 죄인들에게 열린 예수의 밥상, 하나님 나라의 큰 잔치다. 그곳에는 나를 위해서도 앉을 자리가 마련돼있기에, 나 역시 당당한 한 사람으로 그 자리(장소)에 나타날 수 있도록 허락된다. 이 세상에 나타나는, 혹은 드러나는 장소의 도래를 대망하며 모인 공간, 이것이 바로 ‘신학의 장소’ ‘신학이 설 자리’가 아닐까? 다시 말해 신학함을 펼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말이다.

‘신학의 향방’을 신뢰하기 위해

신학의 주체와 장소(자리)가 위 설명과 같다 할지라도, 다가올 신학을 현대 세계에서 제대로 전망할 수 있을까? 현실의 절망적 상황 앞에서 우리가 체념에 빠져있는 것은 아닐까? 신학에 요구되는 과제는, 이 체념과 죽음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출구를 찾아내 제안하는 일이다. 물리학자 다카기 진자부로(高木仁三郎, 1938-2000) 말을 빌리면, 체념을 넘어 한 발짝 더 나아가기 위해 ‘희망의 조직화’(《시민과학자로 살다》)에 힘쓰는 일이다. 한계를 넘어서 나아가는 것이 현대 그리스도교 신학에 요구되고 있다. 

■ 주

1) 이하 쪽수는 《신학의 방법과 형식: 나의 신학 여정》 일본어판을 기준으로 한다. 한국어판은 2001년 출간되었다.
2) ‘내 발을 뻗을 넓은 곳’(わが足を広きところに)이라는 표현은 몰트만의 자서전(《‘わが足を広きところに’は、モルトマンの自伝》) 제목과 같다. (독일어 원서 제목은 Weiter Raum : eine Lebensgeschichte이며, 한국어판은 2011년 출간되었다.)

 

■ ‘현대신학의 모험’은 이번 회로 연재를 마칩니다.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과 지면을 빛내주신 필자와 역자에게 감사드립니다.

아시나 사다미치
교토 대학 이학부 물리학과와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한 뒤, 동 대학 대학원 ‘그리스도교학 연구실’에서 문학석사 및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오사카 시립대학 교수를 거쳐 교토 대학 문학부 및 문학연구과에서 그리스도교학 담당 교수로 25년간 가르쳤다. 은퇴 후 현재는 간세이 가쿠인 대학 신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틸리히와 현대종교론》 《틸리히와 변증신학의 도전》 《자연신학 재고 : 근대 세계와 그리스도교》 등의 저서가 있다.

홍이표(번역)
연세대 학부에서 신학과 법학을 공부하였고, 연세대 대학원에서 신학박사(교회사 전공), 교토 대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일본그리스도교사상 전공)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일본 야마나시 에이와 대학(山梨英和大學) 준교수 겸 종교주임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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