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호 민민과 생귄의 대중문화 돌려보기]

섞이지 않은 것은 한우밖에 없다
얼마 전 라디오방송에서 한우(韓牛)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을 들었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소는 한국 사람들보다 훨씬 순종에 가까운 유전자를 가졌다는 내용이었다. 과학적 사실이니 반박이야 불가하겠지만, 감정적으로 불편해할 사람들도 있겠다 싶었다. ‘순수혈통, 단일민족 한국인’ 신화는 누군가의 긍지이자 자부심일 수 있다. 물론 대륙 끝자락에 자리 잡은 반도이고, 여러 주변국이 있으며, 다수의 침략과 전쟁을 겪어온 땅에 사는 사람들이 하나의 유전적 족보만을 이어왔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점은 누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안다. 다만 ‘하나’일 것이라 믿어온 마음과 그것이 순수하고 온전하다고 여겨온 생각이 부정당하는 듯해 감정이 상할 터이다. 섞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순수하고 온전하다는 의미와 반드시 연결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어쩌면 섞인 것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단순히 ‘(유전자 등이) 섞였다’는 사실에 대한 불쾌감보다는 나의 문화와 다른 문화의 경계가 허물어졌다는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기독교만의 문화’라는 것이 있던가!
기실 섞이지 않은 것에 대한 기대와 믿음은 인류 역사 속에서 섞이는 것에 대한 경계와 저항으로 표현되어왔다. 종교는 이 부분에 있어 가장 완고한 입장을 표명해온 체제 중 하나이다. 특히 여러 종교가 자리 잡고 있던 지역에서 생겨난 종교일수록 사고와 문화가 섞이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왔다. 기독교가 고수해온 ‘혼합’의 불가능성 역시 그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독교는 시작부터 유대인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적 배타주의를 모토 삼아 발전해왔다. 물론 유대인을 하나의 혈족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미비하나, 이들은 주변 민족들의 다신교 문화와는 구분되는 유일신 신앙을 근거로 한 순전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일을 이상으로 삼았다.
레위기를 포함한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신앙 및 생활 규범들은 섞이는 것에 대한 유대인들의 위기의식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이상적인 이분법, 즉 유대인과 비유대인(혹은 이방인)의 완벽한 구분은 사실 실현 불가능한 관념이었다. 설령 그들과 그들 주변이 모두 단 하나의 종교의 영향 아래에 있었고, 단 하나의 혈족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였을지라도 이미 그들이 누리는 문화적 산물들은 유대인 고유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음식이나 의복, 생활 습관이나 종교적 관습까지 유대인들이 향유하던 것들은 상당 기간 동안 다양한 지역의 민족문화가 섞여 만들어진 결과물들이었다. 이를 부정할 수는 없었던바, 유대 공동체는 율법과 같은 종교적 규율을 통해 ‘순전한’ 유대인의 기준을 만들고 여기서 벗어난 모든 것들을 ‘부정한’ ‘이방인의 문화’로 규정하게 되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는 철저한 이분법적 사고는 구약시대를 지나 신약시대까지 이어진다. 특히 유대인들의 메시아 신앙, 즉 여러 강대국의 침략과 지배 아래에서 자신들(만)을 구원해줄 메시아를 기다리는 신앙은 로마제국의 압제 속에서 더욱 강해졌다. 심지어 예수의 제자들은 구약시대 하나님의 약속이 결코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하려 했다. 유대인 중심의 이분법을 붙들고 있던 완고한 고집은 사도행전 10장에 기록된 ‘베드로의 환상’ 사건 후에야 마침내 의미를 잃게 된다. 이후 바울을 통한 비유대인 선교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고, 가르거나 섞이는 것에 관계없이 온 인류를 사랑하는 창조주에 대한 복음이 비로소 널리 전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성경의 시대가 끝나고 기독교라는 종교 체제가 굳건해지면서 기독교 외부 문화를 이해하거나 포용하는 데 한계가 있던 기독교인들은 또다시 ‘섞이는 것’에 경계의 날을 세우게 된다.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구분 없이 고루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기록된 성경 가르침을 따라, 교회가 문화적 포용력을 현실 세계에서 실현하기에는 감당해야 할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문화의 혼합이 교회 존립을 흔들 수 있는 위협으로 다가왔다. 따라서 교회는 기독교 문화와 비기독교 문화라는 새로운 이분법적 틀을 만들고, 이를 유지한다면 다른 문화적 체제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문화 체제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왔다.
물론 이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문화관의 한계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저 이상에 불과했다. 수많은 기독교인이 ‘기독교 문화’라고 여겨온 것들은 이미 인류 역사 속에 존재해온 다양한 문화 요소들의 혼합이었다. 예를 들어 교회의 건축양식이나 교회 내부와 외부를 장식하는 상징들, 교회에서 사용하는 기자재나 음식, 예복 등은 모두 오랜 시간 다양한 문화적 산물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결과물임을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교회를 구성하는 기독교인들은 교회나 신앙 공동체와 같은 특정한 종교적 영역 밖에서 일상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의 일상 상당 부분은 기독교와 무관한 문화적 요소로 채워져 있었다. 삶을 영위하기 위한 다양한 수단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활동들, 그리고 여러 관계와 매개들은 분명 기독교 문화의 선을 넘어선 다른 문화들의 혼합물이었다.
교회는 이러한 문화적 현실 앞에서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을 마련해야 했다. 안타깝게도 이는 유대인들의 이분법적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유대인들처럼 종교적 법률을 통한 제재를 가할 수는 없었기에 교회는 그들과는 다른 방법을 통해 문화적 구분을 확고히 하려 했다. 다른 문화와의 교차 영역에 대한 정죄였다. 물론 모든 교차 영역에 대한 정죄는 불가했기 때문에, 교회는 특정 문화에 비판의 초점을 모았다. 물질문명, 소비문화나 유흥문화와 같이 유형적이고도, 쉽게 빠져들 만한 것들은 대표적인 경계 대상이었다.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수준에서 향유할 수 있는 문화임에도, 이러한 문화에 대한 교회의 정죄는 기독교인들에게 지나친 죄책감을 심었고,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스스로 검열하며 위축된 삶을 살게끔 만들었다.
아, 니버, 니버, 니버!
이러한 교회의 태도는 한 신학자의 연구를 통해 더욱 완강해진다. 기독교와 문화 연구의 고전으로 알려진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이다. 니버는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다섯 가지 유형 ―대립유형, 일치유형, 종합유형, 역설유형, 변혁유형― 으로 나누고, 각각의 관계가 의미하는 바와 그것이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를 서술하였다. 흔히 알려진 내용과 달리 《그리스도와 문화》는 한 가지 유형의 정당성을 주장하거나 지지하는 연구가 아니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다양하게 출현한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유형별로 분석하고 정리한 책이다. 따라서 니버의 연구를 인용하며 하나의 유형만이 옳다고 주장한다면 저자의 의도를 왜곡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니버의 저작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사용된다. 대표적인 예는 ‘그리스도와 대립하는 문화’ 유형에 방점을 찍고, 기독교와 문화의 혼합적 관계를 비판적으로 해석하려는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니버의 분석을 해석으로 오인하여, 기독교와 문화는 서로 대척점에 서있기 때문에 결코 섞일 수 없다는 자신들 입장의 근거를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찾았다. 크레이그 카터와 같은 학자는 니버가 기독교와 문화의 혼합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네 가지 유형을 제시한 이유는 결국 ‘그리스도와 대립하는 문화’ 유형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반면에 다른 입장을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은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 유형을 강조하며, 세상 문화를 변화하는 일이야말로 교회의 사명이라고 주장해왔다. 물론 기독교라는 종교가 내세우는 가치들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 하지만 문화 변혁이라는 목표를 결국 대중문화와 같은 일부 유형문화에 대한 비판, 그리고 대안으로 기독교 문화를 제시하는 선에서 시행한다면, 이는 그 자체로도 설득력이 없다. 니버의 유형론이 가진 본래 의미를 살리지 못했다는 점과는 별개로 말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니버의 연구는 어디까지나 유형론적 분석이며, 따라서 하나의 유형에 집착하는 일은 나머지 네 가지 유형을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자칫 《그리스도와 문화》가 가지고 있는 연구의 의미와 별개로, 이를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이들의 제한된 관점에 의해 잘못 해석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니버의 유형론에 비판할 부분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와 문화》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니버의 연구가 ‘기독교’와 ‘문화’라는 두 개의 체제를 구분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곧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일으킨다. 기독교 관점에서 형성된 가치판단적인 이분법 ―‘기독교는 옳고 그 외는 그르다’와 같은― 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점과는 별개로, 과연 기독교와 문화를 구분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기독교는 문화인가, 아닌가? 기독교가 문화라면 기독교와 문화의 다섯 가지 관계라는 구분 자체가 무의미한 것 아닌가? 기독교가 문화가 아니라면 기독교는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결국 또다시 ‘섞이는 것’에 대한 논쟁인 셈이다.
이와 같은 (상당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와 문화》 이후로 한동안 신학계에는 이렇다 할 문화 연구가 나오지 않았다. 니버의 저서가 워낙 훌륭한 고전으로 인정받은 데다가, 이미 다섯 개나 되는 유형을 분석해 놓았기에 기독교와 문화의 이분법을 전제한 상황에서 그 이상 가능한 유형을 찾기란 쉽지 않았을 터이다. 1951년에 발간된 《그리스도와 문화》의 아성은 결국 1997년에 와서야 보완, 대체의 수순을 밟게 된다. 캐스린 태너가 《문화의 이론들》(Theories of Culture: A New Agenda for Theology)을 발간한 것이다. 태너의 문화 연구는 ‘명확한 구분선을 가진 문화란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그동안 니버에 근거한 신학적 문화 해석이 가지고 있던 한계를 넘어섰다고 할 수 있다. 태너에 따르면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문화들은 여러 문화 요소들의 조합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 중 상당수의 문화 요소들은 공유되는 부분이 있다. 즉 여러 문화는 교차점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 발전한다. 기독교 역시 다양한 문화의 영향 속에서 발전한 인간의 문화이며, 따라서 기독교와 다른 문화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일은 불가능하다.
기독교뿐 아니라 인류가 만들어온 모든 문화는 근본적으로 섞여있다는 태너의 주장은 신학적 문화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 무엇보다 기독교와 다른 문화들 사이의 교차점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설명하고, 이를 통해 기독교가 발전해왔다는 주장은 그동안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던 ‘문화가 섞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버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더불어 다른 문화와 섞이지 않는 기독교 문화만의 고유한 특성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연구가 진행되었다. 문화는 마치 행성과 같아서 고유한 문화적 가치가 핵의 역할을 한다면, 이 가치가 끌어당긴 다양한 문화 요소는 행성의 외부와 같이 한 문화의 형식을 형성하게 된다. 한번 형성된 문화는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지 않고 유동성을 띠거나 사라지기도 하는데, 각각의 문화에 속한 사람들의 검증과 논의를 통해 새로운 문화 요소들을 더하기도, 기존의 문화 요소들을 덜어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에 대한 신학적 연구에서 중요한 지점은 기독교 문화에서 핵의 역할을 하는 가치는 무엇이며, 이 가치가 어떤 문화 요소들을 끌어당겨 특정한 형식을 만들어냈는지 분석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결국 기독교와 다른 문화 간의 필연적인 상호 관계를 전제한 연구들이 진행될 필요가 생겼다. 실제로 《문화의 이론들》 출간 이후, 문화에 대한 신학적 연구는 마침내 기독교와 타 문화 사이의 경계선 긋기에서 벗어나 다양한 문화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한 탐구로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이는 비단 정치, 경제, 사회문화와 같은 기존의 신학적 연구 분야뿐 아니라, 대중문화와 같은 경계의 대상이었던 문화까지도 연구 영역을 확장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한국교회 ‘라떼’
그렇다면 과연 한국교회의 문화 이해는 어떠한 흐름을 거쳐왔을까? 한국교회가 문화에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문화’라는 키워드가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기 시작한 1990년대 중후반부터다. 물론 한국 사회에서 한국교회의 문화적 영향력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강, 약의 흐름을 이어왔다. 한국전쟁 이후 피폐해진 한국 사회에 각종 문화 인프라를 제공했던 것은 한국교회였다. 사람들의 아픔과 상처를 돌봐주던 설교부터 찬양, 답답한 마음을 소리로 풀어내던 통성기도는 그 자체로 회복의 시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문화 체험 기회를 제공했다. 아이들을 위한 문화 프로그램이 없던 시절, 교회는 주일학교와 성경 공부,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 등 교육·돌봄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청소년들과 청년들에게 교회는 음악, 연극, 율동과 같은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공간이었고, 문학의 밤 등 행사를 통해 갈고닦은 실력을 선보일 수 있는 무대였다.
하지만 1970년대 말부터 한국의 대중문화가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한국교회의 문화적 영향력은 급격하게 위축되었다. 컬러텔레비전 보급과 프로스포츠 시대의 개막은 교회에서 제공하지 못하던 말초적 흥미를 자극할 수 있는 문화를 선보였다. 사람들 관심이 분산되면서 교회가 제공하는 문화는 종교 영역을 넘어서지 못했고, 이는 곧 성장률 감소와 같은 위기로 다가왔다. 그렇게 1990년대 중반을 맞이한 한국교회는 거대한 대중문화의 영향력 앞에서 태도를 정비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일부 한국교회는 대중문화의 일부 요소들을 적극 받아들여 종교적으로 활용할 방안을 찾게 된다. 마침 미국을 통해 소개된 ‘경배와 찬양’ 스타일의 구도자 예배는 이들 교회의 좋은 예가 되었다. 콘서트 현장을 방불케 하는 악기와 무대 설정, 현대음악 장르를 차용한 찬양, 최첨단 영상 기기를 사용한 예배는 이전과 다른 기독교 문화를 만들어냈다. 이와 달리 대중문화 영향력 확장을 염려하던 기독교인들은 대중문화를 적극적으로 경계하는 운동을 통해 입장을 분명하게 했다. ‘낮은울타리’와 같은 선교단체 등이 진행하던 ‘뉴에이지 문화 반대 운동’과 같은 반-대중문화 운동은 기독교 문화의 경계를 분명히 긋고자 했던 움직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적으로 진지하게 고민할 새도 없이 목회 현장에 다가온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처세에 몰입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적 이유를 인정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위에 열거한 한국교회의 태도는 다른 문화를 이용하거나 거부한다는 단편적인 입장만을 표명한 실천이었다. 이런 한계를 넘어 1990년대 말, 문화선교연구원에서 소개한 ‘문화선교’ 개념은 기독교와 다른 문화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고찰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실천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문화선교란 기독교 외의 문화를 선교 대상으로 삼고 복음을 통한 변혁을 일으키는 기독교의 선교·문화 운동이다. 니버의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 유형이 적극 활용된 이 실천 운동은 궁극적인 문화 변혁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준비와 계획이 필요했다. 당장의 위기 앞에 놓인 한국교회에게 문화선교는 가까이하기엔 너무 멀리 있었다. 그 결과, 문화선교는 ‘문화를 선교의 방법으로 활용할 수 있다’와 같은 당장 실행이 가능한 지침으로 축소되고 왜곡되었다. 이는 실용성 있는 기독교 외부 문화들을 진지한 고민 없이 유용하는 행태를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문화선교 운동의 본래 의도와는 관계없이 한국교회는 문화의 유용에 있어 더욱 실용주의적인 자세를 취하는 근거로 문화선교 개념을 사용한 셈이다.
어디로 가야 하죠?
이후 한국 사회는 진정한 세속사회로 접어들었고, 사람들은 종교를 자기 삶의 아주 일부분으로 축소했다. 한때 기독교와 같은 종교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문화적 이분법은 역설적이게도 종교를 삶에서 분리하는 방편으로 사용되었다. 기독교의 문화는 교회 안에 갇히게 되었고, 외부로 손을 뻗으려는 그 어떤 시도도 달갑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기독교 문화는 교회 내부로 축소되었고, 간혹 개별 활동을 통해 교회 밖 문화와 연결점을 찾고 있을 뿐이다. 그 외의 연결점은 주로 교회 내부 문화를 위해 외부 문화 요소들을 유용하는 정도일 것이다. 형편이 이렇다 보니, 교회와 문화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위한 신학적 관심조차도 줄어들고 있다. 21세기 키워드로 꼽히던 ‘문화’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학회도, 교회도 많이 줄었다.
하지만 인류가 존재하는 한 문화도 존재한다. 존재하는 방식은 달라질지 몰라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인류가 존재하는 한 문화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이어져야 한다. 또 하나, 인류가 존재하는 한 종교 역시 존재한다. 존재 방식과 형태, 종류는 달라질지 몰라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인류가 존재하는 한 종교에 대한 관심과 연구도 이어질 것이다. 이 두 분야의 연구는 작게든 크게든 연결될 수밖에 없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을 시작으로 연재될 여러 편의 문화 이야기는 그 연결점에 접근하는 하나의 시도이다. 이전보다 적은 관심을 받게 될지, 흥미로운 이야기로 읽힐지 모를 일이지만, 누군가는 지속해서 연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으니 말이다.
생귄의 한마디
민민님, 기독교 문화에 대한 첫 번째 글 잘 읽었습니다. 인류 문화 속 혼종성(hybridity)이란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 우리는 왜 그토록 ‘순혈주의’란 환상에 빠져 있었을까요? 마치 이 세상이 빛과 어둠처럼 분명하게 구분되는 줄로만 알고 그 틀 안에서만 해석하려고 했던 것이죠. 특히나 우리 대화의 주제인 대중문화에 대해서는 더 그랬던 것 같아요. 그저 ‘기독교적인 것’과 ‘반기독교적인 것’으로 단순하게 나누는 데 급급했지요. 이런 관점이 얼마나 허황된 착각인지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데 말이에요. 사실 기독교 역사 자체가 다양한 문화가 혼합된 결과였죠. 만일 복음이 ‘순수’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었다면, 오늘처럼 세계 다양한 민족들이 복음을 접할 기회는 없었을 테니까요.
글을 읽으면서 저의 관심은 자연스레 ‘한국교회’로 향했는데요. 한국교회와 문화의 관계를 살피는 프레임으로 니버나 태너와 같은 영미권 학자의 이론이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한국교회는 이런 논의를 적용하기에 그 역사가 너무 짧고 문화도 다르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한국교회가 정말 다양 한 모습이길 원하지만 사실 다 비슷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한국교회 문화 담론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을까요? 저는 이런 고민을 중심으로 다음 글을 써보려 합니다.
이민형(민민)
중학생 시절, ‘낮은울타리’의 ‘반-대중문화 운동’에 충격을 받아 그동안 듣던 팝송 테이프들을 주저 없이 쓰레기통에 넣으려다 이것이 맞는 선택인지 심각하게 고민했고, 직접 공부해서 밝혀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후 유학길에 올라 보스턴 대학에서 브라이언 스톤 교수를 만났고, 핑크 플로이드를 좋아하는 사람은 문화와 신학을 연구할 자격이 있다는 그의 말에 박사학위까지 지원해, 결국 한국교회가 대중문화를 유용하는 방식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성결대학교 파이데이아학부에서 교양과목을 가르치고 있으며 대중문화, 미디어, 기독교 전통문화 등을 연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