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호 네 생각이 났어]

이 편지 수신자는 필자가 직·간접적으로 만난 이들을 반영한 가상 인물입니다.

“나의 스무 해는 끊임없이 내 자아의 경계를 침입해 들어오는 엄마를 밀어내는 전쟁이었다.”

혜지야, 너의 명제를 읽으며 나는 내가 얼마나 무례한 선생이었는지를 비로소 깨달았단다. 오랜 전업주부 생활 끝에 선 강단이라 설레는 마음에 과도한 결심을 한 것 같아. 무엇보다 낯선 타국에서 주부 생활을 하면서 박사학위를 따는 동안 겪은 계류유산 경험 때문이기도 하단다. 의사 말로는 비교적 안정적인 임신 주차였다는데, 내가 밤잠 안 자고 논문을 쓰며 무리했던 탓일까? 난 엄청난 죄책감과 미안함을 느꼈어.

엄마의 ‘나 되기’ 사투로 인해 세상에 나올 기회를 잃어버린 그 아이의 태명은 ‘아이리스’, 딸이었단다. 태몽도 인상적이었지. 아주 예쁜 여자아이의 얼굴을 한 구렁이였거든(좀 그로테스크하게 들릴지 모르겠구나). 그렇게 소중하게 온 한 생명을 잃고서 나는 다짐했지. 내가 만약 강단에 선다면, 앞으로 내가 만나고 가르칠 모든 여학생을 ‘나의 아이리스’라고 생각할 거라고. 그래서 감히 너희에게 그런 과제를 내준 거였단다. 내가 보지 못했던 성장 과정을 알고 싶은 욕심이었어. 이제부터 길러내려면 너희들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지. “여러분의 스무 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고 왜 그런 결론에 도달했는지 설명해보세요. 분량 제한은 없습니다.”

너의 솔직하면서도 위협적인 문장과 무려 열 쪽이 넘는 긴긴 글을 읽으며 나는 ‘선생’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누군가의 ‘학교 엄마’가 되겠다고 선언하는 일이 얼마나 섣부른 생각이었는지 깨달았단다. 너의 말들은 내 존재 안에 담아내기가 버거웠어. 길고 긴 너의 이야기 끝에 혜지, 너는 추신을 달았지.

추신: 1학년 필수 교양과목 과제로 나를 다 까발리라는 요구를 하는 교수가 처음에는 어이없었습니다. 화도 났습니다. 까짓것 5점 정도 날려버릴까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학교를 오며 가며 저도 모르게 지난 스무 해를 돌아보게 되더군요. 그리고 내 인생의 한 줄 요약 문장을 만들고 있는 저를 발견했어요. 누군가에게 제 이야기를 이렇게나 솔직하게 해보기는 처음입니다. 무엇보다 스스로도 이런 질문은 처음 해보네요. 대학 생활을 시작하며 이렇게 스무 해를 정리하고 출발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학교 엄마가 되어 주시겠다는 말을 믿겠습니다. 엄마를 한 사람쯤 더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저도 설레기 시작했습니다.

혜지야! 너는 첫 학기를 시작하자마자 선생이 내준 숙제의 의도를 가장 잘 파악한 제자 중 하나였어. 그때는 무덤까지 가져가겠다 약속했었는데, 이렇게 공개적인 공간에서 네 이야기를 나누도록 허락해주어 참 고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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