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9호 교회력, 계절의 독서] ‘예전적 시차’를 발견하는 두 권의 책
교회력을 지킨다는 것
교회력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일까? 교회력 주제에 맞춘 본문·설교·찬양을 예배에 포함하기, 절기색으로 스톨과 강단을 장식하기, 전통 절기 예식이나 특별 행사, 정해진 기도문 읽기 등이 떠오른다. 이런 것들이 교회력 계절에 따라 바뀌는 풍경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렇게 적고 보니 교회력이란 주일예배 기획에 도움을 주는, 예배를 준비하는 목회자를 위한 것이지, 일반 교인의 평범한 삶과는 밀접한 관련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예전’(liturgy)이라는 말이 ‘일하다’(ergon)와 ‘사람들’(laos)로 이루어진 ‘백성의 일’(leitourgia)에서 왔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전은 목회자만의 업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마땅히 허락된 은총이다. 예전의 토대가 되는 교회력이 예배당에 걸린 목회자의 달력에 그친다면, 교회력이라는 타임라인 위에 쌓아 올린 여타 예전 역시 교회 밖 우리 삶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예전이라는 은총을 우리 일상으로 옮겨올 필요가 있다. 말처럼 쉽지는 않다. 일상 공간인 부엌·침실·거실·사무실·강의실·공원·PC방은 예전 수행 공간인 예배당과 너무나도 다르다. 하지만 교회력은 시간에 관한 것이다. 목회자든 평신도든 그 어디에 있더라도, 우리는 모두 시간 안에서 삶을 살아간다. 교회력은 우리의 모든 시간에 깃든 은총이다.
교회력은 반복되는 시간의 주기에 의존한다.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고대 사람들은 반복되는 자연 주기를 다양한 신의 활동과 연결하곤 했다. 현대인이 보기에는 미신처럼 보이는 구석도 있지만, 그들은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신의 활동과 삶의 의미, 세상의 이치를 발견하곤 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명절이나 축제, 기념일을 만들어 기억과 기대를 품었다. 우리는 자연현상에 관해 고대인보다 훨씬 과학적인 설명을 갖고 있다. 그러나 반복되는 주기를 60초·60분·24시간·7일·1개월·365일로 기계적으로 나누는 데 머물지 않고, 반복되는 시간을 멈춰 세워 이름을 불이며 의미를 발견할 때, 우리 시간은 더욱 풍성해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시간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졌지만, 똑같이 흐르지 않는다. 시간에 이름을 붙여 의미 차이를 만드는 것, 반복되는 주기를 그리스도의 이야기로 채우며 시간의 질적 차이를 빚어내는 것이 바로 교회력을 지키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순간에 다른 시간을 살아가며 발생하는 시차, 굳이 이름을 붙여보자면 ‘예전적 시차’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 예전적 시차를 만들도록 도움을 주는 두 권의 책이 있다.
한 해의 예전적 시차
로버트 웨버(Robert E. Webber, 1933-2007)는 영향력 있는 북미의 개신교 예배학자이다. 그가 쓴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설교》(CLC)는 다섯 권으로 이루어진 ‘고대-미래’(Ancient-Future) 시리즈 중 한 권이다. 이 시리즈는 과거부터 내려온 교회의 유산으로 현대 문화를 헤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기획이다. 국내 번역본 제목은 예배를 기획하고 설교를 준비하는 목회자를 위한 책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구매층 역시 목회자-설교자로 짐작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교회력은 목회자나 교회당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책 역시 그렇다. 원서 제목은 《Ancient-Future Time: Forming Spirituality through the Christian Year》(고대-미래의 시간: 교회력에 따른 영성 세우기)이다. 책의 목표는 주일예배가 아니라, 영성을 세우는 것이다. 웨버는 교회력의 역사적 기원과 그 의미를 설명하면서, 교회력이 이끄는 그리스도의 이야기에 우리 영성을 비추어본다.

로버트 웨버의 예배학 체계에서 드러나는 일관된 관점은 ‘내러티브’이다. 예전이란 사건의 기계적인 나열과 반복이 아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내러티브)를 기억하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혹은 일어나야 할)을 예상하고 기대하는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이 구원 내러티브의 반복이 영성을 형성한다. 교회력은 지구가 태양을 도는 52주를 주기로 반복된다. 이처럼 그레고리력과 주기는 같지만, 시간의 셈법이 다르다. 그레고리력은 1월에 새해가 시작하지만, 교회력은 주로 12월 첫 주, 한 달 앞서 대림절에 시작된다. 약 한 달이라는 시차가 생기지만, 보다 큰 차이는 내러티브를 통해 발생한다. 교회력은 ‘1, 2, 3, 4, 5…’의 순차적 시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내러티브에 따라 시간을 이해한다. 그는 말한다. “대림절과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성 주간, 부활절, 그리고 성령강림절을 지키는 가운데, 우리는 교회력이 그의 사역과 죽음, 장사지냄, 부활, 그리고 재림 속에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그리스도께로 우리의 삶을 일치시키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교회력의 영성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구원 사건들을 회상할 뿐만 아니라, 그 사건들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우리의 삶을 영적으로 올바로 세울 수 있다.”(21쪽) 최근 《습관이 영성이다》(비아토르)로 대중에 잘 알려져 있고, 대안 내러티브의 반복을 통해 대안적 영성을 형성하는 예배학의 흐름을 이끄는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도 웨버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교회력은 단순히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기억하기 위한 행사나 기념일을 추가한 달력이 아니다. 우리 시간을 그리스도의 시간과 연결하여 새롭게 하는 것이다. 웨버는 교회력의 시간을 이렇게 말한다. “이 사건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뒤로는 창조의 목적으로부터 앞으로는 역사의 종점까지를 포함하여 모든 시간과 관련을 맺고 있다.”(29쪽) 교회력의 리듬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계속되는 사역으로 초대한다. 로버트 웨버는 교회력이 우선적으로 실천되어야 하는 곳을 교회라 말한다. 그러나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예배당에 모일 때뿐 아니라 흩어져 있을 때도, 우리가 바로 교회이다. 웨버는 우리 삶을 통해 그 시간의 의미가 세상에 증거돼야 한다고 분명히 이야기한다. 그는 우리가 변화하는 계절에 맞춰 우리 영성의 옷을 갈아입도록 초대한다. 이 책에서 각 장 마지막에 던지는 요약과 질문은, 그 계절에 맞춰 갈아입은 옷의 매무새를 가다듬도록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준다.
하루의 예전적 시차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바뀌는 것은 지구의 공전과 자전(축) 때문이다. 교회력은 공전궤도를 한 바퀴 도는 시간에서 예전적 시차를 만든다. 그렇다면 자전주기에 따른 예전적 시차도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그 거대한 계절의 변화를 피부로 느끼기 위해서는 매일의 변화가 필요하다. 미국 성공회 사제인 티시 해리슨 워런(Tish Harrison Warren)이 쓴 《오늘이라는 예배》(IVP)는 우리가 그리스도교의 거대한 이야기에 연결되기 위해서는 하루라는 작은 이야기에서부터 잇닿아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예수님의 복음으로써 변화되는 데 일생을 들여야 한다면, 나는 교리, 신학, 교회론, 그리스도론과 같은 거대하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진리를 평범한 하루의 곁에 대고 문지르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평범한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가가 결국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사는가다.”(34쪽) 하루라는 일상을 채우지 않고서 일생을 채울 수 없는 노릇이다.

많은 곳에서 ‘삶의 예배’를 말한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간혹 교회 밖 일터나 가정에서 주일예배와 유사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는 일을 이야기한다. 때때로 일상은 나 몰라라 하고 주일예배에만 집착하는 신앙을 비판하며 삶의 예배라는 단어를 꺼내기도 한다. 둘 다 적절한 맥락에서 사용된다면 중요한 말이지만, 자칫 전자는 예배를 평범한 삶과 대립하는 특별한 행위로만 보게 하고, 후자는 예전(의례화된 형식)의 중요성을 간과하게 한다. 즉, 삶의 예배가 예전을 일상과 분리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반복으로 이해하는 가운데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삶의 예배’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구태여 삶의 중심에 예배를 붙일 정도로 예배란 삶과 깊이 관련한 무엇이다. 이해하는 만큼 우리 삶의 방향과 내용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 예배다. 그렇다면 과연 예배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왜 예배는 삶에서 계속되어야 하는가? 워런은 이야기한다. “일요일에 우리는 교회에서 예전(의식화된 예배의 방식)에 참여하고 매주 예전을 반복하며 예전을 통해 변화된다. … 각 전통 안에는 저마다의 예배 형식이 있고, 각각의 공동 예전을 통해 회중은 세상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사람들로 형성된다. … 문제는 우리가 예전을 행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다. 문제는 ‘우리의 예전이 우리를 어떤 사람들로 형성하는가’다.”(45쪽) 그렇다. 예배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는 일이 일어난다.
제임스 스미스에게 깊은 영향을 받은 워런은 예전의 반복을 통해 우리 존재가 형성된다고 이야기한다. 반복되는 예전을 통해 무의식 가운데 사랑의 대상을 조정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우리는 사랑의 존재로 형성된다. 삶을 예전(예배)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우리가 일상을 통해 사랑의 대상과 사랑의 방식을 조정하고, 사랑을 실천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은 일상과 상관없는 것이 결코 아니다. 또한 반복되는 예전은 우리 삶에 몹시 중요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을 어떻게 예전의 눈으로 읽을 수 있을까? “우리가 시간을 보내는 방식, 눈에 잘 띄지 않고 귀에 잘 들리지 않는 그 방식이 우리를 형성한다. 교회의 공동체적 실천에 뿌리내린 일상의 순간들은, 습관과 반복을 통해 스치는 순간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별된 하루, 곧 구별된 인생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형성한다.”(47쪽) 그리스도 공동체의 예전을 통해 삶의 예전을 읽어낼 틀을 습득하고, 삶의 예전을 통해 공동체와 예전을 이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날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변화되어간다.
우리의 하루는 지루하고 분주하다. 그리고 반복된다. 워런은 잠들고 일어나고 일하고 먹고 다투고 사랑하고 다시 잠자리에 드는 권태로운 일상을 ‘우리를 새롭게 하는 예전의 눈’으로 새롭게 본다. 반복이 차이를 만든다. 워런은 그렇게 하루하루 반복되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발견한 예전적 시차가 자신을 형성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따뜻하게 쓴 챕터를 한 장씩 넘기다 보면, 우리의 삶에서도 예전의 흔적을 찾기 위해 코를 킁킁거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성찰 질문과 실천 제안을 담고 있는 책의 부록은, 앞선 웨버의 책이 그랬듯이, 우리의 반복되는 시간에 이름과 의미를 붙여 시간의 차이를 빚도록 돕는다.
처음 질문을 떠올려 본다. 교회력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정의는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교회력을 지키겠다고 주일을 기다리지는 않아도 된다. 우리는 이미 시간의 은총 속에 있다. 주일 오전 예배를 시작할 때뿐 아니라 언제, 어느 곳에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제 시간이 되었으므로 하나님께 예배드립시다.”
이광희
그렇게나 교회를 좋아하더니 교회의 일꾼이 되어 ‘덕업일치’를 이루었다. 한신대 학부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팟캐스트 〈모두의 아멘〉과 유튜브 〈예배에 관한 아무 말〉 등 이것저것을 시도하고 있다. 가끔 글도 쓴다. 옮긴 책으로 《내일의 예배》(브랜든선교연구소)가 있다.
